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소방본부 [963791]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2-09-23 17:37:12
조회수 3,530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근본 넘치는 독서 지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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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써있듯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저는 '아이디어를 잡는 순간 모든 것이 한 방에 해결되는 반면, 아이디어를 잡지 못하면 정상적으로는 절대 못 푸는 문제'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답의 근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풀이가 길어지고 이런 더러운 문제들 별로 안 좋아해요.
독서 문제 보고 예술작품이다 걸작이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문제라고 했다가 가르치던 학생들한테 변태다 영화에 나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다 이런 소리도 많이 들어봤네요. 암튼 품평(?) 시작해 보겠습니다.


2티어(수작)


2011 수능 25~26(배열과 연결 리스트)

예전 수험생 시절 이 지문을 공부하다가 보기 문제에서 단서로 준 조건의 의미를 깨닫고 '이건 시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단, 충분히 많은 양의 자료로 충분한 횟수만큼 실험을 하되, 자료를 무작위로 선택하고 자료의 논리순이 유지되도록 함. '

사실 저 단서 없더라도 문제 푸는 데는 차이가 없습니다. 근데 저 단서를 굳이 왜 줬냐면,

저 단서가 없어지는 순간, 예를 들어 자료의 수가 적고 횟수가 선택하고 자료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순간, '배열'과 '연결 리스트'가 가진 고유한 특성이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큰 수의 법칙 생각하셔도 됩니다.) 결국 저 단서를 통해 '배열'과 '연결 리스트'의 특성이 유지됨으로써 정답이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이죠. 평가원 입장에서는 '오답 시비'를 방지하기 위해 저런 조건을 줬을 겁니다.


2011 수능 32~36(그레고리력)

지문 자체는 평범했으나 35번 문제가 예술적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돈다'와 '철수가 전망대 중심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돈다'를 가지고 <보기>에서 주어진 대상들을 태양, 지구, 항성에 대응시켜 나가는 아이디어를 잡아서 푸는 문제였죠.


2014 6평 A형 16~18(산란의 유형과 원리)

사실 요즘 기준으로 하면 정말 너무너무 평이하고 쉬운 지문입니다. 하지만 보기 문제는 본문에서 제시된 '산란의 유형별 원인과 결과'를 주어진 상황에 끼워맞춰서 푸는 퍼즐 같은 문제였습니다. 그것도 원인, 결과 둘 다요. 고전 수작 중 하나로 인정할 만합니다.


2014 6평 A형 19~21(플래시 메모리)

보기 문제가 예술입니다. 글에 언급되지 않은 1단계, 2단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풀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언급된 조건 하나하나 유심히 봐야 깔끔하게 잘 풀리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꼭 문제뿐만이 아니라 지문도 맥락을 과하지 않고 적절할 정도로 숨겨놓으면서도 매우 깔끔한 고품질의 지문이라 생각합니다.


2014 9평 A형 16~18(동물의 길 찾기)

지문은 평이하지만 보기 문제가 훌륭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쉽다 생각했지만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은 문제였는데, 결국 이 문제의 핵심은 '병아리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발상을 하냐 못하냐를 물어보는 문제 같기도 하네요.


2017 6평 16~19(퍼셉트론과 인공 신경망)

수치들 간의 연쇄적인 관계와, 주어진 상황에서 해당 수치들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지문입니다. 16학년도까지의 물국어 시대가 끝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준 지문으로 기억합니다. 


2017 6평 20~24(유비 논증)

논리학 교과서에 실어도 될 정도로 짜임새 있는 지문입니다. 보기 문제도 퍼즐 맞추듯 대응시키는 재미가 있죠.


2017 수능 37~42(보험)
보기 문제의 경우 지문에서 준 수치들의 정의를 잘 파악하고, '공정한 보험에서는 사고발생확률 = 보험료율'이라는 정보도 활용해서 풀어야 했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수식 써놓고 풀어야 하고, A/B=C일 때 A의 식이 뭔지 B의 식이 뭔지 알고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능력까지 요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수학 잘하는 사람이 국어도 잘 합니다..


2018 6평 30~34(DNS 스푸핑)

31번 문제는 '한 번 동작'과 '두 번 동작'이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지 파악했어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결국 글에서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글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추론해야 하는 거죠. 어려우면서도 깔끔한 문제입니다.


