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라몬 [1325791] · MS 2024 · 쪽지

2025-06-08 18: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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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방언의 변화: 중간 방언과 균일화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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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방언, 만남과 변화의 기록: 중간 방언과 균일화의 여정

우리말은 하나의 통일된 모습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다채로운 방언들이 존재하며, 이 방언들은 고립되어 있기보다는 끊임없이 서로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왔다. 이러한 방언 접촉(dialect contact)은 새로운 언어 형태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기존의 방언적 특질을 소멸시키기도 하면서 한국어의 풍경을 역동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김수영(2020)의 "한국어 방언 접촉 양상에 대하여"와 이상신(2020)의 "언어 및 방언의 접촉과 이에 따른 변화"는 바로 이러한 한국어 내부의 방언 접촉 현상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들이다. 이 두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어 방언들이 서로 만나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그 결과 어떤 새로운 언어적 지형도를 그려왔는지, 그리고 표준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그 기제와 양상을 상세히 살펴본다.


1. 방언 접촉이란 무엇인가?: 트루드길에서 정승철까지

방언 접촉 연구의 이론적 토대는 피터 트루드길(Peter Trudgill, 1986) 에 의해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이상신(2020: 49)에 따르면, 트루드길은 방언 접촉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 방언 접촉의 유형 (Trudgill 1986)

ㄱ. 병존(mixing): 접촉하는 방언 특징들이 양립하는 것.

ㄴ. 평준화(levelling): 접촉하는 방언 특징들 가운데 어느 하나로 단일화하는 것 (김수영(2020)은 이를 '방언 균일화'로 번역).

ㄷ. 단순화(simplification): 규칙성을 제고하는 혹은 잉여성을 제거하는 것.

ㄹ. 중간방언 형성(interdialect formation): 접촉하는 방언 특징들의 중간적인 모습을 갖게 되는 것.

ㅁ. 재분배(reallocation): 접촉하는 방언 특징들이 사회적 혹은 언어적 기능을 달리하며 양립하는 것.


이러한 트루드길의 분류는 이후 방언 접촉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어 방언 연구에서는 정승철(2010)이 우리말 방언 자료를 바탕으로 트루드길의 분류를 보다 구체화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 방언 접촉의 분류 (정승철 2010)

ㄱ. 병존: 접촉 지역에서 인근의 핵방언들이 가진 언어 특징이 수의적으로 함께 출현하는 것.

ㄴ. 편입: 해당 지역에서 신형의 자극을 전격적으로 수용, 자신의 언어 특징을 버리고 다른 핵방언의 언어 특징을 도입하는 유형.

ㄷ. 융합: 접촉 지역에서 인근의 핵방언들이 가진 언어 특징이 섞이거나 바뀌어 새로운 언어 특징을 보이는 유형.

(1) 형태의 변경: 기존의 단어가 형태를 달리하는 경우

병렬: 공존하는 방언형을 거의 그대로 접속하여 새로운 어형을 만드는 것

절단: 공존하는 방언형의 공통적인 부분을 잘라내어 새로운 어형을 만드는 것

대체: 공존하는 방언형을 대신하여 전혀 다른 어형을 새로 만들거나 도입하는 것

혼효: 공존하는 방언형의 일부 형태를 잘라 접속하여 새로운 어형을 만드는 것

변형: 공존하는 방언형 중의 하나의 형태를 바꾸어 새로운 어형을 만드는 것

(2) 의미의 변경: 기존의 단어가 의미 영역을 달리하는 경우, 즉 양쪽 언어 특징의 충돌을 의미 영역의 조정으로 해소하는 것.


트루드길과 정승철의 논의를 비교하면, 정승철의 '병존'과 '편입'은 각각 트루드길의 '병존'과 '평준화(균일화)'에, '융합'의 하위 유형들은 '중간방언 형성'과 일부 '재분배'에 대응될 수 있다. 다만, 트루드길의 '단순화'에 해당하는 자리는 정승철의 분류에서 명확하지 않다.



