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언어 풍경’이 바뀐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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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국군장병 아저씨들께 위문편지를 단체로 쓰곤 했습니다. 그럴 때 선생님이 화를 내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임마들아, 명복을 빈다가 뭐야, 명복을 빈다가...”
죽은 뒤의 세계를 뜻하는 명(冥) 자의 의미를 모르니 벌어진 일입니다.
요즘 언론에서 ‘청소년들의 문해력 수준이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비책으로 ‘한자 교육 강화’ 등이 제기됩니다. 문해력 논란이 제기되는 이유가 대부분 한자어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교육’이라는 측면에서만 볼 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문해력을 높이기 위해 한자어 교육을 강화하면 되는 것일지요.
세 가지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하렵니다. 학교 교육 측면에서만 보자면, ‘학교에서 강제로 공부시키는 것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고, ‘영어 교육의 강화’로 인한 변화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마지막은 ‘사회 전반적인 언어 사용 환경의 변화’ 혹은 ‘세속화 경향’입니다.
첫째, 강제 교육 방식의 폐기.
요즘 교실 풍경은 1980년대 아니 1990년대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시간을 45년 전으로 돌려봅니다.
1978년 중1 때, 담임은 체육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분의 교육 철학은 아주 심플했습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맞자!’
지난 성적과 비교해서 평균 1점이 떨어지면 한 대를 때렸습니다. 시험 난이도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요. 매 맞는 게 무서워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요즘 이랬다가는 폭력 교사로 바로 낙인찍고 형사 처벌할 겁니다. 하여튼 우리 반의 평균 성적은 다른 반에 비해 월등히 높았습니다.
6년 뒤.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제가 나온 고등학교에서 제가 입학한 대학에 들어간 친구는 문과 360여 명 중 3명이었습니다. 졸업정원제로 그 대학 신입생을 6000명이나 ‘마구 뽑던’ 시절이었으니,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면 진학률이 꼴찌 수준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상문고는 한 반 60명 중 6등 정도를 해도 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어찌 공부했기에 그럴 수 있느냐고 같은 과에 입학한 상문고 졸업생에게 물었더니, 그리 답하더군요.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이사장은 고1 때부터 학생들을 밤 10시까지 붙잡아 놓고 강제로 공부시켰다. 자기 말을 안 듣는 것 같은 교사는 학생들이 보든 말든, 정강이를 걷어차고 심지어 뺨을 때리기도 했다.(제가 나온 고등학교는 오후 3시 50분만 되면 학생들이 하교하느라 바빴습니다. 고 3이 되니, 학기 초에 성적 좋은 몇몇 놈을 모아 놓고 공부를 시키려고 했지만, 그나마 몇 개월 만에 흐지부지됐지요.)
당시 상문고 졸업생들에 따르면, 동문회를 하면 이사장 이름을 개 돼지처럼 부르면서 ‘000 몰아내자’고 외쳤답니다.(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음울하게 그렸던 시인이자 영화감독 유하 씨도 상문고 졸업생입니다.)
이제 되돌아봅니다.
중 1 때 매 맞기 싫어 공부했습니다. 하여, 우리 반 평균이 높았지요. 고등학교 때, 강제로 붙잡아 놓고 공부시키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제가 나온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나빴고요.
이 모습을 요즘 교실에 대입시켜 보지요.
교사가 교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요즘 별로 없는 듯합니다. 사랑의 매요? 폭력입니다. 중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치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행복이 성적순도 아니라고 하고요. 이러니 수업 시간에 학생이 대놓고 책상에서 엎드려 자도 교사가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습니다. 학생이 (알아) 듣든 말든, 교사는 그저 수업을 진행시키기만 하면 됩니다.(저 때 이랬다가는 바로 ‘싸대기’였지요.)
이러면 ‘평균 수준’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저는 봅니다. 속칭 명문대학에 가기 위한 상위권, 아니 중상위권 이상의 공부량은 분명 우리 때와 비교하면 정말로 압도적으로 많습니다만, ‘평균 지점’ 혹은 ‘평균 이하’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해력 저하도 이런 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학업 수준이 중상위권 이상인 청소년의 문해력은 우리 때와 비교할 때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니, 높을 겁니다. 하지만 평균 혹은 평균 이하 지점이라면...
둘째, ‘언어 교육 환경의 변화’입니다.
‘English divide’는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입니다. 영어만 잘 하면 집에 앉아서 유튜브로 유수 영미권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영어를 아주 잘 하면 취직도 편하고요. 이러니 돈이 조금만 있어도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겠지요. 언어 교육의 축이 영어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어휘의 70%가 한자어라고 한들, 한자에 능숙하기보다는 영어를 잘 하는 게 대입 이후 학업에도 유리하고, ‘출세’에도 도움이 되는데 누가 한자 혹은 한문을 예전처럼 공부하려고요.(물론 일류가 되려는 친구들은 한자어 공부에도 매진하겠지만요.)
