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뒤 의미가 선명해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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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명확히 몰랐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때로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아, 그때 걔가 나를 좋아했구나’ 알게 되는 것처럼요.
아침 산책을 하는데, 뜬금없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떠올랐습니다. 92년 7월 25일부터 8월 9일까지 열렸던.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려면, 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사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1936년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뒤, 40년 만에 양정모 선수가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62kg급 자유형 금메달을 땁니다. 나라가 뒤집어졌지요. 메달을 가리는 최종 경기가 열리기도 전에, ‘양정모, 금메달 유력’이라고 방송에서 긴급 자막으로 내보냈던 것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당시, 올림픽 금메달의 의미는 그랬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우리가 참가하지 못합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반대한 미국이 보이콧을 했으니, 우리 역시 미국을 따를 수밖에요. 1984년 미국 LA올림픽에서 한국은 여섯 개의 금메달을 따서 ‘금밭’을 수확했다고 언론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등 동구권에서 ‘서방의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보복으로 LA올림픽을 불참했기에 금메달의 의미가 조금은 퇴색됐습니다. 반쪽 올림픽이었기 때문이지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은 12개의 금메달로 종합 4위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복싱 미들급 결승 경기에서, 한국 대표(이름은 굳이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 선수가 심판을 매수한 것도 아닌데, 35년이 지나서도 고통받을 이유가...)가 훗날 미국의 전설적 라이트 헤비급 복서로 성장하는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도 금메달을 따는 등 개운치 않은 결과도 일부 있었습니다. ‘홈 텃세’라는 시각도 있었고요.
그래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주목됐던 것 같습니다. 엘리트 스포츠 분야에서 우리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한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대한민국 체육사에서 한 획을 그은 대회가 됐습니다.
개막식 직후 첫 메달은 여성 10m 공기소총 부문이었는데, 서울체고 3학년 재학생이던 10대 소녀 여갑순이 차지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7월 27일 자 19면 스포츠면에서 ‘누가 여갑순을 아는가. 아무도 모른다. 누가 그의 금메달을 예상했는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라는 다소 촌스러운 문장으로 낭보를 전했습니다. 그냥,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막 금메달 종목은 마라톤이었는데, 잘 아시듯 황영조 선수가 차지했지요.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 종목을 한국이 석권한 것입니다.
최종 성적은 금 12, 은 5, 동 12. 종합 7위. ‘88년 텃밭 올림픽’에서 일본보다 우위에 있던 것을 빼고, 외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우리가 일본보다 앞선 최초의 대회였지요.
선견지명이든 반지빠름이든,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갖는 의미를 당시 알고 계신 분도 계셨겠지만, 저는 제대로 몰랐던 듯합니다. 이러구러 ‘식민의 기억’을 주입당하다시피 했던 저로서는 우리가 앞으로 당당하게 세계에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명함을 내밀게 될 것이라고 당시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80년대 초중반, 소니를 따라 만든 삼성 카세트 플레이어는 녹음테이프를 틀면 탱크 소리를 방불케 하는 잡음이 들렸으니까요. 소니 것은 깨끗하게 들렸는데. 삼성이 소니를 따라간다? 무슨 헛소리! 그게 80년대 90년대 심리적 풍경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20여 년 정도 지나니, 일본 전자 제조사의 총매출액이 삼성을 못 따라간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실질 소득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 우리가 일본보다 못 사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왔지요. 건강보험제도나 대중교통은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서는 나라이며, 문제가 많다는 공교육조차 미국보다는 낫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요즘은 언론에서도 사회 현상 등을 논할 때 ‘선진 외국의 사례를 반드시 넣으라’는 지시는 없는 듯합니다. 90년대 초반, 제가 기자 초년병 시절일 때는 기사를 쓸 때 ‘무조건 외국 케이스’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민의 기억’은 그렇게 시나브로 잊혀진 것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한편으로는 씁쓸합니다.
돌이켜 보면, 80년대 90년대는 분명 ‘상승하는 기운’이 있었습니다. IMF의 아픔도 물론 있었지만요. 그런데, 지금도 그런 기운이 남아 있나요?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왜 1992년 올림픽이 생각났을까요?
아해가 하나 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의 제 나이를 정확하게 먹은.
아해가 어제 중학교 동창들과 술 한 잔 하고 들어왔습니다.
3년차 삼성전자 직원, 올해 입사한 중소기업 직원, 그리고 ‘알아주는 대학’ 전기과를 나왔지만 공기업 혹은 삼성전자에 들어가려고 강남 학원가에서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랍니다.
친구와 나눈 연봉 이야기, 근무 조건 이야기, 취업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는데, 뭔가 낯설었습니다. 요즘은 취업을 하기 위해 자기소개서 작성법도 서울 강남 학원에서 수강한답니다.
아부지, 삼성전자는 흡연실도 없고, 반도체 분야 근무자는 1년에 건강검진도 두 번 받는대. 직원이 아프면 회사 손해이니까... 반면 중소기업 들어간 친구는 상대적으로 ‘널널한’ 것 같고. 대신 연봉은 삼성전자의 3분의 1 정도고.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래서 삼성전자보다는 공기업을 선호한대. 좋은 직장 취직하려면 대학 학점도 무척 중요하다네...
저, 아니 제 세대도 20대 후반에 저런 이야기를 했었나 싶더군요. 잊은 건가요, 아니면 정말 세월이 바뀐 것인가요?
올림픽이 열렸던 1992년 그 겨울, 대선이 있었지요. 1987년 대선에서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사실상의 군부 정권을 연장시킨 김영삼 김대중을 혐오했던 저는 백기완 후보를 찍을까, 그래도 ‘민주화 운동을 조금 더 선명히 했다고 생각되는’ 김대중 후보를 찍을까 고민했습니다. (고백하건데, 87년 대선에서는 김영삼 후보를 찍었습니다. 노태우 후보를 떨어뜨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표를 더 얻을’ 후보를 찍은 것이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향후 집을 못 살 것이라는 고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 뭔 소리입니까, 반드시 해야죠. 자녀 대학 진학이야 아해가 알아서 하는 것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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