2018 9평 27~32(역학과 논리학)

글 자체는 어떻게 보면 매우 불친절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글은 학생들의 '직관'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테스트하는 글인거 같습니다. 글에서 별다른 설명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도, 고전 역학이 전통 논리학에 대응되고(상호 모순되는 상태가 존재할 수 없음), 양자 역학이 LP에 대응된다(상호 모순되는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글입니다. 그거 파악하면 쉽게 풀고 못하면 못 풀어요.
18 9평의 경우 이 지문 말고는 거의 모든 지문과 문제가 매우 평이했는데도 1컷이 90 후반대가 아닌 93이었는데, 그만큼 이 지문 하나에서 받은 수험생들의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2019 수능 39~42(가능세계)

'가능세계'에서 '가능'이 '현실적 가능성'이 아니라 '논리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이해하냐 못하냐에 따라 체감 난이도가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리학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훨씬 유리한 지문이기도 하고요. 글에 등장한 모순 관계와 반대 관계는 꼭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한 번쯤 보고 익혀둘만 합니다.


2022 수능 14~17(자동차 카메라)

'짧아서 어려웠던' 대표적인 지문입니다. 결국 이 지문의 핵심은 날것의 영상을 찍은 후 1차적으로 왜곡(휘어짐)을 제거하고, 2차적으로 원근 효과(멀리 있을수록 작게 보임)를 제거해 '지도와 같이 위에서 내려다본 영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공' 과정을 파악했다면 의외로 문제들이 쉽게 풀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지문 자체가 함축적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헤겔과 브레턴우즈에서 모든 힘을 다 써버린 수험생들이 이 지문의 핵심 내용을 파악했을지는 의문입니다. 

또한 보기 문제의 경우, 딱 보면 무슨 정체불명의 기호처럼 보입니다. 그림은 '전방 부분'이고 그림의 위쪽이 차량의 전진 방향이라는 정보를 캐치하면 그림의 위쪽은 멀리 있고, 그림의 아래쪽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림의 위쪽으로 갈수록 원근 효과를 제거한 결과 '상대적으로 더 커지게'된 것이죠.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정보를 캐치했다면 무난하게 풀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1티어(걸작, 마스터피스)


2014 9평 B형 28~29(회전 관성)

이 지문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전체의 회전 관성은 1)부피(=질량 요소의 개수), 2) 질량 요소의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

(회전체의 부피가 클수록 회전 관성이 크고, 회전체를 구성하는 질량 요소들이 멀리 퍼져 있을수록 회전 관성이 크다.)
이 내용을 이해하는 순간 두 문제 다 그냥 풀리는 반면, 이 내용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두 문제 사실상 풀어서 맞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거 따지고 저거 따지고 할 것 없이 저 내용만으로 깔끔하게 풀리게 만들어놓은 걸작 중 하나입니다.

2014 수능 B형 26~27(지구의 자전과 전향력)
보기 문제와 관련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자가 운동할 때 전향력에 의해 진자가 휘어지는데,

1) 진자가 휘어지는 방향이 진동면의 회전 방향(시계/반시계)을 결정한다.

(진자가 오른쪽으로 휘어지면 시계 방향, 왼쪽으로 휘어지면 반시계 방향)

2) 진자가 휘어지는 정도가 진동면의 회전 주기를 결정한다.

(진자가 많이 휘어질수록 진동면이 빨리 회전해 회전 주기가 짧아짐)
일단 그림 보고 추상적인 개념인 진동면이 뭔지부터 파악했어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림을 주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풀 수 있는 사람이 5%도 안 될 거 같기도 하고요.
이 문제도 회전 관성과 마찬가지로 핵심 아이디어를 잡는 순간 그냥 풀리지만 못 잡으면 못 푼다는 점에서 근본 넘치는 문제입니다.


의도하지 않게 긴 뻘글을 썼습니다. 써놓고 보니 거의 다 과학기술 지문이고, 가끔 논리학 지문 들어가 있네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인문예술이랑은 안 친한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예술 지문이 무조건 더 어렵다는 것은 아니고요.
(+ 작수 헤겔 같은 지문 문제 극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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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rene_ · 1051936 · 22/09/23 17:54 · MS 2021

    18 9평은 당시에 lp도 그렇지만, 문학이 매우 까다로워서 당시엔 1컷이 높단 반응이였는데 의외네요 ㅋㅋ

    예전 B형 지문중 좋은게 많죠 1티어로 뽑은 2개 외에 15 슈퍼문 16 항부력이 없는게 아쉽?

  • 경상남도소방본부 · 963791 · 22/09/23 18:01 · MS 2020

    저는 18 9평(저 지문 제외), 수능 모두 매우매우 쉬웠다고 봤는데 반대 의견 가진 사람이 많은 게 좀 의외였어요. 이건 제가 잘한다 다른 사람이 못한다 그런게 아니라 그냥 '상성'의 차이인거 같습니다 ㅋㅋ
    15 슈퍼문은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문제지만 너무 따져야 할 조건이 많아서 제 기준 깔끔하지 않아서 뺐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