이는 대입 시험 문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른 분들, 제발 23년도 수능 영어 시험을 풀어보십시오. 지문 이해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문의 수준이 학력고사 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문제를 90점 이상 받아서 1등급을 받은 친구들이 수능 전체 수험생의 7%대입니다. 1983년 11월 22일 학력고사를 치른 제가 그 실력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면, 글쎄요, 80점 받기가 힘들었을 겁니다.(물론 우리 때는 체력장을 포함해서 15개 과목을 치렀으니, 문제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요.)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지난 수십 년 간 지속돼 온 소위 ‘한자어 순화 흐름’ 혹은 ‘언어 사용에서의 세속화 경향’입니다.
삭월세(朔月貰) 우뢰(雨雷) 미류(美柳)나무는 발음하기 편하도록 사글세 우레 미루나무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뜻’보다 ‘발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뜻에 담긴 본래 의미를 시나브로 망각하는 것이지요.
한자어가 뜻글자에서 발음글자로 변한 양상은 요즘 심심찮게 보입니다.
요즘 언론 보도를 보면 ‘우승 주역 3인방’ 운운하는 글을 많이 보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幇)은 원래 ’나쁜 짓을 하는(혹은 돕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형법에서 ’방조죄‘라고 할 때도 ’幇‘자를 쓰는 것이고요. 중국 문화혁명을 주도한 네 명의 범죄자를 ’문혁 사인방‘(文革 四人幇)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이를 영어로 번역할 때 ’gangs of four‘라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幇‘자는 좋은 경우에 쓰는 표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한데, 요즘은 ’좋은 일을 한 사람들‘ 혹은 ’주역들‘이라는 뜻으로 幇을 씁니다. 한자를 ’뜻‘이 아니라, ’발음‘으로 이해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저는 봅니다.
엄격한 언어 구사에서 벗어나려는 이런 사회 전반적 경향을 저는 ’세속화‘로 이해합니다. 이런 세속화 흐름은 언어에서만 보이는 게 아닐 겁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자도 딱히 제재할 수 없게 된 것도 저는 ’교육의 세속화‘로 봅니다.
하긴 종교든 문화든 예술에서든, 세속화 경향은 점차 강화되고 있으며, 이를 막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막말로, 노래를 잘 하면 성악을 전공하려고 할까요, 아니면 대중 가수가 되려고 할까요? 성악가보다 대중 가수가 더 유명하고 돈도 더 잘 버는데? 기실 ’대중민주주의‘에서 대중(demos)이라는 단어가 갖는 원래 의미는 ’뛰어나지 않은 자들‘이라는 뜻일진대요. demos가 지배하는 체제(kratos)가 대중민주주의인데...
이런 모든 양상이 합쳐지면서 소위 ’문해력 저하‘ 현상이 보이게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실 이것을 ’사회 전반적인 문해력 저하‘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학업 성적이 중상위층 이상 되는 청소년들의 문해력이 정말로 떨어진 것일까요?
최근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는 문장에 대해 ’왜 사과를 하는데 심심하냐‘는 댓글이 등장해서 논란이 됐다지요? 이것을 문해력 저하의 증거로 삼는 분도 있었습니다.
한데요,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심심(甚深)한 사과를 표한다‘고 말하는 이가 이제 몇이나 되는지. 친한 사이면 ’졸라(존나) 미안해‘라고 하거나, 격식을 갖춰 표현할 때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혹은 ‘대단히 미안합니다’라고 표현할 겁니다. ‘심심한 사과’에서의 ‘甚深’은 ‘존나’ ‘졸라’ 혹은 ‘대단히’라는 쉽고 편한 단어로 이미 대체된 상태입니다. ‘甚深’은 시나브로 잊혀지면서 ‘옛말’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옛말화’ 돼 가는 단어 좀 모른다고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역으로,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대세 단어’를 모른다고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문해력 저하요? 글쎄요, 저는 시대 변화에 따른 흐름으로 보입니다. 막으려 해도 막기 쉽지 않을. 사회 구성원 전반의 문해력 저하라고 단정하기도 쉽지 않을...
이런저런 사정을 살핀다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점점 심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최소한 우리 말 사용의 풍경으로 굳어질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세속화 경향’에 따른 한자어의 퇴화랄까 본래 의미로부터 변화된 용례의 사용 증가, 그리고 고유어의 강화 흐름. 물론 고유어의 강화 흐름 속에서 비속어 등의 사용 빈도는 높아질 것이고요.
예전에 유홍준 선생님이 문화재청장 시절, 저에게 해주셨던 이야기로 글을 맺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육당 최남선 선생(1890~1957)이 썼잖아. 육당이 얼마나 천재야? 한데 육당이 글을 다 쓰고 난 뒤 위창 오세창 선생(1864~1953.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 우리나라 서예와 그림에 대한 기록을 모은 기념비적 책인 ‘근역서화징’의 저자.)에게 보였대요, 감수를 받으려고. 위창이 몇 문장을 고치면서 그랬다잖아. ‘요즘 애들, 한자 몰라서 큰일이야’라고...“
추신
저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현재 바뀌었다고, 예전의 용어까지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현재는 현재, 과거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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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정말로 생각할 것이 많다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세대를 뛰어 넘어 서로 고민해봐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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