무제[無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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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혼자 인사하고 혼자 좋아했던 너가 다른 학원으로 옮겨갔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음에도 5개월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우연히 늦잠자서 허겁지겁 뛰어가서 겨우 지하철에 탔으나 평소에 타던 1번칸이아닌 2번칸이었다
언제나처럼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지만 오늘만은 쇼팽이아닌 베토벤이었고 콘체르토가 아닌 교향곡이었다
운명 교향곡
어두운 1악장의 시작과 동시에 눈을 감는다
밝은 2악장의 시작과 동시에 눈을 뜬다
너가 보인다
너와 나는 운명일까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한다
너는 나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6개월간 하루도 안 본 날이 없는 단어장을 처음으로 못보고 너만 보았다
처음으로 시도 써보았다
혹시 니가 읽진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 물이 달았다
오늘은 왜인지 느낌이 좋았다
지하철에 탔는데 자리는 별로 없었고 나는 한 학생 옆에 앉는다
얼마전에 시작한 고백서를 펼친다
지하철이 몇 일 전 니가 탔던 지하철역에 멈춰선다
내 눈도 갸날픈 흰 발목에 멈춰선다
그렇게 내 책넘김은 멈춘다
하필 책은 또 고백서다
내 옆자리 학생이 내린다
처음으로 너와 옷깃이 닿는다
멈춘 페이지는 넘어가지 않고 내 심장의 빠른 박동은 멈추지 않는다
너는 나에게까지 들리는 하품을 하지만 나는 너에게 들리지 않을까 심장박동을 걱정한다
귓가에는 쇼팽 발라드 1번곡의 가슴아픈 멜로디가 흐른다
너는 무심코 내리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일도 한타임 늦게 지하철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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