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얼음 [1106507] · MS 2021 (수정됨) · 쪽지

2022-06-30 05: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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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가 만든 오르비식 문학.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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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안 생김새는, 컴퓨터가 설치된 넓은 칸막이 책상 곳곳에 각 대학원생들이 앉아 있고, 학부생은 앞문으로 들어와 뒷문으로 빠지게 돼 있다. 건너편은 담당 교수의 자리, 교수다 그 맞은편에 앉아 있다. 교수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춘다. 앞에 앉은 교수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앉으렴."


학생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내가 저번에 말한 대학원은 생각해 봤어?"


"안암."


대학원생이 힐끗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교수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허리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며 말한다.


"수시로 간다고 해도, 생기부를 일정 부분 반영하는 대학이 대부분이야."


"고려대."


"제발 다시 생각해 보렴. 1학기 평점이 아깝지 않니?"


"고려대학교."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포닥이 입을 연다.


"우리 학교인 경희대에서 지리학과를 미는게 고려대보다 훨씬 좋은 판단이야. 내가 맡고 있는 학생들만 해도 벌써 다 연구직으로 갔단다. 네가 대학원을 가게 되면, 너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석•박 통합을 보장받을 것이며, 실적만 맞추면 당당히 연구원이 될 수 있어. 그렇게 된다면 그곳의 초목도 너의 입학을 반길 거야."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코시코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소곤소곤 상의를 한다.

처음에 말하던 교수가 다시 입을 연다.


"너의 심정도 잘 알겠어. 오랜 수험 생활에서, 항상 성실히 수업에 참여해 온 너의 태도와, 1.6의 내신에도 불구하고, 대입 성적치고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경희대의 결과를 받은 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단다. 나는 너의 실력을 탓하기보다도, 너의 성실성을 더 높이 평가해. 내가 권유하는 대학원과 경희대로 인한 일체의 불이익은 없을 것을 약속할게. 너는..."


"타오르는 자유."


옆에 앉은 포닥이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학생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다가가 서쪽 안암을 본다.


교수는 말없이 학생상담자료카드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학생의 카드를 꺼내본다. 그 카드에는 학생의 생기부와 내신 성적, 수능 성적이 적혀 있다.

교수가 창가에 서 있는 그 학생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너는 목표로 하는 학과가 어디니?"


"......"


"음, 사학과군."


교수는, 자리에서 생기부 자료와 과거 선배들의 반수 결과를 모은 자료를 뒤적이면서


"4.1이면 절평치고 어중간한 평점이야. 물론 따기 쉬운 과목이 어디 있겠니? 반수 실패를 해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이야기지만, 반수를 해 봐야 대학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잖니? 네가 1.6이며 생기부도 최저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은 알아. 수시 제도에서 누군가는 그걸로 고려대나 연세대, 어쩌면 서울대를 갔겠지.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억울함을 겪는 우리나라 입시 제도의 모순을 누가 부인..."


"나아가는 정의."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우리 학과의 소중한 제자가 재수...아니 반수로 고대 사학을 가겠다고 나서니, 교수로서 어찌 한마디 참고되는 이야기를 안 할 수 있겠니? 반수를 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생각해 보렴... 푸른 20대의 청춘이 반년 소모되고, 힘든 일과를 보내며 열심히 공부해도 반년간 투자한 시간의 가치는 잔인하게도 오로지 대입 하나만으로 평가되고...나이가 들어봐야 20대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잖니? 성실한 너를 아끼는 담임교수로서, 난 네가 20대의 한 학기를 대학 진학에 더 쏟기보다는, 경희대에서 너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구나. 차라리 계속 다니되 로스쿨에나 전문직을 준비하는 건 어떻겠니? 눈을 조금만 낮춘다면 충분히 여기에서도..."


"솟구치는 진리."


