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국어 [1387814] · MS 2025 (수정됨) · 쪽지

2025-05-03 08: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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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어, 이해란 무엇인가?(시험체계 안에서의 진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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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성현국어입니다.






오늘은 국어 공부에서 흔히 듣는 “이해하라”는 조언, 그 진짜 의미를 파헤쳐보려 합니다. 


"지문을 이해하라"는 말, 누구나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해'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시험에서 요구하는 이해와 같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시험체계 안에서의 진짜 이해란 무엇인지, 

독서와 문학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다룰 내용이 많아 각 장의 목차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각 장에 [증명] 표시를 남겨두었으니,
아래 목차에서 편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통념과 다른 내용을 다루며, 각 장마다 이를 입증하는 근거를 [증명]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목차

1. 평가자인 출제자와 관측자인 우리들(증명 : 평가원의 출제 원칙)

2. 이해는 진짜 가능한가? : 얕은 이해와 깊은 이해(증명 : 리트 연구원이 말하는 수능과 리트의 형식)

3. 이해의 새로운 범위 정의(증명 : 23학년도 수능 독서론, 22학년도 6평 독서론)

4. 독서에서의 이해(증명 : 24학년도 6평 과두제적 경영)

5. 문학에서의 이해(증명 : 시인도 틀리는 수능 문학, 시인이 말하는 진짜 문학, 24학년도 『문』)

6. 결론 : 이해는 소재가 아니라 설계를 읽는 것이다.


1. 평가자인 출제자와 관측자인 우리들

수능은 완전한 감상이나 완전한 분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출제자는 작품 → 문제 → 선지의 순서로 설계된 하나의 시퀀스(sequence)를 만듭니다.

수험생은 그 시퀀스를 따라가며, 정해진 감상의 틀 안에서 문제를 푸는 관측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퀀스’는 건축에서 공간의 흐름을 설계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수능 국어 역시 이처럼 구조적 흐름을 설계해놓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생깁니다.


우리는 "내 생각으로 글을 재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출제자가 설계한 길을 따라가며 그 길 위에서 정해진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즉, 평가당하는 입장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가자인 출제진들이 철저하게 설계해놓은 시험지의 위에서

계량적으로 평가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능을 출제하는 기관의 이름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인 것이고요.


특히 국어라는 과목은 더욱 독특합니다. 

아래는 평가원이 발표한 출제 방향과 원칙입니다.


[증명 : 평가원의 출제 원칙]


1. 출제 기본 방향

 가. 출제 원칙

 1)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추어 출제한다.

 ◦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하여 중요한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면 풀 수 있도록 출제함.


 2) 기본 개념과 원리에 충실하고 추리, 분석, 종합, 평가 등의 사고력을 측정하도록 출제한다.

 ◦ 대학에서의 수학에 필요한 기초적 개념과 원리의 이해, 종합적 사고력을 묻는 문항을 골고루 출제함.

 ◦ 국어, 영어 영역의 경우 출제 범위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의 지문과 자료를 활용하여 출제함.


 나. 영역별 출제 방향

 1) 국어 영역

◦ 국어과 핵심역량을 고려하여 어휘・개념, 사실적 이해, 추론적 이해, 비판적 이해, 적용・창의 등 국어 활동과 관련된 사고력을 측정하는 데 역점을 둠.

◦ 국어 영역은 교육과정에 제시된 국어 교과의 독서, 문학, 화법과 작문, 언어와 매체 과목을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의 지문과 자료를 활용하여 출제함.


평가원은 정말 명확하게 두 부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1. 개념원리와 사고력

2. 다양한 소재의 지문과 자료


우리가 평소에 배우던 문학, 비문학의 각 영역별 구별 및 제재() 등은 2번 항목의

다양한 소재의 지문 및 자료에 불과합니다.


반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국어의 '원리와 사고력'입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할 이해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는 ‘이해’가 정말 가능한지 살펴보겠습니다. 


2. 이해는 진짜 가능한가?

