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가을 [1097148] · MS 2021 (수정됨) · 쪽지

2022-11-23 01: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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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강남의 거리에서 재수생의 시간은 멈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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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꽤 자주 다녀봤지만, 한 번도 번화가나 유흥가 근처에 거주한 경험은 없습니다. 내향적이고 많이 놀러 다니지도 않았기에 더욱 그런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강남은 단지 '성인이 된다면 자주 놀러가게 될 수도 있는 장소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성인이 되고는 정말로 강남역이 집마당인 마냥 자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합재수학원을 가기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제 눈에 비친 강남의 모습은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의 모습뿐이었습니다. 모두가 피곤한 아침에는 강남의 특별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밤에 귀가하는 길에는 담배 냄새와 취객이 유독 신경 쓰였지만 눈살이 찌푸려지기만 했지 길거리의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강남에 대한 인상은 사람이 참 많고, 시설이 잘 되어있고, 건물이나 가게의 외관이 화려한 것.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재수 생활을 시작한 지 약 한 달이 되던 3월의 어느 날. 재수를 시작했을 때부터 매일 그랬듯 공부가 너무나 잘 되는 하루였습니다. '나홀로 학원생활'에는 예상보다 빠르게 익숙해져 밥을 급하게 먹고 한시라도 빨리 다시 자습실 책상에 앉는 것이 몸에 익어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펜을 집어들자, 문득 펜 잉크가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딱 잘 됐다. 아직 저녁 시간이 한참 남았으니 지금 외출해서 펜 잉크를 사오자. 노트도 몇 개 더 필요할 것 같으니 지금 사오면 되겠네. 그 생각으로 카드 하나를 달랑 챙겨 가까운 문구점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아셔야 할 점은, 저는 재수를 시작하고 나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등하원 외의 목적으로 학원 주변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운이 좋게 자습실도 학원의 본원 건물에 있었고, 산책이나 외식, 땡땡이 등 굳이 외출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펜 잉크와 노트 몇 개를 사기 위해서 처음으로 저녁 시간에 강남의 거리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문구점까지 가는 길에는 큰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몇백 미터가 안 되는 거리에서 길을 잃지만 말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빨리 다녀와서 공부하자고 마음을 먹은 게 무색하게, 돌아오는 길에는 괜히 발걸음이 늦어졌습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침의 조용함이나 밤의 어두움이 뒤덮고 있지 않은 강남의 거리에, 성인이 되고나서 처음 서 본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가 복작복작했지만 거리를 메운 사람들은 취객이 아니라 예쁘게 꾸민 대학생과 사회인이었습니다. 취객을 마주할 땐 조금 짜증을 낸 후 무시하는 건 쉬웠지만, 저와 제 친구들 또래로 보이는 대학생 무리가 조잘조잘 떠들며 스쳐 지나갈 땐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부하느라 잊고 있었던 대학생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는 아침에도 밤에도 열지 않는 상점까지 열려 있어 거리에 한층 더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에 귀가할 때 보이는 번쩍번쩍한 네온 사인만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있는지도 몰랐던 다양한 가게의 간판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시야를 가득 채웠습니다.


문방구에서 다시 학원까지, 겨우 몇백 미터의 거리. 저녁의 강남을 눈에 담고 있자니 어느새 난 학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다시 들어가면, 몇 걸음 채 안 가도 책상부터 의자까지 회색인 자습실에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잠깐 고개를 돌려 화려한 강남의 골목길 풍경을 훑었습니다. 편안하다고만 생각했던 자습실이 갑자기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주변은 들뜬 사람들의 대화소리로 시끌벅적한데, 나와 대화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랑 이곳을 같이 걷고 있어야 할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서 놀러왔어야 할 이곳에 나는 1년이나 더 대학생이 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난 아직 대학생조차 되지 못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인생을 살아갑니다.


난 시간이 멈춰있는데, 강남의 거리에선 시간이 바삐 지나갑니다.


나 혼자 멈춰있는데.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무거워진 발걸음을 이끌고 도망치듯 자습실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재수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자습실의 고요가 견딜 수가 없게 되어 인강을 듣기 위해 가져온 이어폰으로 몰래 노래를 들었습니다. 







제 재수 이야기를 바탕으로 써본 글인데, 혹시 저같은 경험을 하신 분 없나요? 현역 때 워낙 수능을 말아먹어서 재수는 성공이라면 성공이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예상점수보다 훨씬 떨어져서 애써 갈고 닦은 실력의 반도 못 발휘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삼수를 할 돈이나 깡은 없는지라... 서글픈 마음에 한을 풀고자 오글거리지만 글이라도 끄적여봤습니다. 현역일 때도, 재수할 때도 오르비를 많이 하진 않았는데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 새벽에 빨리 올리고 잊어버려야겠습니다. 이게 뭐야?? 싶으신 분은 그냥 한맺힌 재수생의 넋두리라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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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les Morales · 1160601 · 22/11/23 01:34 · MS 2022

    저랑 비슷하시네요
    강남 한복판을 아핌, 밤에만 눈에 담다 보니
    진짜 우울한 느낌 많이 들었어요

  • 봄=고양이 · 1098609 · 22/11/23 01:35 · MS 2021

    강대다녔었어요. 저도 4번출구 근처에는, 다시 가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 근처 다이소도 자주 갔습니다.
    토요일에 식사할때가 고역이었죠, 츄리닝 차림으로 친구들을 마주칠때면 한없이 초라해졌습니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주로 빌리엔젤이었어요. 반짝반짝한 그 디저트 가게에 들어갈때면, 저와는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저도 이런 경험을 했기에, 님 글이 무척 공감이 됩니다.
    이제 스물 하나이시겠네요.
    재수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재수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아실테지만 강대에서도 몰래 나가서 노는 애들 많잖아요. 꾸준히 학원 다니고 자습한것만으로도 대단하십니다.
    일단, 하고싶던 것들 하며 푹 쉽시다. 영화드라마도 맘껏 보고 노래도 눈치보지 말고 듣고 알바도 해보고 놀러도 가봅시다. 수고많았어요.

  • 금가을 · 1097148 · 22/11/23 02:57 · MS 2021

    따뜻한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만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네요. 봄고양이님도 수고 많으셨겠어요. 짧은 글로도 절절함이 느껴져요. 평일은 직장인들이 보이니까 그나마 괜찮은 것 같았는데 주말에는 정말 한없이 초라해졌죠. 저도 논술만 끝나면 정말 원없이 놀려고요.

  • 호빠지망생(호랑이같이빠른사람이란뜻) · 1131199 · 22/11/23 01:36 · MS 2022

    전 아에 거기가 거주지가 될땐 예상외로 그런 마음안들고... 안살고 등하원 할땐 그런마음 많이 들었어요ㅠㅠ 뭔지압니다 익숙해져야해요

  • 호빠지망생(호랑이같이빠른사람이란뜻) · 1131199 · 22/11/23 01:37 · MS 2022

    그리고 한 6시쯤 직장 끝날때쯤 같이 끝나면 노는사람들보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보여요

  • MBDTF. · 836817 · 22/11/23 02:00 · MS 2018

    현대소설 하나 읽은 기분이네요 지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