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관련 어원 이야기) 을씨년스럽다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0982954
예 뭐 푸른 뱀의 해인 2025년이 왔는데 '을사년'과 관련된 어원 이야기 하나 말아 보겠습니다
아마 다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흔히 음산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묘사할 때 널리 쓰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어의 어원이 1905년 을사늑약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을씨년스럽다'는 20세기 기록에 '을사년시럽다', '을스년스럽다', '을시년스럽다' 등으로 나타납니다.
1908년의 기록을 보아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이 쓰였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구히서(1939년생 연극 평론가)의 구술 자료에서 어린 시절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 증언도 있고요.
따라서 당연히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의 구성으로 볼 수 있는데, '-스럽-'이라는 형용사 파생 접미사가 17세기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을사년스럽다'의 생성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봤자 17세기입니다. '乙巳'의 한자표기는 '을ᄉᆞ'인데, 아래아는 1음절에서 보통 ㅏ로 바뀌었으므로 '을사'가 됐을 겁니다. 다만 '을사>을스'는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가능한 설명은 1음절의 ㅡ에 영향을 받아 2음절의 ㅏ가 ㅡ로 바뀌었다거나 혹은 의미가 비슷한 '스산하다'나 '으스스하다' 등에 유추되었을 경우입니다. 아무튼 어떤 이유에선지 '을사'가 '을스'로 변하고, ㅅ 뒤 ㅡ는 흔히 전설모음화를 겪었기 때문에 '가스내>가시내', '슬컷>실컷', '승겁다>싱겁다' 등과 같은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을사년스럽다'의 '을사년'이 언제인지 알아내야 하는데 그게 1905년 즉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가 아닌 두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 후기 재야 선비인 송남 조재삼(1808~1866)이 저술한 송남잡지(松南雜識)의 기술입니다. 송남잡지에 "俗以乙巳年凶為畏故今無生歲樂者言之(세상에서 을사년(乙巳年)은 흉하다고 두려워하는 까닭에 지금 생전 낙이 없는 것을 ‘을씨년스럽다’고 한다)"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송남잡지가 저술될 시기에도 이미 '을사년'은 스산하고 흉흉한 분위기를 나타냈다는 거죠.
또 하나 중요한 건 한영자전(1897)의 기술입니다. 한영자전에 실릴 정도로 '을사(을ᄉᆞ)'라는 말은 '가난'과 '고통'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였단 게 밝혀진 겁니다. 왜냐면 한영자전은 외국인이 쓴 사전인데 외국인까지 이러한 사실을 알았단 거기 때문에 꽤 많이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을씨년스럽다'의 뜻풀이에 '보기에 살림이 매우 가난한 데가 있다'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술을 통해 우리는 '을씨년스럽다'의 선대형인 '을사/을ᄉᆞ년스럽다'의 '을사년'이 1905년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한영자전의 설명대로 1785년에 대기근이 있었는지를 봐야 하는데, 문제는 정조실록(正祖實錄) 9년(1785년)에는 기근에 대한 언급이 딱히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1783년과 1784년 두 해에 걸쳐 큰 흉년이 들었고 그에 따른 전국적인 규모의 구휼 사업이 실행되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1785년에는 민란에 의한 역모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만큼 1785년은 민심이 흉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년 동안이나 지속된 흉년으로 1785년에는 정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을, 빈곤한 삶을 살았어야 했을 겁니다. 만약 '을사년'이 1785년을 나타내는 거라면, 1785년 이후 어느 시기에 1785년과 같은 굶주림에 고통을 받게 되면서 그 해를 떠올려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을 겁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1785년 이후라는 거고, 한영자전이 편찬된 1897년 이전, 또 송남잡지가 출간된 시기인 1855년 이전에 형성되었을 수 있으므로,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은 19세기 초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
1. 을ᄉᆞ년>을사년>을스년>을시년>을씨년
2. 그리고 을사는 아마 1785년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음
참고 문헌
조항범 (2014),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에 대하여," 한국어학 64, 한국어학회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나도 설레고싶다 1
-
찐 노베들을 위한 글 24
1. 기출 실모 n제 이런 것들 진행하는 순서는 어떻게 되나요? 보통 개념 강의를...