더 나아가, 접촉 이후 새로운 방언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은 김유겸(2012)에 의해 다음과 같은 3단계 모델로 정리될 수 있다.


1단계 (변화 전): 각기 다른 방언들이 존재한다.

(타 방언과의 접촉): 이주, 교역, 미디어 발달 등 다양한 요인으로 방언 간 접촉이 발생한다.

2단계 (변화 진행): 접촉 초기에는 여러 방언형이 공존하거나(병존), 일부 특징이 간소화되거나(단순화), 특정 방언형이 세력을 넓히는(평준화) 등의 변화가 진행된다.

3단계 (변화 완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접촉의 결과는 다음 두 가지 양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

방언 합류(dialect merging/convergence): 접촉한 방언들의 유사성이 증가하여 결과적으로 더 이상의 방언 구획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 즉, 여러 방언이 하나의 공통된 형태로 수렴하는 것이다.

방언 분기(dialect divergence): 접촉의 결과 오히려 방언 간의 차이가 뚜렷해지거나 새로운 방언이 형성되어 이전보다 방언 구획이 더 확연해지는 것.


이러한 방언 접촉과 변화의 결과로 주목해야 할 개념 중 하나는 '코이네(koine)'다. 코이네란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여러 방언들이 접촉하여 형성된 공통어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현대 언어학에서는 "신도시(새롭게 형성된 거주 지역)의 해당 집단에서 특정한 여러 개의 방언들이 접촉하면서 주로 사용하게 되는 공통 방언형"(김덕호 2018:192)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고려말이 19세기 후기 함경도 육진방언을 기반으로 여러 지역어 및 러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주민 코이네(immigrant koine)의 성격을 띤다는 곽충구(2009)의 연구는 이러한 코이네 형성의 좋은 예다.


또한,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등장하는 '신방언(new dialect)''네오방언(neo-dialect)' 역시 방언 접촉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다. '신방언'은 주로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 세대와 다른, 젊은층 사이에서 새롭게 형성된 방언형을 말하며, '네오방언'은 공통어(표준어) 사용자들이 지방으로 이동하여 지역 방언과 접촉하면서, 지역 방언의 특성을 일부 유지한 채 새롭게 형성된 융합 방언형을 지칭한다. 이러한 새로운 방언 형태들은 전통적인 지역 방언의 쇠퇴와 함께 방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김수영(2020)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배경 하에, 한국어 내부 방언들이 접촉하면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양상을 '중간 방언(interdialect)' 형성과 '방언 균일화(dialect leveling)'라는 두 가지 핵심 현상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한다. 이 글에서는 김수영과 이상신 교수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어 방언들이 서로 만나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그 결과 어떤 새로운 언어적 지형도를 그려왔는지, 그리고 표준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그 기제와 양상을 상세히 살펴본다.



2. 중간 방언: 새로운 만남, 새로운 형태의 탄생

중간 방언이란, 방언 접촉의 결과 기존의 방언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언어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접촉 지역에서 서로 다른 방언형들이 공존하거나, 한 방언의 특징이 다른 방언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1) ‘ㅎ’ 말음 어간으로의 재분석: ‘빻-(粉)’과 ‘끟-(劃)’의 형성

중세국어 시기 특수 어간 교체를 보이던 'ᄇᆞᅀᆞ-/ᄇᆞᇫㅇ-(粉)' (빻다)와 '그ᅀᅳ-/그ᇫㅇ-(劃, 牽)' (긋다, 끌다)은 현대 국어 방언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김수영은 이 중 '빻-'과 '끟-'과 같은 'ㅎ' 받침 어간이 방언 접촉을 통해 형성된 대표적인 중간 방언형이라고 본다.


