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군과 싸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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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가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Don't fight the Fed.”
연방준비위원회와 싸우지 마라는 뜻입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금리 등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연준과 싸워봐야 득 될 게 없다는 것이죠.
윤 대통령의 속칭 ‘킬러 문제 수능 배제’ 지시 이후의 동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가 입시 관계자여서도 아니고, 수험생 자녀를 두고 있어서도 아닙니다.
수능은 20년 뒤, 혹은 30년 뒤 우리 사회를 이끌 엘리트들을 결정하는 시험입니다. 최소한 제 경험칙으로는 그렇습니다. 수능을 못 보고 좋은 대학을 못 가도 열심히 공부하면 ‘역전’된다? 대부분은 그럴지 몰라도, 이 나라를 이끌 극최상위 0.1% 안에서는 아닌 것 같더군요.
바둑의 경우, 10대 최초반 나이에 입단하지 못하면 한국 바둑의 1인자는커녕, 다섯 손가락 안에도 못 들어갑니다. 한국 바둑의 근대화가 충분하게 이뤄진 1970년대 이후, 한국 바둑을 이끌었던 1인자 계보는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 신진서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빠르게는 9세, 늦게는 12세에 입단했습니다. 10대 후반에 입단해서 한국 바둑의 ‘짱’이 된 사람은 단 한 분도 없습니다.
극최상위는 10대 시절에 이미 판가름이 난다는 뜻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정상적 지능을 타고난 사람’으로서 노력하면 수능 1% 안에는 들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하지만 0.1%, 아니 0.01%는 타고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해, 100M 달리기 연습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한들 11초대 초반에 뛰는 것은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수능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상위 1%가 아니라, 0.1% 안에 드는 이들이 어떤 과를 지망하는지 등을 살피기 위해서요. 그들의 동향에 이 나라 미래가 달려있을 것이므로.
1980년대 꼰대 학번으로서, 서울대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에서 수석이 나오던 때가 사무치게 그립고, 의대에 지나치게 인재가 쏠리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학마다 본고사가 있던 1970년대와는 달리, 학력고사 이후 모든 이가 ‘동일한 문제’를 풀게 되면서 ‘극최상위에 걸맞는 난이도를 갖춘 문제’가 없어지는 것에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국가 대표 축구선수가 될 극소수를 뽑으면서 ‘인사이드 킥 차는 것’ 등 아주 평범한 축구 기술 테스트로만 시험을 치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고백하건데, 저는 수능 국어 문제는 과학 지식이 많이 섞인 교과융합형 문제가 많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조선이 강점을 당한 이유는 ‘공부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니 형설지공이니 주경야독 같은 말이 왜 있겠습니까? 19세기 중반 이전 성리학자들이 공부를 적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만, 공부하는 방향성이 잘못됐던 것이지요. 자연과학에서 뒤처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육은 ‘지역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하므로, ‘1. 수시 종합 폐지 2. 학교 내신으로만 결정하는 수시 교과 70% 3. 수시에서 밀린 이들의 패자부활전 형식(정시를 ’패자부활전‘이라고 처음으로 표현한 이는 2010년대 초반 서울대의 입학처장이었지요.)의 수능으로만 선발하는 정시 30%’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지역 격차 조장’ 우려로 지금은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 몇몇 국회의원들이 발표했던 지역별 고교별 수능 2등급 이상 성적 분포를 보면 서울과 비서울, 그리고 서울 내에서도 강남권과 비강남의 성적 차이가 확연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격차는 지금 더 심화됐을 겁니다.
‘조국 사태’로 정시가 40%로 확대됐을 때 대치동 사교육계가 환성을 지른 것도 사실이었고요. (다시금 고백하건데, 저는 ‘국립서울대학’의 초성을 딴 ’샤‘를 ’서울공산대학‘으로 받아들였던 1980년대의 아이들입니다. 아무리 사회 생활을 대한민국의 최고 우파 신문 기자로 일했어도, 더 나아가 우파 정권의 대통령실에서 일했어도, 교육과 의료에 대한 지향점은 여전히 좌파적입니다. 어릴 적 배운 게 그래서 무섭습니다.)
앞서도 말했듯, 저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라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1%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0.1% 0.01%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을 지극히 어렵고도 교과융합적인 수능을 통해 정시에서 뽑아내면 된다고 봅니다. 저 정도 능력의 사람은 수시로 뽑든 정시로 뽑든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능 문제는 현재보다 더 어려워도, 더욱 교과융합적으로 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어원에서부터 아주 고매한 의미로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의 어원은 ‘demos’(뛰어나지 않은 이들)의 ‘kratos’(지배체제)를 말합니다. ‘뛰어난 이들’(aristos)의 ‘지배체제’(kratos)가 ‘aristocracy’이지요. 우리가 ‘귀족정’이라고 흔히 부정적으로 번역하고 사용하는.
그리고 민주주의의 본질은 누가 뭐래도 ‘1인 1표에 의한 다수결’입니다.
자, 그럼 살펴보지요.
오르비를 보면, 윤석렬 대통령이 지시한 ‘킬러 문항 배제’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
이해합니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이해 관계’ 안에서 판단합니다. 최상위층이 주로 포진한 오르비에서야 문제가 쉽게 나오면 수능에서, 더 정확히는 대입 정시에서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위 1%는 100명 중 1명이라는 뜻입니다. 나머지 90명, 아니 80명, 아니 70명은 쉬운 수능을 원할까요, 어려운 수능을 원할까요?
