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natio memoriae (서양판 ‘분서갱유 焚書坑儒’) -성남고 교가가 바뀐 것을 보면서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64015242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성남고등학교를 1984년 2월에 졸업했습니다.
어제, 어느 부자(父子)를 만났습니다. 모두 성남고를 졸업한, 저의 후배들입니다. 반갑게 모교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난해 교가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게 뭔 소리?
‘학교를 세운 두 분이 친일파였는데, 그들이 교가에 언급되고, 교가 시작 부분도 일제의 욱일승천기를 연상시켜서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었다.’
1981년 입학할 때 배운 교가는 이랬습니다.
‘먼동이 트이니 온 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 나셔서, 배움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없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사실, 제가 교가를 배울 때도 ‘김일성 찬양가’ 같다는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교가에 등장하는 ‘원석 두 님’은 설립자인 원윤수(1887~1940)와 김석원(1893~1978)를 말합니다. 원윤수는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큰돈을 번 뒤 일제를 지원하기도 했고, 김석원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1930년대부터 중국군과의 각종 전투로 공을 세웠던 이입니다.
예, 두 사람 모두 친일파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따진다면, 일제 강점기를 살아남은 ‘거의 대부분’은 친일파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씨개명 정도는 ‘소극적 친일’ 혹은 ‘눈 감아 줄 수 있는 친일’이라고요? 그들이 만약 경성제대 쯤 들어갈 뛰어난 성적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이 어땠을까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민족적 자각의식을 바탕으로 죄다 상해 임정으로 향할 수 있었을까요?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군 소집 영장을 돌린 조선인 최하급 관리는요?
김석원이, 일본 육사 출신이었지만 독립군에 투신한 지청천 장군의 가족을 물심양면 도왔다거나, 1944년 평양에서 학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고를 탈취했던 ‘평양 학병 의거’ 때 끝까지 재판정에 남았다가 유죄 판결이 나자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는 당대를 살았던 숱한 사람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수십 년 간의 강점기를 살아 남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역일 가능성이 너무도 농후합니다. 2차대전 때, 채 5년이 안 된 세월 동안 나치의 지배를 받은 프랑스가 전후, 친 나치를 처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의 자유화를 이룩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 바츨라프 하벨은 “(지난 40여년 간 이 땅을 지배한) 친소 분자를 숙청하자”는 주장에 대해 “그런 식으로 역사 청산 작업을 하겠다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푸줏간집 주인밖에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고요.
기나긴 치욕의 세월일수록 ‘처단’보다는 ‘선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민족의 만 35년 엄혹한 지배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어가며 ‘숭고한 저항’을 한 분들을 선양하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처단을 합니까?
이 글을 읽으시는 귀하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서울대 사범대의 전신인 경성사범 국어과를 나오신 뒤 일제 강점기, 교사를 하셨던 제 아부지인들 일제 말기, 조선어로 교육을 하셨을까요? 그래서 제 아부지 역시 친일파로 처단돼야 하나요?
성남고 교가에 등장하는 ‘먼동이 트인다’는 표현에서 욱일승천기가 연상된다는 주장에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아니, 실소라고 해야 할까요?
해가 동에서 트지, 서에서 트나요? 민족정기를 노래하려면 “먼서가 트이니”라고 ‘사실과 달리’ 노래해야 하나요?
그런 식이라면, 영조의 명으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파견(1763~1764)됐다가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라는 기행 기록을 남긴 김인겸(1707~1772)은 친일 문학의 시조일 것입니다. ‘해가 뜨는 동쪽을 장대하게 유람한 기록’이라니. 이 얼마나 친일적입니까!
함흥 귀경대에서 동해 일출의 장관을 예찬한 의유당 남씨의 ‘동명일기(東溟日記)’(1772년) 역시 친일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동쪽 바다’(東溟)에서 해 뜨는 것에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으니.
‘Damnatio memoriae’라는 라틴어를 잘 아실 겁니다. 굳이 번역한다면, ‘기억(혹은 기록)의 삭제’ 정도가 될 겁니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것,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억과 기록에서 제거하려는 행위’(Damnatio memoriae)의 역사는 기나깁니다. 서기전 3세기 말,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집트의 이크나톤(서기전 14세기)이 태양신(아텐)을 유일신으로 삼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당시 이집트인들이 ‘신중의 왕’ 정도로 생각하던 ‘아문’과 관련한 것을 말살하려 한 것도, 반대로 이크나톤의 사후 아텐과 관련한 것이 부숴진 것도 결국은 Damnatio memoriae입니다. 나와 다른 것, 나와 달리 생각하는 것을 제거하기.
하긴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남’을 배척하면서 존재합니다. 감기 균이 들어왔을 때 백혈구가 싸우는 것도 결국은 ‘나와 다른 것이 내 몸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그래야 개별 생명체는 존재하니까. ‘타자’는 기본적으로 배척해야 하니까. 그러니 Damnatio memoriae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인가요?
아침부터 씁쓸해집니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고교 총동창회에 갈 일은 없을 것 같고, 가더라도 제가 ‘새 교가’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먼동이 트이니 온 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 나셔서...’로 시작되던 교가를 배운 사람이니까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추석 연휴에 65
스벅에서 오르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타오네…
-
자지축을박차고 2
아프겠다
-
실모 푸는것 5
미적 기준 6모73점/ 9모85점이라서 계속 2등급 턱걸이였는데실모풀면 항상...
-
원래는 12 to 6인데 좀 늦어져서 12:30 to 6 정도 돼요 1 to 6 로...
-
국어:10-13회??얘는 기록을 안해서 잘 모름 영어:15?회 수학:100회+하프모...
-
[인문논술] 성균관대 인문사회계 논술, 얼마나 쓰는 게 좋을까? (분량 관련 조언) 21
성균관대 논술의 큰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답안지가 원고지가 아니라 줄 노트의...