-
마 13
잘자라
-
수험생 카페인 6
매일 박카스 하나씩 먹는중인데 요정도는 괜찮겠죠 잠은 5~6 시간 정도 잡니다
-
배고픈데 야식추천좀 13
냉장고에 편의점 훈제앞다리 사놨는데 동생이 먹었더라..
-
썸타보고싶다 0
라는 이상한 말은 하면 안됨
-
현역 국어 4등급 강기분 공부법 제발 도와주세요.. 1
제목처럼 강기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강기분을 어떻게 공부하냐면 먼저 시간 재고...
-
ㅇㅈ 못하겠네
-
유급하면 되나요? 어떻게 되는거죠
-
심사의 익명성을 지키면서 다른 문제들을 예방하기 위해 좋아요 점수를 없애고...
-
수험생 커뮤에 지얼굴 까는 문화가 있는게 이해는 안되지만 뭐.. 고유한 전통이라...
-
수12확통 동시에 진도 안나가고 수1-수2-확통 혹은 수1&수2-확통 이런식으로 해도 괜찮나여?
-
아 똥마려워 2
어디서 싸야해
-
손 ㅇㅈ 5
뽀큐 펑
-
매번 평균 낮추는데도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네
-
존예라고 말해준사람이 있었다 ㅎㅎㅎ 말이라도 ㄱㅅ합니다 이제자러감
-
안녕하세요 3
뉴비에요
-
으흐흐 내일은 집에서 이불덮고 애니보면서 수학할거임
-
ㅇㅈ 9
그건 휘어진 나의 못생긴 손이라는 거야
-
길고 길었던 오르비 생활에 조만간 마침표를...
-
ㅇㅈ 3
에도 없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
헉 ㅇㅈ메타다 2
(대충 ㅇㅈ인척)
-
중위권 여러분들이 심사위원에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15
상위권만 이해하고 와 좋은내용이네요 하는 칼럼은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물론 다른...
-
메타끝낫나 9
이제자러가야지
-
지금 빵 사러 가는게 맞는거냐?
-
뻥이야 미안해
-
민주 대선 경선 ‘어대명’? 범진보, 오픈프라이머리 재차 제안 2
- 비명 김두관 7일 출마선언 - 김경수·전재수 등도 하마평 더불어민주당은 조기...
-
이거 우회하려다가 너무 다양한 문제가 생기는듯
-
어떻게해야할까.. 슬프다 ㅠ
-
침구사 0
Asmr 좋아해서 일본 침구사 관련 영상을 많이 봤는데 너무 재밌어보인다 맨날...
-
잘생겨지고 싶다 9
공대 애들 왤케 잘생김
-
비밀은 지켜드립니다 13
-
리젠 ㅈ박은 것보다야
-
내가 거의 유일한듯
-
힘들다 4
허리가 아프고 몸이 땡기고 ..
-
고급 생물학 인가요 아니 그럼 일반 화학이랑 일반 생물학은 어디감??
-
그러면 인증 칼럼 1. 인증을 하지 마라 2. 1번을 꼭 지켜라
-
니네이랬는데도 넌 의대가라 이런댓달면 나상처받아
-
대학교 쪽팔림 2
이번에 인서울 중위권 정시로 왔고 솔직히 머리로는 나쁜 학교 아닌건 알겠는데...
-
국어 수학 영어 탐구에서 그냥 물 흐르듯이 공부하면 1이 뜨던 과목이 있어서...
-
잘자요 오르비 여러분들.
-
인증한번더? 5
똑같은사진으로?
잡담태그ㅅㅂ
나 원래 시간 들여 쓴 글은 잡담 태그 안 닮
시간 들여 끓인 칼국수가 맛있다.
야발아
이거먼뜻임?
민지 칼국수 드립. 내가 타격감이 좋아서 많은 오르비언의 샌드백이 돼 버림
저게 ㄹㅇ 연도를 의미하는 거엿군요
드립 참아야지

오 지금까지 올리신 어원글 중에 제일 재미있게 봤어요!! 을사년스럽다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었는데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