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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tmacht [1390254] · MS 2025 · 쪽지

2026-03-02 00: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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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오늘의 상식: 3.1 운동과 조선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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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기조를 바꿨다'는 식의 서술이 나온다


하지만 일제가 "어멋 조선인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무섭잖아? 이제부터는 잘 해줘야지!!!" 하고 바꿨을 리는 없지 않은가


사실 3.1 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고


그만큼 당대의 세계사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선 3.1 운동 이전 일본령 조선의 상황을 알아보자


러일전쟁 승전과 한일병합조약으로 일본이 장악한 조선은 원래 육군의 영지 같은 거였다


러일전쟁 막바지 봉천에서 러시아군과 영혼의 한타로 승리를 가져온 것이 육군이기도 했고


그런 부차적인 것보다 중요하게는, 조선이 대륙으로 뻗은, 육군이 나아가는 방향의 기반이 될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절대 육군이 조선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당장 3.1 운동 이전 총독들의 면면을 보라


초대 총독 -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육군 원수. 데라우치 백작.

2대 총독 -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육군 원수. 하세가와 백작.


다 보신전쟁 시기부터 전장에 나선 진성 육군 장교들이다


한편 이 조선총독이라는 지위는 일본 제국 내에서 굉장히 높은 지위였다


우리의 국가의전서열에 대응되는 궁중의례서열에서 6위에 해당하는 등 친임관(천황이 직접 임명해 주는 고위공무원) 중에서도 매우 높게 쳐 주었고


무엇보다 조선 내에서는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중앙 행정은 총독의 독단 전제이다.'

(원문: 朝鮮に於ける中央行政は總督の獨斷專制である。

직역: 조선에 있어서 중앙행정은 총독의 독단전제이다.)


그만큼 당대 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총독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조선의 왕'이었고


거기에 더해 일종의 식민지 주둔군인 조선군을 지휘하고 천황에게 직접 상주하여 보고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일본의 절대 권력인 천황에게 직접 보고하고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천황 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보면 된다


명목상의 상급자가 있어도 천황에게 직보하여 결정을 뒤집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그럼에도 육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마음대로 날뛰지 못한 것은 단 하나, 예산권 때문인데


무슨 짓을 하고 싶어도 일단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예산권을 쥔 의회와 내각에 조금의 양보를 하는 것이 일본의 조선 통치 구도였다


그런데 육군이 조선 전체에 군대식, 노예식 통치인 무단통치를 적용하고 이로 인해 3.1 운동이 터지면서 상황이 바뀐다


당장 '어떻게 했길래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냐'는 경악의 목소리와 별개로


평소에도 육군의 조선 장악을 매우 고깝게 보던 내각이 육군을 향해 칼을 빼들기로 한 것


게다가 당시는 제1차 호헌운동으로 촉발된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가 일본 사회 전체에 퍼져 있었고


당시 내각 또한 문민으로서 중의원 의원이자 입헌정우회 총재인 '하라 다카시(原 敬)' 내각이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 육군으로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위의 압박을 받게 된다


당장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3.1 운동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내각은 조선총독에 문관도 올릴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 뒤 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후보로 내정하였으나


이에 대해 육군이 문관은 아무튼 안 된다면서 온갖 생떼를 쓴 끝에 타협책으로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가 내정


이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조선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문화 통치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일본의 조선 통치는 본격적으로 이른바 문화 통치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물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물러난 이후에는 도로 육군 대장이 부임하면서 강경 통치로 나아가긴 하지만...


이런 복잡한 내부 사정 외에 3.1 운동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에 영미권이 큰 거부감을 보이면서 외교적 고립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문화 통치의 원인이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협상국 라인과 영일동맹이 외교 정책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들의 큰형님이자 뒷배인 영국이 화를 내면 숙여야 하는 건 일본이었기 때문


한편 돈 문제도 있었을 수 있다


3.1 운동을 진압하는 데 들어간 계산서를 보고 기절한 관료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본국 납세자들이 조선에 돈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문화 통치가 아니었더라도 이제 더 이상 헌병 경찰 제도의 유지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문화 통치는 그 폐지의 좋은 구실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3.1 운동 이후 1920년대, 30년대가 되어서도 일본은 독립운동 탄압 예산을 포함해 조선에 매년 항공모함 2대 치 예산을 투입해야 했으며


만약 3.1 운동과 비슷한 규모의 대규모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나면 조선군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체 추산도 하였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조선인들을 진정시켜야 할 당위성을 느꼈는지 알 수 있다


3.1 운동은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을 극적으로 전환시켜 조선인들의 저항력을 낮추는 한편(문화 통치기 가장 많은 친일파 발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발단이 되어 광복 이후에도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법통을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영향은 대한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던 선조들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


우리도 이런 역사를 잘 알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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