국어 공부에서 "이해하라"는 말은 무척 흔하지만, 

그 실체는 막상 모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해야 할까요?
왜 강사나 교재들은 ‘이해’의 범위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시험장에서 마주치는 '이해'란 무엇인가?"


22학년도 수능 국어, 특히 헤겔의 변증법이나 브레턴우즈 체제 지문은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학생들이 ‘이해’에 대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이해를 위해 독해법을 배웁니다. 


흔히 말하는 ‘그읽그풀’, ‘구조독해’,  

그리고 제가 주장하는 ‘맥락독해’도 여기에 속합니다.


독해(讀解)란, 읽을 독(讀), 풀어낼 해(解) 

— 즉, 읽어서 풀어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읽어서讀, 이해하는 것解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시험장에서 마주하는 글은 필자(출제진)이 만든 세계입니다.


이는 평가원에서도 긍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증명 : 23수능 독서론]


저번 칼럼에서 든 예시를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글읽기는 완성된 집을 ‘구경’하는 일이고,  

글쓰기는 집을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건축물을 거꾸로 탐색하는 관찰자입니다.


먼저 외관(내용, 표현), 다음으로 내부(전개 흐름),  

마지막으로 토대(주제, 문제의식)를 파악합니다.  

이것이 국어 독해의 본질, ‘글짓기의 역순’입니다.


국어에서의 이해란, 구조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조는 고정된 도식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드러나는 전개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1장에서 건축에서 사용하는 '시퀀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가원의 설계를 따라서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게 되기 때문이죠.

또한 이러한 발상과 사고 방식은 평가원이 원하는 '올바른 이해'입니다.


[증명 : 22학년도 6평 독서론]


평가원이 제시하는 시퀀스를 따라가면,

그들이 설계한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맥락"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럼 오늘은 조금 더 본질적인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요?


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디까지, 얼마나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정해드리겠습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글에 담긴 소재의 철학적 본질이나 과학적 원리 등을 추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란, 

지문이 가진 논리·맥락·전개를 읽어내어,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두 가지 '이해'의 층위를 구분합니다.


얕은 이해: 소재의 의미 파악.
예) 경제성장이란 무엇인가?, 헤겔은 어떤 사상가인가?

깊은 이해: 논리, 맥락, 전개를 꿰뚫는 파악.
예) 이 글에서 왜 이 논거가 이 결론으로 이어지는가?’, ‘이 작품에서 왜 이 감정이 강조되는가?


시험에서 필요한 것은 '깊은 이해'입니다.

즉, 평가원이 유도한 설계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사교육계가 이 논의에 소홀한 결과,  

많은 학생이 얕은 이해만으로 시험에 접근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시험이 평가하는 것은 철학, 과학, 인문학 지식이 아니라  

국어의 개념·원리·사고력입니다.


그렇다면, 이해의 새로운 범위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3. 이해의 새로운 범위 정의

시험장에서의 이해는 닫힌 세계의 설계도 읽기입니다.


출제 지문은 이미 완결된 건축물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 선 관측자일 뿐,
참·거짓을 따지거나 그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거나,

소재의 원래 의미를 파헤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글의 설계와 의도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2수능의 헤겔의 변증법 지문은

헤겔 철학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지문이 아닙니다.

엄밀한 이론을 다루지도 않고요.


목표는 지문 안에서 헤겔을 통해 평가원이 보여주고 싶은 논지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출제진들이 글을 통해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은 그 쟁점과 흐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증명 : 리트 연구원이 말하는 수능과 리트의 형식]


아래는 의대마운틴님의 게시글에서 발견한 리트와 관련한 기사 링크입니다.

https://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3113



수능 국어와 유사한 시험인 리트 연구위원의 말씀도 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구위원님이 말한 "모든 제시문을 꼼꼼히 다 읽고 완벽히 이해한 상태"는

글의 소재에 대한 본질적 이해입니다.


이것이 국어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출제기관과 출제진들은 다 알고있는 것이죠.