  • '빻-'의 방언형 분포: '뽀숙-'/'뽀식-'/'뽀슥-'(전남/경남 일부), '뽀수-'/'빠수-'/'빠시-'(황해/전남/경남/충남/경북 등), '빳-'/'ᄈᆞᆺ-'/'뽓-'(경북/전남 일부/제주), '바:-'/'빠:-'(경기), '빻:-'(강원/경기/충북/충남/경북 등), '빵구-'(전북/충남) 등이 관찰된다. 이 중 '빻:-'은 주로 '빠:-'류와 '빳-'류의 경계 지역, '빵구-'는 '빳-'류 지역 내에서 새롭게 발생한 형태로 보인다.



'긋-'의 방언형 분포: '귿꼬'/'그꼬'(충남/전북/전남/제주/함경), '그시구'(충남/전북/전남), '귿꼬'/'그꼬' (자음 어미 앞, 평안/황해/경기/강원/경남/경북 등), '끄코'(경북), '기리고'(전남) 등이 있다. 여기서 '끟-(끄코)'은 경북 지역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ㅎ' 말음 어간이다.


원래 '그ᅀᅳ-/그ᇫㅇ-'는 劃(긋다)와 牽(끌다)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긋-'이 劃의 의미를, ㅿ이 비음운화를 겪어 '그으-'가 된 형태가 牽의 의미를 담당하게 된다. '그으-'에 '-을-'이 붙고 어두경음화를 겪어 '끌-'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영은 이러한 'ㅎ' 말음 어간('빻-', '끟-')이, 기존의 'ㅅ' 말음 어간(예: 빳-)과 모음으로 끝나는 어간(예: 빠-)이 공존하던 접촉 지역에서, 모음 어미 활용형(예: '빠아', '그어')으로부터 'ㅎ'이 원래 어간의 일부였던 것처럼 재분석(reanalysis)되어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다양한 기저형을 가진 활용형들이 한 지역에서 함께 사용되면서, 다음 세대가 그 활용형(빠아, 그어)에서 본래의 기저형을 쉽게 파악해 낼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기저 어간을 설정한 결과라는 것이다. '빻-'은 중부 방언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지만, '끟-'은 이미 중부방언에 'ㅅ' 불규칙 활용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어 넓게 확산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2) ‘끌-(牽)’의 전파와 다양한 중간 방언형:

18세기 이후 '牽(끌다)'의 의미로 중부방언에서 형성된 '끌-'은 남부방언 등으로 전파되면서 기존 방언형들과 접촉하여 다양한 중간 방언형을 만들어냈다. 


  • 기존 방언형의 분포: '끌-'이 전파되기 이전, '牽'의 의미를 가진 '긋-'의 방언형들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분포했다.

'끗-': 'ㅿ>ㅅ' 변화를 겪은 형태로, 전남과 제주 지역에 주로 분포했다. (예: 전북 고창·정읍 '끄꼬, 끄서')

'끄스-/끄시-': 함경도와 전북 익산 등에서 나타났다. (예: 함경 '끄스고/끄시고, 끄셔따')

'끚-': 'ㅿ>ㅈ' 변화를 겪은 형태로, 전북 부안, 전남 광산·나주·화순 등에서 확인된다. (예: 전북 부안 '끄꼬, 끄저')

'끄ᇹ-': 'ㅿ'이 소실된 형태로, 경남 함양·의령·하동 등과 전남 고흥·여천 등 넓은 지역에 분포했다. (예: 경남 '끄꼬, 끄찌, 끄어따')

'끄슥-/끄직-/끄집-': 어간 말음이 'ㄱ'으로 재구되는 형태로, 전남 보성·곡성·장흥 등에서 나타났다. (예: 전남 보성 '끄스꼬, 끄스기')


  • 새로운 중간 방언형:

'끓-'('ㅀ' 받침): 충남 남부와 전라 방언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는 '끌-'의 모음 어미 활용형 '끄러'로부터, 해당 지역 방언의 'ㅀ' 말음 어간 재구조화 경향(예: '듣- + -어 → 들러 → 들을코')에 따라 재분석된 것이다.