"너는 2-3학년이야 평균 1.37등급이었지만, 1학년에는 평균 2.23등급이었어. 마킹 실수를 했었는지, 긴장을 너무 많이 했었는지, 공부가 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한 현실은 성적표에 찍힌 숫자만을 보는 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ㅈ반고 문과에서 2.23등급이면 경희대는 커녕 건국대도 못 가는 성적이라고. 그런 네가 2-3학년을 채웠다 한들 공기부터 다른 고려대학교에서 쉬이 척하고 붙여줄 것 같느냐?"


"너 항상 여기에. 자유의 불을 밝히고, 정의의 길을 달리고, 진리의 샘을 지키느니."


"제발 현실 좀 직시하렴. 경희대학교는 서울에서는 인서울 중상위권이지만, 비수도권에는 너 말고 고등학생, 학부모, 반수생, N수생, 대학생이 경희대학교를 갈망하고 있단다. 일반고에서도 1.00을 찍지 못한 네가, 쉽게 고려대 합격을 쟁취할 수 있을 것 같니? 내가 가진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학교에서 지금까지 반수했던 학생은 10명 중 9명꼴로 모두 회기로 돌아왔단다. 나머지 1명은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거의 올1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엘리트였단다. 게다가 요즘처럼 수능이 어려운 기조라면 수능에서 성적을 보장하지 못한단다. 한 문제 차이로 전국에 있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희비가 엇갈리는 것을 알잖니. 너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다 수능 때 성적이 오를 거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수능 성적을 보면, 오히려 모의고사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다수이고, 오르는 경우가 소수란다. 수능 때의 긴장감도 이유지만, 그보다도 학교 밖에 있는 SKY 서성한의 반수생이 다수 유입되기 때문이지. 나는 이 연구실에 학부생의 원활한 인생 설계와 연구를 돕기 위해 있는 거란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 인생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거라."


"수준이 높을수록 학교에 불만이 많은 법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애써 3년동안 만든 자기의 대학을 없애버리겠니?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말이야. 올해 안에 고대에 못 간다면 끝이야. 고려대를 졸업한 지인들이 가끔씩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항상 속상함을 털어 놓고 간단다. 고려대를 가면 인생이 펼 줄 알았더니 막상 그런 것도 아니라고 말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지인들은 공부를 못 했던 분들이 아니야. 공부로는 날고 기었던 사람들이 대다수란다. 고려대에 간다고 쳐도, 문과가 얼마나 잔인한 곳인지는 너도 이미 취업시장을 보며 느끼지 않았니? 무엇보다도, 새내기와 4학년은 다르단다. 네가 그 취업이나 전문직이라는 소리 없는 전쟁에 고려대학교만 믿고 뛰어들겠다고..? 지금껏 많은 사람을 보아온 담임교수로서, 나는 너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극구 말리고 싶구나. 부디..."


"너의 젊음을 고대에 걸어라. 고대는 너에게 세계를 걸겠다."


담임은 연민에 찬 눈초리로 학생을 바라보며 말한다.


"고려대에 가려면 수능을 다시 응시해야 해.. 자료를 보니 너는 6모 국어도 1등급이고, 교육청 모의고사 때도 항상 3합 5를 받아 왔구나. 그래서 그런지, 너는 더욱 열심히 하면 수능 때 그대로 받는 것이 무난할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능에 응시하는 집단은 모의고사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지엽적인 문제에 예상 등급컷보다 높은 등급컷을 자랑하는 게 수능이야. 그리고 너처럼 더 높은 곳을 노리는 사람이 다수 응시하기에, 한 문제면 끝장이야. 사탐을 보렴. 지금 인생에서 도박을 걸 필요성이 있겠니?"


"민족고대 녹두문대 맹호사학"


교수는 손에 들었던 펜으로 테이블을 툭 치면서, 어느새 자리에 와서 상담 내용을 들은 포닥을 돌아본다.

포닥은 어깨를 추스르며 연구를 계속하겠지.


나오는 문 앞에서, 교수의 책상 위에 놓인 휴학서에 이름을 적고 문을 나서자, 그는 마치 재채기를 참았던 사람처럼 몸을 벌떡 뒤로 젖히면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찔끔 번지고, 침이 걸려서 캑캑거리면서도 그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



메인글 베이스로 변형하셨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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