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출발점에 선 당신에게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2321879
'예비 합격자' 명단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고 축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 왔습니다.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수능점수 100점으로 예비 합격한 당신을 축하할 자신이 내게도 없었습니다. 지금쯤 당신은 어느 대학의 합격자가 되어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있거나, 아니면 기술학원에 등록을 해두었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축하의 편지를 씁니다.이제 대학 입시라는 우리 시대의 잔혹한 통과의례를 일단 마쳤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대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커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
차치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장에 신발을 사러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이를테면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한자로 그것을 탁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박 잊고 탁을 집에 두고 갔습니다. 제법 먼 길을 되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에까지 갈 필요가 어디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보면 될 일이 아니오."
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주춧돌부터 집을 그리던 그 노인이 발로 신어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탁과 족, 교실과 공장, 종이와 망치, 의상과 사람, 화폐와 물건, 임금과 노동력, 이론과 실천…. 이러한 것들이 뒤바뀌어 있는 우리의 사고를 다시 한 번 반성케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 는 진정한 애정이 아닙니다. 위로는 그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케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좌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 편지를 읽든 아니면 어느 공장의 작업대 옆에서 읽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 있건 탁이 아닌 발을 상대하고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당신이 사회의 현장에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살아있는 발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대학의 교정에 있다면 당신은 더 많은 발을 깨달을 수 있는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대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종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그 연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싶은 곳을 ㅤ찾아 가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이 안겨줄 자유와 낭만에 대한 당신의 꿈을 모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얽매여 있던 당신의 질곡을 모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러한 꿈이 사라졌다고 실망하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됩니다.
그러나 자유와 낭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낭만을 '관계의 건설공간' 이란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맺는 인간관계의 넓이가 곧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낭만의 크기입니다. 그 러기에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에 내장되어 있는 '안이한 연루'를 결별하고 사회와 역하와 미래를 보듬는 너른 품을 키우는 공간이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그동안 만들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만나는 연대의 장소입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발의 임자를 깨닫게 해주는 '교실'입니다. 만약 당신이 대학이 아닌 다른 현장에 있다면 더 쉽게 그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수능시험성적 100점은 그야말로 만점인 100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올 해 당신과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67만 5천명의 평균 점수입니다. 당신은 친구들의 한복판에 서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간은 풍요한 자리입니다. 수많은 곳,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보다 더 큰 자유와 낭만은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을 더듬다가 넓고 밝은 길로 나오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아무리 작은 실개천도 이윽고 강을 만나고 드디어 바다를 만나는 진리를 감사하였습니다. 주춧돌에서부터 집을 그리는 사람들의 견고한 믿음입니다. 당신이 비록 지금은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발로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한 언젠가는 넓은 길, 넓은 바다를 만나리라 믿고 있습니다. 드높은 삶을 '예비'하는 진정한 '합격자'가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어디쯤에서 당신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신영복 <새 출발점에 선 당신에게>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의<한 0
릴스 보다가 봤는데 이거 진짜임?
-
밀림의 왕 등장 0
-
한국인이면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하는데..
-
걍 f(k)=tke^k-t 라 두고 풀어도 문제없지 않나
-
경찰대 추합컷 0
경찰대 이번에 추합 어느정도 돌까요…? 256인데 무린가..ㅠㅠ
-
난 9만원남음
-
전글을 보세요
-
과외 웨함 진짜 2
40명 정도 가르쳐 봤는데 열심히 하는 쉑 3명 있고 나머지는 걍 대애충함. 그냥...
-
이게 본질이라 그런가..여태 고친 어느것보다도 오래 걸리고 진짜 뼈가...
-
근수축 보통 몇분컷 내야되나요? 평소에 2~3분정도 걸리는데 더 줄여야되겠죠?...
-
굿즈샵들 좀 있나요... 모르게씀
-
샐러디머거야지 4
ㄹㅇ저속노화식단
-
자료방... 0
아는 자료방 다 비공개되고 터졌는데 새 자료방 아시는 분 계신가요...?
-
?
-
아침뭐먹지 9
김밥이조금당기는아침이군
-
맞팔 받습니다
-
질문요 2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솔솔솔솔솔 비트가 이게 반복됨 외국힙합노랜데 개유명한노래...
-
아 과외하고싶다 11
나 생각보다 스펙 괜찮은데 왜 수요가 없지
-
혹여나 가능하다 한들 그건 그 사람이 국어 쌩노베 재능충이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하루에 하나씩 푸세요
-
1 . 최고차항 음수인 경우에 x->inf 일때 대응되는 Sin값이 없어서 a0일때...
-
추천부탁드려여..
-
내일은딴데가야겠다
-
지거국도 높았다나? 지금이 오히려 저때보다 더 세분화된 느낌
-
써보신분있나요? 도움되나여..?
-
이틀에 한번씩 독서 문학 합쳐서 4지문 + 언매 스무문제 정도 풀려고 합니다...
-
큰일남 0
스칸데배고픔
-
그만 보라는 신의 계시다..
-
내가 진짜 미적을 할수있을까 시발근데런치긴늦어서계속하긴해야하네
-
퍼즐 세트 하나 사서 개봉했는데 이럴수가 전체그림이 빠져있는 불량품인거임...
-
좀 예전이긴 해도 대학 다닐때 선배형 한명 정치질 당해서 방학하자마자 군대 가고 또...
-
내 인생 좌우명임
-
21번 30번 이런 애들은 계산이 선을 존나 넘는게 아쉽..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
뭐 풀어야할까요...오답륳 60퍼같아료
-
ㄷㄷㄷㄷ
-
뭐일거같냐 난 업일거가틈
-
인간의 생각 방식이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문제를 풀 때도 환상적인...
-
단순히 입찰가의 해시함숫값만을 게시하는게 아니라 논스의 해시함숫값, 논스+입찰가의...
-
제가 좋아하는 3가지 입니다
-
엄.
-
각 단원별로 유기적인 스토리가 있어서 그 시스템 속에서 뭐가 뼈대 개념이고 뭐가...
-
신기한거 많이 만드네 진짜 매년 뭐가 계속 생기네
-
이거뭐뇨이 ㅅㅂ 7
15리트파레토최적 ㅅㅂ 뇌터질것같네 답못보겟는대다틀린것같은대 ㅅㅂ
-
걍 효율 지읒같아도 하는중인데 그러니까 하는것도 없는거 같아서 더...
-
오랜만에 어원 글? 쓰는데 갑자기 황교익 생각나서 빡침 1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양반은 불고기 논쟁을 하면 안 됐음 ㅋㅋ
-
국어 언매 1컷 95 화작 1컷 100 만표 124 수학 미적 82~3 기하 84...
-
피램 사보신 분 0
생각의 전개 워크북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나요? 생각의 전개 본교재와 병행해서...
-
.
-
현타오네 1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d-104
옛날에 국어 교과서에서 봤는데
오랜만이네요 이것도
ㅋㅋㅋ 22학년도 수특에서 감명깊게 봤던 기억이 나서 가져와 봤어요
크 두말할 필요가 없는 명문...
이거랑 이어령 선생이 서울대에서 한 강연도 있었죠
오…이어령 선생 어떤 강연인지 궁금하네요 ㅋㅋ 혹시 링크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연 영상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제목이 아마 《Number One보다 Only One을》 비슷했던 걸로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