'끌ㆆ-'('끌'꼬'): 경남 산청/남해 지역.

'끟-'('끄'코'): 경남 거창/합천 등. 이 역시 모음 어미 활용형('그어따')으로부터 재분석된 결과로 보인다.

혼효형 '끄실-/끄질-': 경남 창녕, 경북 영천 등에서는 기존 방언형('끄지-', '끄시-')과 신형 '끌-'이 혼효되어 새로운 형태가 나타났다.



이처럼 신형 '끌-'이 남부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중간 방언형들이 나타난 것은, 해당 지역이 신형 '끌-' 전파의 남단에 위치하여 기존의 다양한 방언형들과의 공존 기간이 길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어간이 재분석되거나 기존 형태와 혼효될 수 있는 언어 내적 동기가 더 많이 부여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방언 접촉은 단순히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대체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 언어 체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수영(2020)은 그 구체적인 형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병존: 신형 '끌-'과 기존의 '끗-'이 함께 사용되는 지역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전북 장수·남원에서는 'ㄹ' 말음 어간('끌-')과 'ㅅ' 말음 어간('끗-')이 공존한다.

재분석을 통한 '끓-'('ㅀ' 받침 어간)의 형성: 충남 남부 및 전라 방언에서 주로 확인되는 '끓-' (예: 충남 예산 '끌코, 끌치, 끄러따', 전북 옥구 '끌코, 끌치, 끄러따')은 신형 '끌-'의 모음 어미 결합형인 '끄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끄러'라는 활용형을 접한 화자들이, 해당 지역 방언에 이미 존재하던 'ㅀ' 말음 어간의 재구조화 경향(예: '듣-', 묻-' 등의 어간들이 ‘Xㄹ코, X르니, X러’와 같이 활용됨)에 따라, 어간을 '끓-'로 새롭게 분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 방언의 음운론적 특징이 새로운 형태의 수용 방식에 영향을 미친 예다.

재분석을 통한 '끌ㆆ-' 및 '끟-'의 형성:

'끌ㆆ-'('끌'꼬'): 경남 산청·남해 지역에서 나타나는 이 형태는 '끌-'의 활용형 등에서, 어미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발음되는 환경을 반영하여 어간 말에 성문 파열음(ㆆ)이 있는 것처럼 재분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끟-'('끄'코'): 경남 거창·합천·창녕·밀양·사천 지역에서 보이는 '끟-'은 '그어따'와 같은 모음 어미 결합형에서, 'ㅎ' 종성 어간의 특징(모음 어미 앞에서 'ㅎ' 탈락)을 유추하여 어간을 '끟-'으로 재분석한 결과로 추정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빻-'과 '긋-'의 'ㅎ' 말음 어간 형성 과정과 유사한 기제다.

혼효를 통한 '끄실-/끄질-'의 형성: 경남 창녕의 '끄실-'이나 경북 영천의 '끄질-'과 같은 형태는, 해당 지역의 기존 방언형인 '끄지-' 또는 '끄시-'가 신형인 '끌-'과 접촉하면서 두 형태의 특징이 섞여(혼효되어) 나타난 새로운 중간 방언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과도 교정(Hypercorrection)의 산물: ‘붋-’의 형성

중간 방언은 과도 교정을 통해서도 형성될 수 있다. 과도 교정이란, 한 방언 화자가 다른 방언(주로 위세 방언)을 의식하여 자기 방언에 없는 규칙이나 형태를 과도하게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는 현상이다. 중앙어 화자라면 다른 방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것이고, 방언 화자라면 방언에 있는 형태가 다른 지역의 개신적인 형태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도교정이 일어난다. '붋다'의 형성도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 '부럽-'의 다양한 방언형: '부럽-'(경기/강원 등 서부방언), '부러웁-'(경기 고양/전남 신안), '붋-'(강원 삼척/경북 안동/경남 등 동부 및 남부방언), '붉-'(전남 영암/충남 서산 등), '불부-'(함경/경북 울진 등), '불법-'(전남 승주/전북 남원), '불겁-'(전남 장성/충남 보령 등), '불-'(경기 강화) 등이 있다.