-
사람 수 적으면 보정 좀 해준다는 뜻인가
-
제가 공부를 평생 살면서 길게 해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재수하면서 관리형...
-
없는 건가요 ? 아무리 찾아도 예시답안은 못 찾겠네요 ㅜㅜ
-
‘ 객관적 사실 ‘ 만 전달함 판단은 알아서 ㅎ 단점건물 일주일에 한번꼴공사 -...
-
3개면 충분한가요
-
경제 하고싶었는데 10
정법 <- 이새끼도 컨텐츠 없어서 긁어 모으는디 경제는 진짜 없어보여서 안함
-
이감 어렵당 0
사실 내가 못 하는거지만 문학이 많이 약해졌음...
-
쓰리투원 고지능
-
단체소송~
-
우리 학교 문과 실수 애들도 아무도 안하던데 ㅋㅋㅋㅋ
-
시즌1 많이 쉽다는얘기가 많아서 시즌2부터 할지 고민이네요.. 작년수능 96 6월...
-
9평 경제 47 사문 38 더프같은것도 풀면 무보정 기준 사문보다 경제가 더 잘나옴...
-
큐뱅크 같이 들어있는거임?? 큐블라는 보이는데
-
추석이라 내려왔는데, 진짜 삼촌중에 말이 엄!청 많은 삼촌이있는데, 진짜 친척들도...
-
평백이랑 누백 대충 얼마 나와야 됨?
-
오늘 부모님 다 시골 내려가서 집 비어서 나 혼자 심심하고 무서운데 같이 하룻밤...
-
보통 2~1(낮은 1컷)인 분들이 이감 상상 바탕 한수 풀면 어떨땐 90점 초반...
-
퀄을 좀 높여라….. 제발 퀄이 낮으니까 시간이 아까움 사문은 무슨 구닥다리 계층...
-
지금읽어도 이해하고 풀려면30분걸리든데.. 나라면 시험장에 못풀고 넘어갈듯
-
사문 생윤 수특 2
풀어야하나요?
-
qna 올리려고 상상홈페이지 들어가려고 하는데 페이지가 안열리는데 나만 이런거임?
-
중견수(CF) 수비는 평균 이상 하는편 실책 1년에 5개정도 1년차 신인 타율 :...
-
개열심히 살거임 수학 황이 되고 싶어
-
어떻게.풀어요..
-
공하싫 2
그래서 안 하기로 함.
-
30살 병역기피자 "유학 보내달라"...법원 "안 된다" 8
[앵커] 병역을 회피하다가 여러 차례 처벌받고선 유학을 위해 해외로 출국하겠다는...
-
공부하기싫다 3
공부하기싫다
-
ㅈㄱㄴ
-
제목그대로 움직도르래 관련 문제 풀면서 얻은 아이디어 및 알고리즘 일반화라고...
-
국어 수학 사설 보고 와 이렇게까지 낸다고 이러고 야야 사설 난이도 낮추기 위해...
-
n제 정답률 3
지금 n티켓 푸는데 8문제중에 4~5문제 밖에 못푸는데 계속 해도 될까요?
-
https://orbi.kr/00069182467/%ED%8F%89%EA%B0%80%...
-
야분코삭
-
작년과 비교해서 빡셀까요? 널널할까요? 아님 작년과 같을까요??
-
https://youtu.be/fBTZnwqiH4w?si=XqWxu_SsugeZ4ENn
-
국어 문제 여러개 (어려운거 특히 문학, 승무, 천하의 지도, 9평(이기지 못할...
-
지하철에서 흑인 분 옆에 앉으면 독한 향? 냄새? 때매 너무 힘듦 ㅠㅠ
-
영어 2등급인데 8
워마 2000 단어 세세하게 완벽하게 다 외우는 게 의미가 있나 아니면 그냥 문풀...
-
의대생들 이거 진짜임? 10
진짜 저렇게 올림?
-
그거 분량이 어케 되나요 총 며칠치임
-
그러면 영어 버려도 되잖아
-
돈벌레 출현 9
관리비도 안 내는 게 남의 집 샤워실에 숨어 있길래 뜨거운 물로 삶아버렸읍니다..
하 글 정말 너무 잘쓰셔요
아닙니다. 그냥 답답해서요.
내가 싪어하는/질투하는 사람의 장점을 깎아내리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 아닐까요.
아, 그런 측면도 있겠군요.
학창 시절 때 이회영의 일화를 바탕으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주제로 작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회영의 일화를 듣고 감화되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저는 솔직한 마음에 내 가족을 위해서라도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투로 적어서 제출했습니다.
이를 가지고 제 역사의식을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문제시하던 역사 선생님이 떠오르네요.
미국 어느 대학에서 존 웨인 동상을 철거했다는 뉴스도 최근에 접한것 같은데
아쉽게도 이런 일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제 아부지랑 동문이시군요. 큰아버지 83, 저희 아버지 87년도 졸입니다.ㅎㅎ
저 역시 사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사 교육을 혐오하는 이유는 님께서 '역사 담당 교사에게 당했던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런 짓을 '역사의식'으로 미화하는...
저는 지금과 같은 한국사 교육이라면, 차라리 폐지되는 게 낫다고 봅니다. 아쉽기만 합니다.
그나저나, 님은 아해들과 함께 호흡하시는 선생님이 되소서.
욱일기는 일본이 일본 제국을 형성하기 전에도 쓰던 즈그들의 고유문양입니다. 전범기니 뭐니 알바도 아니지만 설령 욱일기가 전범기일지라도 독립군수보다 일본제국군으로 자원입대한 수가 훨씬 많았던 민족이 씨부릴 자격은 없다고 사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