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과적 문학 선지 판별법 1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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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학 선지 판단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잡아드리기 위해 작성한 칼럼입니다.
국어를 잘하시는 분들한테는 당연하고 쉬운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과생들 중에는 문학 선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수학에서는 매우 규칙적으로 숫자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데,
문학에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문학 강의를 들어도 각각의 문제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지만
선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기준을
제시해 주시지 않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려진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기준으로는 허용 가능성이 있죠.
허용이 가능하면 옳은 선지이고, 허용이 불가능하면 틀린 선지입니다.
그런데 지문과 선지에 사용된 표현이 느낌상 다른데도 허용은 가능해 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지문에 내용이 나와있지 않을 때는 근거가 없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허용이 가능하다고 봐야 할지
허용 가능한 정도라는 게 대체 어디까지인지를 파악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허용 가능성'은 선지를 판단하는 데 매우 유용한 기준입니다.
허용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는 상위권은 능숙하게 선지를 판별하지만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때문에 '허용 가능성'보다 더 명시적이고,
보다 더 체계적인 기준이 있다면
선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학 문제를 풀 때,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선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허용이 가능한지를 고민하지만,
고수들은 확실히 틀린 부분을 찾아내는 데 주력합니다.
그렇다면 이 '확실히 틀린' 부분이 무엇인지,
즉 오답 사유에 대한 기준을 일관성 있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정리한 기준은 아래와 같습니다.
오답 사유: 내용 불일치, 주체 불일치, 방향성 반대, 근거 없음, 앞뒤 매칭 안됨
이 5가지 사유 중 하나에라도 해당하면 틀린 선지이고,
5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허용이 가능한 선지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에 기출문제와 간단한 설명을 첨가하겠습니다.
1. 내용 불일치 (21학년도 수능)
나 그 아래 냇가에 소고삐를 풀어놓고 어항을 놓고 있었던가 가재를 쫓고 있었던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르르 솨르르 무엇이 물살을 헤짓는 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면 아, 청청히 푸르던 하늘 - 이시영, 「마음의 고향 2 - 그 언덕」- 44. ② ㉡을 활용하여 냇가에서 놀던 유년의 화자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물소리로 느낀 경험을 부각하고 있군. |
'내용'은 말 그대로 '사실'입니다.
사실 관계를 왜곡할 수는 없기에,
내용과 선지가 다르다면 엄연히 틀렸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②는 틀린 선지입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은 실제로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2. 주체 불일치 (23학년도 9월 모의평가)
나는 부르주아의 썩은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관청에서 정하는 규칙은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12시부터 4시까지는 모든 시민은 밖에 나다니지 말기로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규칙이니까 페어플레이를 지키는 사람이면 이것은 소형(小型)의 도덕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도덕률을 지키는 한 내 겨드랑은 요절이 나고 나는 죽을는지도 모른다. - 최인훈, 「크리스마스 캐럴 5」- 29. ④ ‘나’는 ‘시민’이 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하는 ‘페어플레이’를 지키지 못하게 되어 고민한다. |
④는 틀린 선지입니다.
행위의 주체와 대상은 확실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규칙을 정한 것은 '시민'이 아니라 '관청'입니다.
3. 방향성 반대 (22학년도 예시문항)
형식은 오늘 저녁에 이것을 깨달았다. 깨달으매 슬펐다. 마치 자기가 인생 경력을 다 들여서 하여 오던 사업이 일조에 헛된 것인 줄을 깨달은 듯한 실망을 맛보았다. 그와 함께 자기의 정신의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극히 유치함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 인생을 깨달을 때도 아니요, 따라서 사랑을 의논할 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인 줄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도 어린아이다. 마침 어른 없는 사회에 처하였으므로 스스로 어른인 체하던 것인 줄을 깨달으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난다. - 이광수, 「무정」- <보기> 연애는 개인에게는 자아를 자각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무정」이 창작될 무렵, 연애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은 근대적 삶의 실천으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무정」에서는 ‘형식’이 연애와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사랑의 갈등을 겪는 가운데 스스로를 민족 계몽의 선각자로 자부했던 ‘형식’은 자신의 내면에서 결핍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29. ④ 인생의 사업이 하루아침에 헛된 것임을 깨닫고 실망하는 형식의 모습은, 연애의 실천에서 겪는 어려움이 근대적 자아의 자각에도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는군. |
도대체 얼마나 부정적이어야 '부정적'이라는 선지가 맞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선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부정적인지'가 아닌,
'긍정적'과 '부정적' 중 어디에 더 부합하는지, 즉 방향성을 확인하면 됩니다.