  • '붋-'의 형성 과정 추론: 김수영은 현재 주로 동북방언과 동남방언에서 확인되는 '붋-'이, 중세국어 '블-(부러워하다)'의 모음 어미 결합형 '브러~브뤄'를 이들 방언('ㅸ>ㅂ' 변화) 화자들이 서부방언('ㅸ>w' 변화)의 형태로 오인하고, 자신들의 방언 특징에 맞춰 '불버'와 같이 과도하게 교정한 후, 이를 다시 '붋-'으로 재분석한 결과일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방언 간 차이에 대한 인식과 자기 방언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결합하여 새로운 방언형을 탄생시킨 예다.




3. 방언 균일화: 유표성의 소멸과 단순화

방언 균일화는 방언들이 접촉하면서 유표적인(특이하거나 소수가 사용하는) 방언형이나 방언의 특질이 점차 사라지고, 방언 간의 차이가 줄어드는 현상이다. 이는 주로 위세가 높은 방언(표준어나 인접 대도시 방언)의 영향으로 나타난다.


1) 용언 ‘ㄹ’ 말음 어간 유음 탈락 현상의 축소:

현대 표준어(중부방언 기준)에서 '길다', '알다' 같은 'ㄹ' 받침 용언은 'ㄴ'이나 'ㅅ'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ㄹ'이 탈락한다. 그러나 과거 중세국어에서는 'ㄷ, ㅈ, ㅿ' 등 더 넓은 환경에서 'ㄹ'이 탈락했고, 동북방언이나 동남방언에서는 현대까지도 'ㄷ, ㅈ' 앞에서, 심지어 경북 일부 지역에서는 'ㄱ, ㅁ' 앞에서도 'ㄹ'이 탈락하는 현상이 남아 있었다. 

  •      



《한국방언자료집》(1987-1995)과 최근의 《지역어조사보고서》(2005-2013) 자료를 비교한 결과, 이러한 광범위한 'ㄹ' 탈락 환경이 전국적으로 크게 축소되었음을 확인됐다. 아래의 (11)은 ‘ㄱ, ㄷ, ㅈ, ㅁ’ 앞에서도 탈락하는 지역과 그 예를 보인 것이다. 특히 동남방언에서 두드러졌던 'ㄱ, ㅁ' 앞 'ㄹ' 탈락은 이제 경상도 내륙의 일부 지역과 전남 일부에만 잔존하는 형태로 줄어들었다. 이는 다른 방언과 구별되는 유표적인 형태를 피하려는 언어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방언 균일화의 예로 볼 수 있다.




2) 동남방언 ‘ㅅ’과 ‘ㅆ’의 변별력 회복:

과거 동남방언의 특징 중 하나는 'ㅅ'과 'ㅆ'을 변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비변별 지역이 경북 영덕·영천·청도·경주, 경남 울주 등 동해안과 경북 내륙 일부 지역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자료집≫과 ≪지역어≫ 모두 노년층의 발화로 작성된 자료이므로 앞으로 'ㅅ'과 'ㅆ'을 변별하는 화자들은 더 늘 가능성이 높다. 'ㅅ'과 'ㅆ'의 변별성 부재는 동남방언에만 한정된, 즉 현대 한국어 방언을 고려하면 유표적인 특질이다. 일반적이지도 않고 지리적으로도 넓게 분포되지 않았기에 시간이 갈수록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표적인 방언 특질이 소멸하는 방언 균일화 현상이다.


