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수험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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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과에선 요새 출석을 안 하시는 분들이 부쩍 늡니다. 아마도 반수생이겠지요. 저도 반수를 했던 사람이라 그분들께서 이미 마음을 굳히셨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있죠. 동시에 얼마나 괴로운지도 잘 압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성공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찌 되는 걸까
이렇게나 게으르게 사는 데 성공할 자격이 있을까
저 역시 이런 것들이 꾸준히 쌓여서 6평 이전에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공부를 중단하고 산책하러 다니기 일쑤였죠 6평이 끝나고 채점을 매겨보니 영 좋지 않은 성적이 나와서 좌절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볼펜으로 색칠놀이만 하고 강의만 봤던 공부였으니 성적이 안 좋을 만하죠.
그 상태로 재수학원에 갔고, 8 - 9월 때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낮잠을 3 - 4시간은 잤던 거 같네요. 그러다 9평에서 성적표를 받고 마음을 달리했습니다.
오르비를 뒤지다가 찾은 성적표네요. 수능까지 스스로 부끄러운 점을 남기지 말자? 그런 마인드로 성적표를 올렸던 거 같습니다. 작년 수험생활 당시 목표가 최상위권이었기 때문에 저 때 이후로 수학 성적을 어떻게든 올리려 노력했습니다.
드릴1, 드리블, 드리블n, 4점코드, 링거n 다 합쳐서 13권인데 이거를 일주일에 세 권씩 끝냈었네요. 이때 이후론 1일2실모씩 하며 수능 연습에 치중했습니다. 원래는 세븐퀘스천에 드릴3까지 더해서 n제 19권을 목표했는데 게을러서 기존의 목표했던 바를 끝내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0덮을 봤는데 국어가 3등급이었나 그랬습니다. 9평 끝나고 오만해진 나머지 간쓸개 및 밀린 주간지 해결하기에 급급해서 하루에 3일 치 정도만 풀고 국어공부 끝! 이랬는데 업보가 돌아온 거죠. 그래서 그 이후로 계속 미루고 있던 기출서 분석하기에 눈을 돌렸습니다. 유네스코를 7-8월에 샀었는데 저 때 처음 폈었죠.
제가 기출서를 사서 푼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남들 다 한다는 5개년 7개년 기출 분석도 안 했죠. 주간지나 인강 교재에 나오는 지문만 푸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루하루 1706 독서/문학 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풀었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니 20수능까지 풀었네요. 이것도 게을러서 다 풀진 못했습니다. 수능 막바지에 이감 모고 밀린 거나 바탕 공통모의고사 밀린 걸 1일1실모 했던 영향도 있겠지마는 기한은 충분했는데 다 끝내지 못한 건 제 나태함 때문이 큽니다.
여기까지 했으면 부족한 부분이 메꿔졌으니 괜찮다 라고 생각될 때쯤에 탐구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사설실모가 죄다 20점대가 떴죠. 지구는 가끔 40점대도 떴는데 물리가 골칫덩이였습니다. n제는 고민하면은 잘만 풀리는데 실모는 왜 이 꼬라지인가? 실모는 고민할 틈도 안 줬거든요. 제한시간 30분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날짜를 보니깐 10월 중순, 고민할 틈도 없었죠. 그때부터 수능때 까지 물리실모만 50여회분을 해치웠습니다.
50여 회분이란 말만 들으면 하루에 1일3실모를 했나? 싶겠지마는 도중에 5-6일 정도 실모를 적게 풀고 엔제를 풀거나 타 과목 공부에 치중하거나, 그냥 공부가 안돼서 때려치운 적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위에 찍은 사진처럼 하루에 실모 9-10회분을 때려 박았죠. 오답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풀고 채점하고 숨돌리고 타이머 키고 다음 실모. 사람 할 짓은 안 됩니다.
불안불안했죠. 열심히는 했지만, 뭐 하나 완성된게 없는 상태. 심지어 영어랑 지구는 천운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수능장으로 갔습니다.
가채점을 안 해서 무슨 문제를 틀렸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상위권의 성적표는 아니란 게 확실하죠. 그래도 제가 자랑할 만한 이야깃거리는 있습니다.
1. 국어에서 풀이 순서에 연연하지 않았다
- 평소 연습하던 순서와 달리, 한 문제에서 막히자 바로 넘기고 다른 지문을 풀고 돌아오는 유연함을 보였습니다.
2. 물리에서 종료 5분 전에 3문제를 푸는 기함을 토해냈다.
- 이거 어떻게 했는진 진짜 모르겠네요. 3p의 안 풀리던 역학 3문제를 종료 5분 전에 풀었습니다.
위의 두 개 빼면은 사실상 자랑할 만한 게 없습니다. 수학에선 남들이 잘 풀었던 12번에서 막혔고, 14번의 ㄷ이 틀림을 증명했음에도 그게 ㄴ도 틀리다는걸로 이어짐을 알지 못한채 무지성으로 찍었죠. 22는 찍어서 맞추고, 기하 29는 어디서 실수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틀렸습니다. 수학은 12, 14, 15, 29 틀렸던 거 같은데 가채점은 안했어도 답을 어느 정도 기억한 채로 답지를 봐서 기억합니다. 막바지에 가장 열심히 한 과목이라 아쉬움이 큰 것도 있고요.
영어랑 지구는 뭐... 노력 부족이 딱 어울립니다.
제 작년 수험생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수험생활이란 도화지의 절반 이상을 나태로 덕지덕지 칠하고 마감일이 다가오자 그제야 부랴부랴 지워보려 하지만, 깊게 물든 얼룩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죠.
여러분께서는 저보다 시간이 많습니다. 9평이 끝나서야 발전하려 했던 저보다 시간이 두 배는 많습니다. 도화지에 떨어트린 잉크 역시 아직 깊게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엔제를 수십 권 풀 수도 있고 실모를 수백 회 풀 수도 있습니다. 회독을 할수도 있고 오답을 복습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이 쌓여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겨우 서 있을 때, 당신 심장에 뿌리내린 확신이 당신을 지탱하고 나아가게 함을 믿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발을 겨우 내딛는 고된 길, 그 끝에 있을 과실을 당신이 끝내 거머쥘 것임을 믿습니다.
아름드리 피어오를 꽃이 될지니, 당신께서 봉오리를 짓이기고 나올 찬연한 꽃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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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이 글은 9평 이후의 노력에 대해 길게 서술했습니다. 약연님이 쓰실 글은 모든 수험생활에 걸쳐 빛나는 일들이 적히게 되길 바라요.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9평 이후 제가 한 노력은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과정이었습니다.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치켜들기를 수십번, 쉴려고 할 때면 나를 밀어내는 죄책감과 강박이 뒤섞인 무언가. 정말 힘들었지만 다 끝나고보니 그처럼 빛날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실 겁니다. 결과만 보고 달려가기에는 결과가 너무도 불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나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날들에 태양이 비추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