결국, 출제자 측에서 원하는 것은 '지문'과 '문제'의 형식을 빌린 '개념과 사고력' 평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해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글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소재가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증명 : 리트 연구원이 말하는 수능과 리트의 형식]


이해의 본질은 닫힌 세계를 관측하는 행위입니다.

한정된 정보량을 분석하는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4. 독서에서의 이해

독서는 논리적 체계가 명확합니다.


주요 전개 방식은 수직 전개(포괄→세부, 원인→결과), 수평 전개(대조, 비교, 나열)이고.

범주→개념→속성의 논리적 위계를 중심으로 글이 전개됩니다.


이런 논리적 뼈대를 파악하면 절반은 성공입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소재’ 자체를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핵심 쟁점만 파악하면, 맥락을 따라 충분히 풀어낼 수 있습니다. 


24학년도 6평 과두제적 경영 지문과 실제 학생의 풀이를 통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읽고 어떤 지문인지 생각해보세요.


[증명 : 24학년도 6평 과두제적 경영]


생각보다 정보량이 적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외우거나 암기하긴 어렵죠.


제가 계속 강조한 수직과 수평의 관계성을 살펴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말씀드린 방식을 적용한 학생의 풀이입니다.


[증명 : 24학년도 6평 과두제적 경영]


전문의 맥락은 이러합니다.


1문단) 정치 조직의 운영법(민주정 vs 과두제) 

2문단) 기업 경영으로의 확장(공동체적 경영 vs 과두제적 경영) 


3문단) 과두제적 경영의 장점

4문단) 과두제적 경영의 단점


5문단) 과두제적 경영의 단점 완화법 : 사적 차원(경제적 이익)

6문단) 과두제적 경영의 단점 완화법 : 공적 차원(제도적 규제)


정말 치밀한 설계로 완벽한 맥락을 보여주는 지문입니다.


개념 정의 - 장단점 - 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일련의 수직적 전개가 눈에 보입니다.


1문단과 2문단은 정치 조직의 운영법에서 기업 경영법으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죠.

민주정과 과두정이 그대로 공동체적 경영과 과두제적 경영으로 연결됩니다.

전체 맥락은 심화(수직적 전개)이나, 문단 세부 맥락은 이항 대립(수평적 전개)이죠.


더 읽어보면 3문단과 4문단은 과두제적 경영의 장단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전체 맥락은 심화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 6문단도 똑같이 전체적 맥락은 심화입니다.

4문단의 단점을 해결할 방법을 말하죠.

단, 5문단과 6문단은 사적 차원과 공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여기까지 발견하셨으면 정말 대단한 논리적 분석력을 가지신 겁니다.


5문단의 사적 제도경제적 이익을 동기로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스톡옵션, 주식 평가 보상권으로 이항 대립이 한번 더 됩니다.)


반면, 6문단은 경제적 이익보다는 공적 차원의 규제나 불이익에 가깝습니다.

(경영 공시 제도와 사외 이사 제도로 다시 한번 대립됩니다.)


즉, 이익과 불이익의 측면에서도 그 속성이 대립적 구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가원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글의 맥락을 설계합니다.

전혀 글의 내용을 암기하거나 외우려는 압박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글의 맥락만 이해한다면, 문제에서 그것을 물어볼 때 다시 그 맥락에 돌아와서 사실 판단만 확인하면 되거든요.


우리는 사실보다는 추론, 그 둘의 연관성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합니다.


사실 판단은,  소재 그 자체에 대한 이해로서 

우리가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영역입니다.

이미 지문 내에 나타나있는 것만 해내면 되는 것이죠.


이래서 제가 저번 칼럼에서 사실 판단과 추론 판단(및 호응 판단)을 나눈 것이며

이번 칼럼에서 글의 소재에 대한 본질적 이해보단 

글의 맥락과 출제자의 의도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이유 입니다.


실제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정확히 1번이 답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글의 맥락을 파악하며 읽었다면 너무 쉽죠..


다음 문제도 봐보죠.