3) 개별 유표적 방언형의 소멸:

그 외에도 특정 지역에서만 쓰이던 독특한 용언 어간 형태들이 최근 조사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예시들은 ≪자료집≫의 예인데, ≪지역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형태들은 전국적으로 봤을 때 매우 유표적인 형태이다. '다마'와 같은 활용형에서 첫 음절에 ㅁ이 첨가되는 것이나 ㅈ 말음 용언이 ㅊ 말음으로 재구조화되는 것, ㅼ 말음이 ㄷㅌ을 거쳐 ㄷㄷ으로 남는 것 등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 때문에 방언 접촉 과정에서 표준어의 영향 등으로 점차 세력을 잃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방언 균일화는 단순히 특정 형태의 소멸을 넘어, 해당 현상에 대한 언어 태도 및 정체성에 대한 사회언어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4. 표준어와 방언의 접촉: 힘의 역학 관계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언어 접촉 중 하나는 표준어와 각 지역 방언 간의 접촉이다. 이상신(2020)은 이 관계를 '표준어의 방언 장악'과 '표준어에 대한 방언의 반격'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 표준어의 방언 장악: 표준어는 교육과 대중 매체라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각 지역 방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방언의 위축과 소멸을 가속화한다.

제주방언의 예: 강정희(2002)의 연구에 따르면, 오사카 거주 재일동포 1세 제주방언 화자들 중 1950년대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70대 이상 고령층에서는 'ㆍ' 발음이 70% 이상 보존되었으나, 1960년대에 이주한 60대 이하 중년층에서는 'ㆍ'가 급격히 소멸했다. 이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제주도 내 학교 교육 확대, 육지와의 교류 활발 등 표준어의 영향력이 급증한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 표준어에 대한 방언의 반격:

자기 정체성의 근거로서의 방언: 방언 화자들이 자신의 방언에 자부심을 갖고, 표준어의 압력에 저항하며 방언을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크레올

표준어의 방언 차용: '표준어 규정'은 방언이던 단어가 표준어보다 널리 쓰이게 될 경우 이를 표준어로 삼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앙방언에 대한 남부방언의 영향: 중세국어에서 '새ᅀᅡᆷ/새삼', '너ᅀᅡᆷ/너삼' 등 'ㅿ'과 'ㅅ'이 대립하던 어휘 쌍에서, 후자(남부방언형으로 추정)가 중앙방언에 침투하여 '새삼', '너삼' 등이 표준어로 정착한 것은 방언이 중앙어(표준어의 기반)에 영향을 미친 사례다. '이슷/이셧'이 '비슷'으로 교체된 것도 유사한 예다. 이기문(1968)에서 '비슷'을 남부 방언형으로 보았다. 



5. 결론: 방언 접촉, 한국어 변화의 역동성을 말하다

김수영(2020)과 이상신(2020)의 논의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한국어 방언 접촉은 새로운 언어 형태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기존의 언어 지형을 재편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중간 방언의 형성은 언어 사용자들이 기존의 언어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소통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이며, 방언 균일화는 사회 통합과 표준화의 압력 속에서 언어가 단순화되고 보편화되는 과정이다. 또한, 표준어와 방언의 접촉은 언어의 위계성과 정체성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현재진행형의 현장이다.


이러한 방언 접촉의 기제와 양상을 이해하는 것은 개별 언어 현상의 변화를 넘어, 언어와 사회,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앞으로 우리말과 방언들이 어떤 새로운 만남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갈지, 그 생생한 현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심도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참고: 김수영, "한국어 방언 접촉 양상에 대하여-중간 방언(interdialect)과 방언 균일화(dialect leveling)를 중심으로-", 방언학 제32호, 2020.

이상신, "언어 및 방언의 접촉과 이에 따른 변화", 방언학 제32호, 2020.)


논문에서는 ㅿ>ㅅ, ɣ>ㄱ, ㅸ>ㅂ 등으로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반대 방향으로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로 설명해야 하는 일부 방언형이 있겠지만 이들을 일반적인 변화라고 설명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 견해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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