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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tmacht [1390254] · MS 2025 · 쪽지

2026-04-06 0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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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 산다는 것 - 문이과 비율 1:40의 서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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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내신 사탐 선택자 기준으로 문이과 비율이 1:40이었습니다. 문과 8명, 이과 약 320명이었지요.


 이미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저희 학교에서 문과가 얼마나 찬밥 신세였는지는 전달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과는 매년 의사를 50명씩 만들고 대학 잔치를 여는데, 문과는 서울대도 1년에 1명 꼴로 가뭄에 콩 나듯 하니 학교 입장에서 예쁠 리가 있겠습니까? 딱히 감정이 없다더라도 결국 실적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문과를 이과처럼 챙겨주기는 어려웠겠지요.


비율이 1:40이라 그런지 학교에서 열어주는 행사 비중도 대충 1:40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모든 행사가 이과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고, 그나마 문과에게 접대를 해주는 행사라면 사회과 학술제나 문학 공모전?


참고로 사회과 학술제는 언제 개막/폐막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문학 공모전은 모든 상을 이과가 타 갔습니다. 문과들이 노릴 만한 산문은 '참가자 부족'을 명목으로 시상 거부.


그러나 이제 대회나 행사가 학생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니만큼 큰 불만은 없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서러웠던 것은, 이과를 위해 여는 행사에 문과들을 강제 동원하는 일이었지요.


이야기는 2학년 여름 방학 전 어느 주말에 '체험형 과학 교육'을 하겠다는 공지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외부 강사 12명을 불러서 한 교실에 대략 28명씩 몰아넣고 주제별로 어떤 실험 같은 것을 시키겠다는 건데, 공지에 따르면 생물학 실험이나 화학 실험 같은 것이 있었고 어떤 반에서는 로봇을 만들겠다고 했지요.


의사만 주구장창 배출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혹은 내신 상위권이나 모의고사 상위권에 자리하지 못해 '재수하지 말고 공대에 진학할 것을 강력히 권유받는' 의대 지망생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대 많이 보내려고 참 고생한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문과한테 저런 걸 시키겠어 하고 담당 선생님께 여쭤 봤는데, 웬걸 저도 당연히 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니 제가 과탐을 하나도 안 듣는데 어떻게요?'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아무렴 학교에서 참여를 강권하는데 어떻게 항변을 해서 빠져나가겠습니까.


결국 아예 할 줄 모르는 화학이나 생물학에 비해서는 로봇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로봇이나 만들어서 신나는 레이싱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실에 앉아서 조를 꾸리고 나니 문과로서 절대 보아서는 안 되었을 험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과학교육원 교재인지 운동량인지 등등등...그래도 물리학에 배경지식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로봇 부품을 뜯어 보았더니 이게 흔히 말하는 레고 같은 게 아니라 아예 전문장비였던 겁니다! 저는 졸지에 컴퓨터와의 통신장비까지 보유한 복잡계 로봇을 부품 단계부터 차근차근 조립해서 완성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한창 정부의 수매 정책 시행 시 사회적 잉여의 변화 같은 거나 고민하던 저는 얼뜨기처럼 그저 멀뚱멀뚱 앉아만 있었고, 그사이 같은 조 이과들은 마치 익숙한 것처럼 신속 정확하게 그 로봇을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요. 조에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제 모습과, 이런 곤경에 저를 밀어넣은 학교의 이과 우대 정책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결국 내면적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틀 연속 밤을 새고 반드시 타야 하는 지하철 급행열차를 놓쳤을 때와 같은 수준의 피로감을 느꼈고요. 점심시간에 저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부모님께 헬프콜을 쳤습니다.


사실 그 토요일이 외부 장학기금 행사에 참석하기로 된 날이었기 때문에 저는 저를 픽업하기로 했던 아버지께 평소보다 2시간 빨리 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뒤로는 강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교에서 부리나케 도망쳤고요. 해방감을 느끼며 맛있게 점심을 먹었습니다.


참, 학교의 이과 우대 정책에 희생된 그때의 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합니다. 공지할 때부터 이과들 생기부 쓰기 좋으라고 하는 행사에 굳이 문과들을 끌어들인 이유도 모르겠고, 굳이 학교의 모든 행사를 독점하는 이과들이 주말에까지 우리 문과들을 들러리 세워야 했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냥 '남들 다 하는 행사니까' 너희들도 같이 와서 하라는 간편한 논리 속에 두 집단이 서로 다른 공부를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고려는 사라졌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이 '너무나도 압도적 다수'였던 나머지 자신들이 어떤 소수자들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극도로 불쾌한 그 과학 행사를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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