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i 수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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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망의 수능날이었다.
언어영역 OMR을 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손머리를 하고 있는데
음악이 흘러나왔다.
터졌다! 잭팟이닷!
역대 수능, 평가원 안내방송 음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좋은 징조라 생각하고 미소를 지었다.
경쾌한 바이올린의 요동은 마치 하늘을 걷는 나의 다리를 나타내는 듯 했다.
하지만 막상 시험지 표지를 넘기고 나니 전혀 아니었다.
그 해 언어는 근 몇 년 만의 불언어였다.
3번 대피장소 문제, 4~5번 셋트 문제에서 막혔다.
내가 아무리 막장이었던 시절에도 언어영역 듣기평가 때문에 문제를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1 3월 모의고사 이래로 5년 간 단 한 번도 막혀 본 적 없는 언어영역 듣기를,
하필이면 내 생에 마지막 수능에서 막혀 본 것이다.
나는 좌절했다.
시험지를 계속 넘겼다. 유난히 문제들이 어려웠다.
9시 50분 경 , 시험지를 보았다.
당시 나는 하필이면 가장 어려운 3개 지문을 다 못 푼 상태였다.
시간부족의 가장 큰 주범은 석보상절 지문이었다.
복합 지문(27~31), 그레고리우스력 지문(32~36), 채권 지문(44~46).
정신차려. 이거 다 날리면 나는 갈 데가 없다.
10초 간 나의 모든 폐활량을 동원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서 하나하나 처치해나가기로 결심했다.
우선 나는 평소에 과학 지문에 가장 강했으므로, 그레고리우스력부터 건드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문이 워낙 어렵다보니,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32번 문제를 풀 때 1점짜리 일치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배배 꼬인 선택지를 하나하나 따져보니 '교회의 요구에 부응하였다'라는 표현이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게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다행히도 그 뒤에 보니, 그레고리우스력 지문에 달린 문제들은 모두 맞추었다.
복합지문에서 율리유곡을 볼 때에는 예전에 백구에 대해 정리한 것이 떠올라서 바로 풀어내었다.
일반적인 고전작품에서는 백구가 탈속을 상징하여 긍정적인 존재로 나오는 것과는 달리,
탐욕스러운 존재를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8번 문제를 바로 풀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문제들에서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채권 지문. 앞의 두 지문을 다 풀고 나니,
9시 58분 13초였다.
2분도 안 남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가 언어를 풀면서까지 이렇게까지 똥줄을 태운 적이 있던가.
문제를 먼저 보았다. 44번은 전개방식이고, 45는 추론, 46은 그래프 적용.
각 문제의 선택지들도 대략 훑어봤는데, 45번은 일치여부에 추론의 타당성까지 고려하여야 하니
2분 내로는 절대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여 과감히 포기하고 들어갔다.
44번을 보니 글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전개방식을 묻는 문제같아서,
각 문단에서 맨 앞문장과 맨 뒷문장, 그리고 "왠지 중요해 보이는" 몇몇 문장씩만 골라서 읽었다.
그랬더니 3번 '유사한 원리를 보이는 현상에 빗대어'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비유, 유추를 통해 채권의 특성을 설명하는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정답을 3번으로 체크하고 나니 30초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뒤에 바로 46번을 째려봤다. 그래프 문제니까 지문의 내용을 그대로 좌표평면상에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자신있게 문제를 잡으려 했는데,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한 것 같았다.
다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언어영역 참고서나 인강에서 봐왔던 내용들을 떠올렸다.
'적용하기는 지문에 있는 그대로만 적용하면 된다'- 그 간단한 원리,
그래, 그 간단한 원리에만 맞게 하면... 아아.... 그래. 난 할 수 있어.
남은 30초 동안 어디 신나게 놀아보자.
이거 떄문에 대학 떨어지면 사수하면 그만이지 뭐.
이런 생각으로 다시 문제를 야렸다.
대범함을 갖고서 그래프의 x, y축과 발문을 노려보다.
어차피 제시문을 통으로 다 읽을 시간은 없으니,
금리 변동으로 인한 채권 가격의 변동이 나오는 부분만 찔러서 발췌독을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시문을 딱 쳐다봤는데, 정말 운 좋게도 밑줄이 설명하는 상황에 부합하는 부분들만
그 순간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정답을 체크해 놓고 보니, 어느새 사이렌이 울렸다.
결국 추론 45번은 풀 수 없었다.
그 순간 왠지 마음에 드는 숫자 하나를 골라 임의로 찍고 나왔다. 물론 틀렸지만 (...ㅋ)
시험이 끝나고 나는 기분이 너무 얼떨떨했다.
하필이면 가장 어려운 지문 3개만 마지막에 남겨놓고 풀게 되다니. 그것도 10분밖에 없는 상태에서.
미칠 것 같았다. 절망스러웠다. 나의 21년은 헛것이 된 것 같았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서울대 못 가겠네. 듣기 날리고, 지문도 3개나 날렸으니 보나마나 3등급이겠네 병-신새끼.
서울대 가고 싶어서 학교도 자퇴했는데. 미친놈아.
아냐 아냐 괜찮아. 그래, 수리영역. 수리영역 100점받고 연고대라도 가면 되잖아.
수리영역이라도...
.
하지만 수리영역도 나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9월 평가원에 비해 문제가 술술 풀리지를 않았다
그래도 다 풀기는 풀었으나 검산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17번 문제를 마지막까지 남기게 되었는데 조금 껄쩍지근했다.
ㄱ,ㄴ,ㄷ 다 풀고나서 얼마 뒤에 또다시 시험 종료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평소에 계산 실수로 틀리는 문제가 꼭 1,2개씩 나오는 편인데 검산을 못 해서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분명히 틀린 문제가 생겼을 거라 생각하고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 주시기 위해 새벽 3시부터 일어나셨다던데 너무나도 죄송했다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보나마나 수학 4점짜리 3개 틀렸을테니 서성한도 힘들게 갑니다
올해는 응시인원도 너무 많아서 대기번호를 받을 각오도 해야 하겠지
아.....
차가워지고 맹맹한 밥이 갑자기 뜨겁고 짜지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은 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나는 밥과 반찬을 반도 먹지 않은 상태로 뚜껑을 닫아 버렸다.
화장실에 갔다.
세수를 연거푸 했지만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한 5분 정도 지나자 진정이 되서 그제서야 다시 교실에 들어오다가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 버렸다.
교실 뒷문으로 들어오면서 우연히 어떤 사람의 책상 위에 있는 가채점표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답을 100이라고 써서 낸 주관식 문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101이라고 나와있었다.
그런데 그는 외고 출신인 데다가 국사, 제2외국어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같은 찌질이가 맞겠냐, 국사까지 건드리는 외고느님이 맞겠냐.
보나마나 외고느님이 맞겠지.
병-신.
이젠 4개 틀렸네. 갈 곳이나 있느냐.
......몰라. 외국어라도, 외국어라도 만점 받으면 되지.
작년에 수능 끝나고나서 외국어영역이 어렵게 나왔다는 말이 뉴스에 연일 나왔지만
쉬운데 왜 어렵다고 하는지 이해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아니던가.
그렇게 다른과목 다 망치는 와중에도 2010 수능에서 외국어만은 만점 받아오던 내가 아니던가.
올해 6월 평가원에서도 만점 받아온 내가 아니던가.
울면서 마지막으로 내가 그동안 틀린 EBS 파이널 문제들을 정리해 놓은 것을 펼쳐보았다.
눈물이 자꾸 멈추지 않았는데, 시험지가 약간 어두워 눈물자국이 너무 잘 보이는 게 쪽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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