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nita Sapiens [847641]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5-05-22 23:32:40
조회수 79

이일준 선생님과 함께하는 '자유 의지란 정말 존재하는가' 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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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뇌과학 관련 동아리, 학술 모임에서 이일준 선생님이라고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에게 자유의지에 대해서 상당히 깊이 있고 설득력이 있게 설명을 해주셔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노트에 적은 것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제가 나름 이해한 것을 한번 여러분에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저는 자유의지에 대한 강연만 2시간 정도 들었는데 재미있었는데 상당히 다양한 주제로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멋진 선생님이신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5..4..3..%EC%9D%B4..%EC%9D%BC%EC%A4%80/videos






 특히 뇌과학과 인공지능에서 요새 가장 핫한 트렌드가 바로 제가 최근에 논문을 집필하고 있는 '의식이란 무엇인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와 '우리에게 정말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우리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인가' 라는 것인데요 자유의지에 대한 논란이 꽤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리벳의 실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의지가 있고 계획성을 바탕으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생각 -> 행동 이 순서를 가야 하니까 보나마나 뇌 안에서는 이런 순서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우리가 인식을 하고, 의지가 생겼을 때 뇌파가 발생하면서 운동 근육을 자극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 라고 나와야겠죠?




 충격적이게도 리벳의 실험에서는 이거랑 반대되는 순서, 우리의 뇌가 먼저 파장을 일으키고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우리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행동을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 허상이다, 우리의 착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근거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아직 이 뇌파의 발생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 의지에 대해서는 매우 논쟁적이며, 여기서는 단순한 동작만이 관찰되었기에 함부로 이것을 바탕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얕게 생각해본 사람들 입장에선 이거 말이 안되는 거고,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 우리의 의지는 사실 착각 아니었을가? 하는 강력한 혼란을 줍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신 연구에 의해서 나름 자유 의지가 있을 수 있다는 논문이 나오고 있으니 단정하지는 마십시오.




 카이스트의 박형동 교수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흥미로운 관찰을 해서, 우리의 뇌파가 먼저 나오는 것은 자유 의지가 없다거나 뭔가 말이 안되고, 잡음이 우연히 잡힌 것이 아니라 호흡에 의해서 DMN이라는 뇌 영역 부분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을 숟가락으로 땅을 파듯이 조심스럽게 새로이 알아내어 발표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여간 이 부분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전 다 듣고 나니까 이일준 선생님 말씀에 공감이 되더군요.





리벳의 실험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주장이 많은데, 저도 처음에 이일준 선생님이 이런 단편적인 주장을 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 실험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https://blog.naver.com/paciboy/221246938115






 이 선생님은 인간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없다(그런데 이 자유의지라는 것 또한 하나의 논쟁점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하여튼)를 주장하고자 강연을 하셨는데,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다 듣고 나니 충분히 이해가 됬으며, 또한 선생님 스스로가 포퍼의 반증 가능한 과학 명제를 더욱 충실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반론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셔서 호감이 생겼습니다.




 우선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고 하시면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착각이라고 하시면서 전체적인 역사적 흐름이 인본주의, 인간 중심주의, 인간이 위대하고 특별하다는 생각이 계속 깨진 역사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 진화론으로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이후 결국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에서조차 인간은 결코 주체적이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 왔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덪붙이자면 한 사람이 좀 중간에 낑겨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설명하면서 생각보다 더럽다(?)는 점을 꼽아서 인류의 비극(?)이라고 표현하는 책도 본 적이 있엇습니다. 사는 곳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야, 우리 자체가 신의 피조물이 아니야, 심지어 그 정신머리까지 딱히 주체적이지 않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유명한 내용이 그 매트릭스 세계관이죠 우리의 뇌에서 벌어지는 전기 신호를 진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핵심 메세지였는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페노메날(관찰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상)을 통해 누메날(사물의 본질)으로 다가간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확률적으로 피크(가장 높은 구간 뾰족한 봉우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보고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거나 법칙으로 세운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확률적으로 말이 가장 잘 되는 부분을 보고 우리는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확률론적으로 높은 가능성이라는 것이죠.