과두제적 경영이라는 개념의 속성을 판단하는 문제네요.


혹시 이 문제의 출제자가 의도가 눈에 보이시나요? 

제가 살짝만 보여드리겠습니다.

1~3번은 과두제적 경영의 장점이라는 속성을 묻고 있죠.

반면 4~5번은 과두제적 경영의 단점이라는 속성을 묻고 있습니다.


즉, 1~3번의 팩트 체크는 아까 파악한 맥락에 따라 3문단에서 교차 검증하면 되고,

4~5번의 팩트 체크는 4문단에서 교차 검증하면 되겠네요.


결론적으로 문제의 출제자는 

'과두제적 경영'이라는 개념의 이항대립되는 속성을 잘 파악했는지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음 문제도 확인해보곘습니다.

이번 문제도 출제자의 의도가 보이시나요?

네. 이번 문제 역시 과두제적 경영의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수평적 전개(이항대립)로 출제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자면 1번, 3번, 4번 선지는 1개의 개념만 묻고 있죠.

하지만 2번과 5번은 각 개념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묻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추론 판단'이라는 점입니다.


6번의 답은 2번입니다.

주식 평가 보상권도 미래 주식 가치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각 개념의 속성을 논리적으로 잘 판단해두시고, 

그것을 추론 판단에 적절히 적용하시면 너무나 손 쉽게 답을 맞춰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도 똑같이 풀어내면 됩니다.

저희가 파악한 설계된 맥락을 보기에 적용해보겠습니다.


X사는 기존에는 모두가 함께 경영진이며 동등한 결정권을 보유했던 공동체적 경영(민주정)이었네요.

반면 기업이 성장하여 소수의 주주로 경영진을 구성하는 과두제적 경영의 특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매 주기마다 소수의 주주로 이루어진 경영진이 교체되며, 전체 주주는 기업의 상태도 알고 주요 사항은 공동으로 의결하는 공동체적 경영의 특징이 유지된다는 점입니다.

즉, X사는 공동체적 경영의 성향이 더욱 강합니다.


따라서 주주 A의 주장은 아예 과두제로 가자는 의미로 해석되며,

주주 B의 주장은 현재 체제인 공동체적 경영을 유지하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를 기반으로 문제를 보겠습니다.


답은 너무나 명확하게 1번입니다.

이런 문제가 정답률 39%입니다. 무려 61%의 학생이 틀렸습니다.


이 문제는 많은 학생들이 기업 성장 후 소수 주주 중심의 경영진을 

과두제로의 완전한 전환으로 오해해 정답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기를 과두제로의 전환으로 이해했으면 무조건 틀리게 '설계'된 문항이거든요.


2번 선지 : 고정되는 구조는 1원칙 사실판단에서 틀립니다. 과두제적 경영의 특징을 끼워넣었죠.

3번 선지 : 현행 유지가 아니죠. 이것도 1원칙 사실판단에서 틀렸습니다. 은근 슬쩍 과두제적 경영의 특징을 확장했죠.

4번 선지 : B는 수평적 의사 결정 구조인 공동체적 경영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것도 대립을 묻습니다.

5번 선지 : A와 B는 모두 과두제적 경영을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전부 다 과두제적 경영과 공동체적 경영의 대립을 묻는 선지로 출제되고 있습니다.

출제된 선지는 모두 X사의 경영 방식을 과두제라고 생각했다면 틀리게 만들어졌고요.

이처럼 평가원과 교수님들은 우리에게 '소재'의 본질적 이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과두제가 뭔지 외울 필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맥락.

맥락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출제자의 의도가 ‘소재의 본질’이 아닌 ‘맥락 이해’에 있다는 점이 분명히 증명되었습니다. 

비문학은 이정도로 마무리짓고 문학도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5. 문학에서의 이해

문학은 독서와 달리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영역,
즉 "이입"의 세계입니다.


그럼에도 국어 시험에서 문학은 평가 대상이 됩니다.
어떻게 이 직관의 세계를 계량적으로 평가할까요?