④는 틀린 선지입니다.
연애의 실천에서 겪는 어려움은 근대적 자아의 자각에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긍정적'이기에, 즉 방향성이 반대이기에 틀린 선지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4. 근거 없음 (21학년도 9월 모의평가)
그의 자만(自慢)은 그것뿐만 아니었다. 그는 경기도 출생이라고 이 지방에서는 제일 똑똑한 체를 하였다. 우편소가 새로 생긴 것을 보고 이웃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다. 장승같이 늘어선 전봇대에는 노상 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전신줄을 감은 사기 안에다 귀신을 잡아넣어서 그런 소리가 무시로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편소 안에는 무슨 이상한 기계를 해 앉히고 거기서는 무시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그것도 무슨 귀신을 잡아넣어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럴 때에 안승학은 마술사처럼 이 귀신을 부리는 재주를 그들 앞에서 시험해 보였다. 그는 엽서 한 장을 사서 자기 집 통호수와 자기 이름을 쓰고 편지 사연을 써서 우편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장담하기를 이것이 오늘 해전 안에 우리 집으로 들어갈 터이니 가 보자는 것이었다. 과연 그날 저녁때였다. 지옥사자 같은 누렁 옷을 입은 사람은 안승학의 집에 엽서 한 장을 던지고 갔다. 그것은 아까 써 넣던 그 엽서였다. “참, 조홧속이다!” 하고 그들은 일시에 소리를 질렀다. - 이기영, 「고향」- 17. ② 새로운 문물이 실생활에 쓰이는 현장을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변해야 함을 알려 주고 있다. |
②는 틀린 선지입니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변해야 한다는 근거는 지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선지를 허용하기 위해서는 지문에 근거가 있어야만 합니다.
5. 앞뒤 매칭 안됨 (22학년도 9월 모의평가)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 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최두석, 「노래와 이야기」- <보기> 화자는 ‘시’가 ‘노래’의 성격을 되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감정의 과잉으로 상처가 오히려 깊어지기도 하는 노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야기’가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노래와 이야기」는 이야기가 두드러진 시를 짓는 까닭을 제시한 시론 성격의 시이다.31. ③ 상처가 노래에 쉽게 덧난다고 말함으로써 시에서 노래의 성격이 분리된 결과를 보여 주고 있군. |
③은 틀린 선지입니다.
상처가 노래에 쉽게 덧난다고 말한 것도 맞고
시에서 노래의 성격이 분리된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노래에 쉽게 덧난다고 말함"으로써" 시에서 노래의 성격이 분리된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가 노래에 쉽게 덧난다고 말한 것은 상처가 깊어지게 하는 노래의 한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앞뒤 내용이 개별적으로는 맞지만 앞과 뒤의 관계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풀 때는 5가지 오답 사유를 탐색해 나가면서
확실하게 틀린 선지들만 제거하면 돼요.
확실하지 않은 선지의 판단은 뒤로 미루면서요.
5가지 오답 사유를 기억하고 있으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아는 상태로 선지에 접근할 수 있고,
이것만으로도 큰 강점이에요.
문학 문제를 풀 때는 선지를 통으로 읽고 허용이 가능한지 판단하는 것보다
확실히 틀린 내용을 찾아내는 게 더 빠르고 더 편해요.
익숙해지면 이전에 애매하다고 생각했던 선지도 확신 있게 판별할 수 있을 거예요.
꼭 누군가의 기준을 따라할 필요는 없어요.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만들어 스스로 적립해 나가도 돼요.
다만 중요한 건 그 기준이 "일관성" 있게 적용 가능해야 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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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글이네요실전적이고좋은칼럼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