 이게 제가 노트에 적힌 것과 더불어서 모두 다 최대한 적으려다 보니까 너무 중구난방에 두서가 없어지는 듯 한데 나중에 2편으로 돌아오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유명한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더군요. 그게 중요한게 뭐냐면, 우리는 분명 원자로 모든 물질이 이루어졌으며 원자들은 빈 공간이 99.99%인데 어째서 그것이 모인 것은 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우리 눈에 연속적인 불투명한 물체로 보이느냐? 였습니다.




원래 빈 공간이어야 하는데 왜 우리 눈에는 연속적인, 빽빽한 물체로 보이지? 원자들이 겹친다 하더라도 너무 빈 공간이 많은데 왜 그럴까?

https://www.youtube.com/watch?v=hOrBrd6FroE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객관적인 기준이랄까요? 원래 물질이 구성된 방식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보았을 때 다 투명하게 보아야 하는데 만약에 그랬다면 생존에 유리했을까요 불리했을까요? 무척이나 불리했을 것입니다. 저게 투명한 것이 있는데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은데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사슴인지 구분을 못 한다면 생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시각 체계부터 시작해서 인지, 감각 체계들은 모두 하나같이 진리를 향해서 막 학문적으로 발전된 기관들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생존할 때 필요한 수준으로 적절히 적응하고 진화해 왔으며, 우리가 보거나 감각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하시는 것이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이라는 것들은 정말 이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 진리를 가리켜주는 것인가? 하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뇌의 작용 방식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가시광선만 보는 인간의 시야에 이 세계를 여러 빛의 파장 중에서 가시광선만 인지하고 처음에는 빛이 가시광선만 존재한다고 착각한 것처럼, 관찰자의 인식 구조에 따라서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르게 진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앞에 슈퍼맨이 있어서 아무리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도 이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F=ma라는 공식이 전혀 그 사람에게 필요가 없었으며 그것을 알아차릴 이유도 없었다고 설명하십니다.










 칼 프리스턴의 자유 에너지 원리라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인간의 뇌는 확률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기계다! 라는 주장이며 만약에 예상과 달리 결과가 나오면 에너지가 큰 것이고, 예상과 비슷하게 나오면 에너지가 작은 것인데 뇌는 그 에너지 차이, 에너지 량,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방향으로 계속 적응하는 기관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이 나오냐면, 이 원리를 결국 생각해보면 인간의 뇌는 이 세계를 압축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 가능성에 따라서 에너지 효율성과 번식의 논리에 따라서, 생물학적 한계를 가지고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진리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이용하더라도 항상 그 정보를 파편적으로 부분만 보기에 이 세계를 죽었다 깨어나도 완벽하게 완전하게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뇌는 항상 정보를 압축하기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오늘 배운 강의 모든 내용을 다 암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것이나 감정적 요동이 쳤던 부분에 대해서만 주로 강조를 했던 것 위주로 기억을 하죠. 이 모든 것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뇌 저장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기에 칼 프리스턴의 자유 에너지 원리에 따른다면 우리의 뇌는 이 세계의 극히 일부분만 보고, 뭔가 진리를 직접 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100% 온전히 머리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선생님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프리드먼의 제한된 합리성과, 주관으로서의 객관성, 데이비드 차머스의 의식 문제, 어려운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이 부분은 별로 노트를 안했군요. gai한테 도움을 받아서 가져와보았습니다.






 과학은 페노메날에만 집중하여, 신경현상학적인 것에 집중하여 NCC를 찾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그저 수식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만 초점을 두었기에 애초에 과학이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일준 선생님의 핵심 주장인 것 같습니다.