사람마다 문학을 읽고 감상하고 느끼는 내용이 다를텐데,

어떻게 매년 수십만의 수험생을 동일한 기준과 동일한 지문, 동일한 문제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시험에서는 보기가 감상의 공통 프레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험생은 평가원이 제시한 보기라는 '설계된 시퀀스'를 따라야 하며, 

이는 감상의 자유와 시험의 논리가 절묘히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증명 : 시인도 틀리는 수능 문학, 시인이 말하는 진짜 문학]


최승호 시인의 사례에서 시인이 문제를 틀린 이유는, 

자신의 예술가적 직관과 평가원이 만든 계량적 시퀀스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을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능 문학의 본질이자,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입니다.


저는 단적으로 제시하겠습니다.


반드시 평가원이 제시한 틀 안에서 자신의 직관을 조율하며 작품을 감상하세요.


시인은 독재, 죽음의 탐구 등등의 여러가지 스펙트럼으로 시를 이해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프리즘은 평가원 밖에 없습니다.


시인이 말씀하신 '독자'인 수험생들은,

절대로 수능 문학의 프리즘이 아닙니다.


수능 문학의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기준은 평가원 뿐입니다.

평가원은 작품 해석의 넓은 스펙트럼 중 하나의 빛 만을 꼽아서 

우리에게 보기와 문제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문학에서 핵심은
작품의 고유한 세계에 이입하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그 이입은 시험지에서 '보기'라는 논리적 방향성으로 안내됩니다.


우리는 감상자나 해석자가 아닌 '기준에 맞춰 선택을 해야 하는 응시자'입니다. 

이는 수능이 감상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시험이 아님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보기는 수십만 수험생의 감상을
하나의 공통된 프레임으로 묶어주는 장치입니다.

따라서 문학 문제를 풀 때
우리는 80%의 감상과 20%의 논리로
작품을 감상해야 합니다.


절대로 '감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상의 태도, 감상의 방향성을 미리 평가원과 맞추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평가원이 유도한 하나의 빛, 한 가지의 해석이 보입니다.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의 차이도 여기서 나타납니다.


고전 문학
주제(유교, 자연, 서민), 표현법(설의법, 대구법, 율격)이 고정적
→ 필수 어휘만 알면 정서적 맥락만으로 충분히 감상 가능


현대 문학
주제·표현이 난해하고 다층적
→ 보기가 제공하는 관점을 통해 정서적 맥락과 쟁점을 따라가야 함

이 두 장르는 다르지만,
결국 '보기'를 통해 통제된 감상의 틀 안에서
작품을 읽어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실제로 24학년도 수능에 출제된 현대시를 통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증명 : 24학년도 김종길, 『문』]


이 시를 한 번 읽어볼까요.

어떤 감상이 남으시나요?


나뭇가지가 그림자가 되어 벽에 떠오른다..? 벽에 그림자가 지는구나.

시인은 단청이 험상궂어 가는게 서럽지 않았구나.

문이 귀를 기울이는 구나..? 의인화인가.. 

꽃과 나무가 자라네? 생명력이 느껴진다.

문이 열렸네. 좋은거겠지?

깃발은 또 뭐지..


이입은 되시나요?

제목도 그냥 문일 뿐이고

뭔가 문이 중요해 보이긴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명확한 지향점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죠.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린 문이 생명력이 틔일 때 문을 열어낸다?

그래서 이렇게 모호한 감상이 문제 푸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학생들의 감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마다 감상의 내용과 감상의 질적 차이가 천차만별이라서,

평가원이 계량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아래는 응시생의 약 50%가량 틀린 문제입니다.


[증명 : 24학년도 김종길, 『문』]

답은 1번입니다.


나뭇가지가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모습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 인간에게 영향을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찾아내기 어렵죠.


그런데, 애초에 보기를 먼저 보고 시를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증명 : 24학년도 김종길, 『문』]


보기처럼 (가)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을 소재로 한 수평적 전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래는 각 문장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 자연의 힘은 인간의 역사에 관여합니다.