윤석렬 후보와 이재명 후보의 대권 싸움은 고작 0.7% 차이였습니다. 그 0.7명 차이가 ‘천하를 가진 자’와 ‘자칫하면 감방에 갈지도 모르는 자’의 차이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100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지지자가 많은 쪽으로 정책은 기본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우정치 아니냐고요? 파퓰리즘 아니냐고요?
민주주의의 본질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민주주의의 어원 자체가 ‘뛰어나지 않은 자들의 지배체제’인데요.
입시 정책도 간단합니다.
사교육비로 허덕이는 학부모가 많겠습니까, 아니면 사교육비는 전혀 부담 없는 학부모가 많겠습니까. 수험생들이, 킬러 문제가 섞인 수능을 좋아하겠습니까, 킬러 문제가 예년에 비해 확 줄은 수능을 좋아하겠습니까.
답은 나온 셈이지요.
답답한 마음에 국민신문고 등에 민원을 넣고 반대 서명 운동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지빠른 사교육계의 거장들은 지금 ‘킬러 문제 폐지 반대 운동’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준킬러, 아니 평타 문제를 실수 없이 어떻게 하면 빨리 정확히 풀 수 있도록 가르칠까’를 연습할 겁니다.
수십 년 사교육 시장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관군과 싸워서는 안 된다, 관군이 길을 내면, 나는 그 길에서 내 최상의 이익을 찾으면 된다.
연준과 싸우는 세계적 투자자나 증권사는 없습니다.
오르비에서 분노하시기보다는, 부모 님께, 혹은 (학원) 선생님들께 ‘바뀐 수능에 어떻게 대비하는 게 나은지’에 대해 묻고, 그 방향으로 열심히 공부하셨으면 합니다.
사교육 관계자조차 관군과 싸우지 않는데, 왜 수험생이 관군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24학년도 수능에서 모두 목표하시는 바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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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딱히 여론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서요.
일단 싸워는 봐야죠.
수능 절대평가한다고 방침을 발표했을 때 관군과 싸우지 않았으면 지금 어떤 상황이 되었겠습니까.
글쎄요, 혹 여론조사 기관에서의 조사 결과를 들으신 적이 있는지요. 사람들 대부분,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의 생각을 여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수능 절대 평가와 수능을 쉽게 내는 것은 완전히 맥락이 다른 문제입니다. 서울대를 폐지하거나, 프랑스처럼 제 1 대학 제 2 대학으로 한다고 찬성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일단 지금 해당 사안에 대한 여론조사는 미디어토마토 뿐이 없어, 이 회사의 편향성은 둘째로 하겠습니다.
"56.9%가 ‘수능을 앞둔 교육 현장에 일대 혼란을 초래했다’고 응답했고 36.2%는 ‘공교육 중심의 원칙적 발언으로 문제 될 게 없다’고 답했다"
라고 뽑을 수 있었네요.
자신의 생각을 여론이라고 믿는 것도 위험하지만, 여론을 지레짐작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여론조사 회사에 문의를 알음알음으로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 여론이 어떤지에 대해 말입니다. 10대나 20대, 정시 성적이 좋았던(혹은 좋을!)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아쉽게도 소수일 뿐입니다. 솔직히 대부분은 본질적인 관심이 없거나, 아주 피상적으로 사교육비를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겁니다. 제가 보기에... 옳고 그리고를 떠나(솔직히 이 문제를 옳고 그르고로 평가할 수도 없지만), 이 싸움은 끝났다고 봅니다.
흠 일단 40~50대와 20대는 해당 발표 이후 윤석열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졌습니다. (리얼미터 등등을 통해 보더라도)
그래서 교육을 주요 의제로 삼는 층에게는 이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온 것 같아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 대통령의 의중을 바꾸실 것인지요. 촛불집회요? 아니면? 과연 대다수가 그 방식에 동의할지요. 어찌 됐든 '사교육비 낮추겠다'는 것을 표방한 정책에 반대할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지요.
최소한의 반대의사를 표현하는거죠.
당장 내년이 총선인데..
그러니까요. 최소한의 반대 의사... 한데 그것의 비중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선거는 잘 아시듯, 이슈 싸움입니다. 한쪽은 '사교육비 절감'을 내세웠습니다. 그것에 이길 수 있는 구호가 뭘까요? 저처럼 "초엘리트는 초엘리트답게 뽑을 수 있어야 한다'인가요? 그런 구호로 과연 데모크라시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시나요?
정시기다리는 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싸움은 승산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님께서 싸우시겠다면 싸워야지요. 굿럭입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소서.
그걸로 사교육비가 오히려 오른다 정도가 되겠네요.
아, 예, 그럼 그 논리를 잘 개발해 주십시오. 현 정부의 정책으로는 사교육비가 오른다는 사실을 국민이 납득한다면 이기실 겁니다. 저는 그 방법은 없어보이지만... 굿럭입니다.
옙. 좋은 마음에서 해주시는 말씀인 것 압니다 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답답해서입니다. 저는 교과융합적 과학 지문이 국어 수능에서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하지만, 수험생이 관군과 싸울 수는 없다고 봅니다. 흐름에 맞게 가야지요.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