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매황가능 [1159823] · MS 2022 (수정됨) · 쪽지

2022-12-25 21: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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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등장한 제주 방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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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내 동생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거 포도맛 맞?"이라고 물어봤다. 너무나 흥미로운 현상이다. 어미 따위 개나 줘 버리고 어간만 취하는 이 현상이 최근 제주 방언(제주어라고도 하지만 일단은 '제주 방언'이라고 쓰겠음) 화자에게 많이 보인다. 특히 내 또래인 10대와 젊은 세대인 20대에게도 말이다. 


내 동생은 아직 10대가 아니지만 벌써부터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은 제주 방언의 변이형이 점점 퍼져나간다는 뜻일 것이다. 문법 시간에 배웠다시피 교착어인 한국어에서 용언은 어간과 어미로 구성되며 용언은 활용된다. 활용을 할 경우 용언 어간에 어미가 붙어서 '먹고/먹으니/먹어서/먹으며' 등으로 쓰인다. 그러나 평서형과 의문형에서 어미 '-아/어'가 붙을 경우 이 어미를 생략해 버리는 경우가 일부 어휘에서 보인다. 


'~하지 않?'이나 '~인 거 닮.', '괜찮?' 등의 경우가 있다. 딱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학교에서 이러한 표현을 쓰는 애들이 굉장히 많다. 집에서도 가족과 얘기할 때 부모님은 이런 말을 쓰지 않으시지만 동생은 자연스럽게 쓴다. 방언에도 신조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이유는 어미 '-안/언'의 오용 때문이다. 제주 방언은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 중 '-안/언'이 있는데 활용은 '-아/어'와 비슷하다. 받침 있는 어간에 붙으면 '먹언'이나 '잇언', '닫안'이, 받침 없는 어간에 붙으면 '간(가-+-안)'이나 '썬(쓰-+-언)', '완(오-+-안)'이 된다. 일단 여기서 '간'을 분석할 때 '-안'이 붙은 게 아니라 '-ㄴ'이 붙은 것으로 오해한다. 


이 오해는 본래 전통적인 제주 방언에는 없던 '인/언'의 등장 때문인데 '잇어'나 '엇어'로 활용되던 놈들을 '인/언'으로 써 버리니 여기에 쓰인 어미를 '-ㄴ'으로 분석해 버리는 거다. '잇니'나 '엇니'를 줄인 건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받침의 ㅅ이 그냥 ㄴ으로 대체되니 이러한 활용은 어미 '-안/언'을 잘못 인식하게 한다.


즉 '-ㄴ'을 어미로 보고 단순히 ㅅ이 대체되는 것이라고 보고 '인/언'을 자연스럽게 쓴다.  전통적인 어미 '-안/언'과 새롭게 등장한 '인(잇다)/언(엇다)'를 보고 앞서 언급한 세 가지의 새로운 표현을 설명해 보자.


1. '~하지 않'을 쓰는 것은 '않'의 발음이 '안'과 발음이 똑같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국어 교육과 표준어의 영향 때문에 '않'에서 [안]을 도출하고 이 소리가 의문형 어미와 같으니 '않'만으로 문장을 끝내는 것이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2. '~인 거 닮'은 '~인 거 닮아'에서 '아'를 생략한 표현이다. 제주 방언에서 '~인 것 같다'의 의미로 '~인 것 닮다'가 쓰이는데 여기서 '닮'의 발음은 [담]이다. 앞서 말했듯이 '간'에서 '-안'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을 못 하는 제주 방언 화자들이 '갔어'나 '먹어' 등에서 '어'를 생략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문제는 무분별하게 '어'나 '아'를 생략하면 표현이 어색해지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안/언'과 발음이 비슷한 비음을 받침으로 지닌 어간만을 남겨둔다. '닮'의 ㄹㅁ은 자음군단순화로 인해 [ㅁ]으로 발음되는데 '안'과 비슷한 소리가 나니 거부감이 덜 들어서 '닮'만으로 문장을 끝내 버리는 거다.


3. '괜찮?'은 '않'만으로 문장을 종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찮'은 [찬]으로 발음되는데 '안'과 발음이 유사하니 이걸로 문장을 끝내 버리는 거다. 


그러나 이 비음의 어간만을 남기는 새로운 활용이 다른 어휘로까지 퍼지는 듯하다. 그런데 또 하나 재밌는 건 내 동생이 '맞다'라는 어휘에서 어미를 생략해 '맞'만 추려냈을 때 말꼬리를 올리면서 [만:]과 비슷하게 발음한 것이다. '맞'은 음끝규에 의해 [맏]으로 발음되나 ㄷ과 ㄴ은 같은 치조음이니 발음을 할 때 '안'과의 유사성을 살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조음방법을 바꾼 게 아닌가 싶다. 이런 걸 보면 어간 말음이 비음이 아닌 경우 종결 어미 없이 구분이 불가능해지므로 이러한 오용은 더 확장되지는 않을 것 같다.




* 참고로 젊은 제주 방언 화자에게 아래아는 'ㅗ'와 큰 차이가 없다. 아예 'ㅗ'로 대체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며 제주 방언만의 독특한 아래아의 발음은 적어도 60~70대는 되어야 들을 수 있다. 갈수록 'ㅎㆍㄴ저'를 발음하면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젊은 제주 토박이들은 [혼저]로 발음할 것이다. '하다(do)'에 대응하는 'ㅎㆍ다'는 아래아가 'ㅏ'에 합류하겠지만 그 외에는 'ㅗ'에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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