2. 인간은 쇠락하고 있으나, 생성의 기반을 지키고 있습니다.

3. 인간은 자연의 힘을 수용합니다.

4. 이를 통해(자연의 힘의 수용) 문은 생성의 가능성을 실현합니다.

5. 깃발이 상징하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보기가 정리되었습니다.

이 논리적 방향성을 적용하여 작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처음 부분에는 흰 벽, 해, 나뭇가지같은 시어가 보입니다.

보기에서 자연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했으니 당연히 두 시어의 관계성을 살펴야 합니다.

흰 벽이라는 인간 문물에 나뭇가지가 그림자가 되어 떠오른다.

아까 1번째 정리의 내용처럼 자연이 인간에 관여하는 것이죠.


사실 첫 문단만 잘 독해했더라도 보기 1번 문항은 바로 맞출 수 있었습니다.


다음 문단을 봐도 비슷합니다.

단청, 두리기둥은 모두 인간 문물이죠.

그런데 독특한 점은 단청은 빛을 잃고, 두리 기둥은 틈이 생겼네요.

아, 이게 바로 2번째 정리의 '인간의 쇠락'인가 봅니다.

그리고 볕과 바람이라는 자연은 '쓰라리게 스며드는' 군요?

그런데 험상궂게 변해가는 인간문물은 서럽지 않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보기에서 알아봤던 내용을 제외하고 생각해봅시다.

음.. 사실 인간 문물은 고통을 즐기는 취향이라도 있는 걸까요?


보기에 대한 정리, 시를 해석할 일정한 시각.

즉, 평가원이 제시한 논리적 방향성 없이는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감상에 차이가 있겠죠.)


보기에서 제시한 해석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힘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문은 생성의 가능성을 실현합니다.


문은 자연의 힘을 수용해야 생성의 가능성을 실현해낼 수 있기 때문에

쓰라리고 못생기게 변해가더라도 서럽지 않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쇠락과 변화의 과정이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아갈 길이기 때문이죠.


평가원이 제시한 시각으로 작품을 해석하면 이렇게 명료한 감상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작품을 감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준과 일정한 시각을 갖추어서 감상하라는 거죠.


보기에 담긴 한 줄 한 줄은 모두 평가원의 설계입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끝나는 수능에서는 정말 소중한 힌트입니다.


혹시라도 왜 비문학은 보기를 나중에 보고, 문학은 먼저 보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까봐,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두 보기를 비교해보시면 알겠지만.

발문부터 명확하게 다릅니다.


비문학의 보기는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이해하는 것"이고,

문학의 보기는 "<보기>를 참고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것"입니다.


명확하게 주어진 <보기>의 역할과 설계된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가원의 의도이죠.


그럼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겠습니다.


6. 결론: 이해는 내용이 아니라 설계를 읽는 것이다


이해란, 글의 본질적 소재나
철학적 의미를 꿰뚫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란,
글의 논리와 전개, 감정과 맥락,
그리고 선지의 전건·후건·호응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를 읽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닫힌 세계의 관측자로서,
출제자가 제공한 길(보기, 선지, 지문)을 따라
그 설계도를 읽고 해석하는 수험생입니다.


쟁점과 맥락만 잡으면 충분합니다.


비문학은 범주, 개념, 속성으로 논리적으로 분해하며 맥락을 잡으세요.

문학에서는 ‘보기’를 통해 감상의 프레임을 먼저 확인한 뒤,
감상 80%, 논리 20%의 비율로 읽어내세요.


비문학과 문학 모두
"이해 = 평가원의 설계도 읽기"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글이 길어졌네요.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글솜씨가 말솜씨만 못해 늘 아쉬울 따름입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유익한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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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 번 부탁드립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지금까지 논의한 국어의 이론적 측면을 하나로 꿰뚫는
'실전에서의 문학과 비문학 풀이법'을 다루겠습니다.

(Feat. 22수능 헤겔의 변증법, 브레턴우즈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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