 아까 슈펀맨 이야기를 했는데요, 만약 어떤 존재가 있는데 그 개체가 우리가 아는 물리 체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그러한 것이라고 상상해봅시다. 그럼 그 개체에게는 우리가 세운 물리 법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심도 없고요. 따라서 우리가 보는 세계는 인식 체계의 한계와 특징에 크게 좌우되며 한정되기에, 관찰자 종속성이 있어서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설명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인식이 확률론적 추론이라는 것은 인공지능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률론적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듯이, 우리를 본따서 만든 인공지능도 확률론적 추론에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만약 확률론적 추론이 불가능하거나 그것으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애초에 인공지능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인데 상당히 흥미롭게 들렸습니다. 실제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뇌를 초기에 모방하면서 발전해 왔었거든요. 뇌도 확률론적 추론 기계이고, 인공지능도 확률론적 추론 기계이기에 우리는 어떤 것을 쓰더라도 진리에 곧장 직진을 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럼 AI가 이런 확률론적 추론으로 수월하게 작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선천적으로 내장된 알고리즘, 즉 우리가 마치 유전자나 DNA를 통해서 성격이나 취향 등을 타고나는 것처럼 인공지능도 전제를 가지고 일정한 공리를 토대로 하여 움직이는 확률론적 추론 기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는 결국 loss function 손실 함수의 최소화로 움직이는데, 이는 인간이 확률론적으로 추론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메모가 되어 있네요. 만약에 우리가 선천적으로 내장된 어떤 취향이라던지 전제, 공리, 정보가 전혀 없었다면 손가락을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대단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군체 의식도 설명을 하셨는데 이 부분은 그나마 좀 아는 것이라서 반가웠습니다. 다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잘 아시죠? 거기서 개미나 벌이 왜 전체 집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군체는 집단이라기 보다는 어떤 하나의 생명체, 여왕 기준의 DNA가 각자 개체로 나뉘어 어느 개체는 손, 어느 개체는 발, 어느 개체는 머리 등의 역할을 분업으로 하기에 그것들은 따로따로 생명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물론 각자 생명이긴 한데, 엄밀한 기준에서 각자가 개별적인 DNA를 가지고 독립적인 선택과 경제적 고려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고 하시더군요.




 또한 이러한 군체 의식을 통해서 뭘 설명하셨나면, 인공지능의 의식은 아마도 이런 사회적 협력과 상호 작용에 의해서, 사회적인 pressure로 인해 일어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현재까지는 인공지능이 각자 개별적인 발전을 통해서 스스로가 의식을 얻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는데, 인간처럼 사회를 이루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면 그땐 인공지능에게도 의식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좀 다른 생각이긴 한데 의식에 대한 논쟁은 제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실제로 철학계에서도 인공지능이 의식을 얻고 뭔가 자유 의지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혼자가 아니라 인간이 사회를 이루듯이 인공지능도 서로 사회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뭔가 선택과 경제학적 원리에 따른 합리적 추론 등을 해야지 그때 비로소 의식이 발전하고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미 철학 수업에서 약간 들었던 내용이었기에 매우 친숙했습니다.




 그리고 또 선생님께 물어보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도 읽으셨던데, 왜 갑자기 이 책이 나오냐면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종교라고 주장하거든요. 종교가 뭡니까 신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뭔가 직접 보지 못한 상상의 무언가입니다. 그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서 -> 종교를 만든 덕분에 우리가 대규모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물학적 인지 자원에 따라서 비교해보면 최대 인맥이 150명이거든요. 150명이 넘어가는 순간 인지적으로 아예 과부화가 걸려서 제대로 인식을 못합니다. 실제로 침팬지 등의 동물들의 무리를 보면 150명을 넘어가질 못합니다 어떤 동물은 80마리, 어떤 동물은 60마리 등을 이루며 살고 있죠. 그들의 생물학적 한계에 따라서 그 정도 숫자가 넘어가는 사회나 집단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가 무엇을 가능하게 했냐면, 150명을 넘어서 151명째의 사람이 만약 같은 종교인이라고 한다면 좀 더 적극적이고 너그럽게 도와주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하거든요. 실제로 인간 사회를 보면 몇 만명이 우습게 더 거대한 사회를 꽤나 질서정연하게 이루지 않습니까? 법이라던지 감시 체계라던지 사회적 신뢰를 통해서 적절한 상호 작용과 분업 등을 이루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유발 하라리 교수의 말이 맞는 듯 합니다.




