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쌩육수생의 회고와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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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해괴한 조합인가 싶겠지만 제목 그대로 저는 노베이스에 쌩육수생(이번 수능까진 오수생)입니다. 곧 있으면 2024년이라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구나 싶습니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참회에 가까운 제 얘기를 남겨보려 합니다.
오르비를 비롯한 수험생 커뮤니티엔 정말 많은 성공 수기가 있습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목표를 달성했다는 이야기를 볼 때면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의지와 간절함에 경외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성공 수기를 작성하신 분들과는 달리 저는 성공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입시판의 패배자입니다. 글을 봐주시는 분들에게 울림을 드릴 수 있을 만큼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필력이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저의 전철을 밟게 되는 분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 또한 내년에는 나태한 수험생활이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 봅니다.
사실 재수부터 올해까지는 수험생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방구석 백수였습니다. 의지와 간절함이 부족했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그것들이 결여된 상태였습니다. 긴 수험생활에 지쳐 고갈된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n수생과는 달리 저는 해마다 바닥을 뚫으며 결국엔 바닥 없는 무저갱에 도달했습니다.
그렇게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닥에 계시는 분들도 아마 그러한 이유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계속 땅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은 지상으로의 발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늘에 닿는 방법을 논하고 있을 때에도 비상은 커녕 알을 깨고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생각해보니 발아니, 파란이니 그런 표현은 저에게 과분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공부를 안 했습니다. 고통보단 쾌락이 좋았습니다. 배움의 성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공부보다 짧은 시간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남들이 책장을 넘길 때 숏츠 영상을 넘겼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휩쓸려 하루를 보낸 적도 많았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는 등의 불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세상의 온갖 이슈를 접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수험생처럼 살지도 않는 주제에 수험생 커뮤니티를 전전했습니다.
그렇기에 전 공부에 관련된 조언을 할 어떠한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 만큼은 꼭 하고 싶습니다. 준비와 노력없이 이번 수능을 응시한 분이 만약 있다면, 다음 번에는 같이 노력해봅시다. 딱 한 번만 죽도록 열심히 해보자고요.
제 성적을 보면 놀랍게도 재수 삼수 사수 오수 전부 그냥 비슷비슷한 수준입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당연합니다. 갓길에 멈춰 서서 허송세월을 보내니 몸이 조금씩 녹슬었고 결국엔 그 자리에서 고철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동을 거는 것조차 버거워 삐그덕거릴 게 분명한 몸뚱아리지만, 내년에 마지막 수능을 보려고 합니다.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접는다고 하도 더 나아질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달라지지 않으면 귀중한 1년이 보잘 것 없는 일들에 쓰이게 될테니 이러나 저러나 어렵습니다. 바뀐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그래도 목표가 있으니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누군가가 목표나 꿈을 물어보면 ‘성적 최대한으로 잘 받아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꿈이 없어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목표와 제 성적과의 괴리가 너무 커서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인터넷 상에선 이름이 가려지니 한 번 속 시원하게 지르겠습니다.
제 목표는 의대입니다. 현 시점에선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도 모르는 놈이라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수험판의 망령인 저도 전과목 노베이스로 1년만에 의대를 간 사례는 단 한 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걸 알면 목표를 조정해보라는 말씀도 이해합니다. 근데 그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염치 없지만 응원 부탁드립니다.
‘피그말리온 효과’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문득 예전에 담임선생님께서 피그말리온 효과를 얘기해주시며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냉소적으로 받아들인 게 기억납니다. 요즘 드는 생각으로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니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 이때까지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해 정말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진짜 원하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꿈과 목표를 당당하게 얘기하는 것 또한 준비된 자의 특권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두서없고 장황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6월, 9월, 11월에 생존신고 하러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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