신뢰가 낮은 사회는 서로가 감시를 하고 여러 법을 만들거나 명문화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야 하기에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고, 그래서 신뢰가 높은 사회는 주로 선진국이며 신뢰가 낮은 국가는 이러한 비용을 치르느라 발전하지 못한다는 흥미로운 글을 어제 읽었습니다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19083086121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물리 법칙들이나 이론 또한 그저 이 세상을 차원 축소한 것이고, 제인스의 최대 엔트로피 원리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저도 제인스의 원리가 뭔지 몰라서 또 gai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객관성이란, 실재 자체의 반영이 아니고 확률 분포의 날카로운 점(피크)을 주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보가 주어지면 -> 그것으로 분포를 만들고(확률적인) -> 아직 모르겠다고 하거나(이 때는 피크가 없는 것이거나 약한 것이고) -> 또는 분포가 날카로우면 그것을 타당한 예측으로 삼고 확률적으로 접근하는 것 -> 만약에 이 예측이 틀리면? 이건 정보 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매우 흥미로운 실험을 소개합니다. 슬픈 영화를 본 사람들과, 그냥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어떤 물건을 주고 구매를 유도햇는데, 슬픈 사람들은 10달러나 지불했는데 문제는 그냥 일반적인 상태였던 사람들은 그것보다 2배 이상 낮은 가격에 구매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냐면, 슬픔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사물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특정 물건을 기꺼이 더 높은 가격에(그것도 훨씬 높은 가격에) 구매한다는 실험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인 실험이 끝나고 연구진들이 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른 집단은 그 물건을 매우 낮은 가격에 구매했다는 것을 토대로 당신의 감정에 의해서 소비가 결정되었고, 또 그 감정은 우리 연구진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에 당신의 완전한 주체적인 자유 의지가 아니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크게 화를 내거나 거부했으며 정말 이 물건이 소중하다고 '착각'을 하고 그러한 신념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일준 선생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인간을 미개한 동물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진정한 자유 의지에 대해서 성찰을 하기 위해서라고 강조를 하시는데 꽤나 멋지고 빌드업이 좋았습니다. 전 현장에서 강연을 들엇기에 내용이 쏙쏙 잘 이해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짜 주체에 집착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 이 선생님의 핵심 주장이었습니다. 끝까지 부정하고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이 물건을 비싸게 산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합리화를 하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자연스러움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매우 흥미롭게도 이 연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이때 소비의 주체 물건 구매의 주체는 누구였나요? 1.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2. 이 상황을 구성한 연구진. 전 2번을 골랐는데 틀렸더군요 다 틀렸습니다 1번도 2번도 아니라는 것이 이 선생님의 주장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실험을 해서 꿩에게 이런 비슷한 먹이 실험을 하면, 우리는 그 주체이자 행위의 핵심, 의지의 큰 부분이 인간 연구진, 이 상황을 조성하여 꿩으로 하여금 그 먹이를 먹게 만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그대로 위의 실험처럼 인간에게 대입하는 순간, 사람들은 소비의 주체를 마케팅 업체나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여 구매를 유도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본인들의 자유 의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웃기죠 동물에서 인간으로 그냥 그 목적어만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굿 윌 헌팅 영화를 짧게 보여주시면서 주인공이 왜 내적인 상처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지도 교수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여러 번 반복하다가 서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두 사람 모두 어릴때 학대를 당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본인이 고통을 겪는 것에 대해서 누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냐는 것이죠. 딱 2사람 밖에 없잖아요 두 사람 중 한 명이겠지. 그런데 한명은 자기 자신이고, 한명은 부모님이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에게 이 학대 상황, 고통의 원인을 부모로 돌리는 것은 자신의 어떤 근원의 붕괴이자 정체성의 파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잘못해서 부모한테 어릴 때 맞는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왜 이 이야기를 마지막에 꺼내셨는지 전 이해가 잘 갔습니다. 우리가 학대의 주체는 분명 부모님이고 부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당하는 주체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그 탓을 하는데, 그 탓을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존 기제에 알맞는 일종의 심리적 회피?이고 실제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나 봅니다.




 굉장히 길고 두서가 없어졌는데 노트 기록을 좀 더 충실히 해둘 것을 그랬습니다 다 듣고 나니까 선생님의 주장이 매우 공감되고 이해가 되더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재론과 반실재론, 철학 논문 이야기로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보도록 하겠습니다.








rare-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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