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Debussy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5-20 08: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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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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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밤이나 낮이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우리라. 그러나 유정(兪政)아! 너무 슬퍼 마라. 너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느니라. 


이런 지비(紙碑)가 붙어 있는 책상 앞이 유정에게 있어서는 생사의 기로다. 이 칼날같이 선 한 지점에 그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면서 오직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울고 있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안개 속을 헤매던 내가 불현듯이 나를 위하여는 마코――두 갑, 그를 위하여는 배 십 전어치를 , 사가지고 여기 유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령 같은 풍모를 도회(韜晦)하기 위하여 장식된 무성한 화병에서까지 석탄산 내음새가 나는 것을 지각하였을 때는 나는 내가 무엇 하러 여기 왔나를 추억해 볼 기력조차도 없어진 뒤였다.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이상 형! 형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 ―― 겨우 ―― 오늘이야 ―― 겨우 ―― 인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 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십칠 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情死)――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그렇지만 나는 임종할 때 유언까지도 거짓말을 해줄 결심입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풀어헤치는 유정의 젖가슴은 초롱(草籠)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의 호흡이 서글프다.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유정은 운다. 울 수 있는 외의 그는 온갖 표정을 다 망각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유 형! 저는 내일 아침차로 동경 가겠습니다." 


"......" 


"또 뵈옵기 어려울걸요." 


"......" 


그를 찾은 것을 몇 번이고 후회하면서 나는 유정을 하직하였다. 거리는 늦었다. 방에서는 연이가 나 대신 내 밥상을 지키고 앉아서 아직도 수없이 지니고 있는 비밀을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었다. 내 손은 연이 뺨을 때리지는 않고 내일 아침을 위하여 짐을 꾸렸다. 

"연이! 연이는 야웅의 천재요. 나는 오늘 불우의 천재라는 것이 되려다가 그나마도 못 되고 도로 돌아왔소. 이렇게 이렇게! 응?" 


 

8 


나는 버티다 못해 조그만 종잇조각에다 이렇게 적어 그놈에게 주었다. 


"자네도 야웅의 천재인가? 암만해도 천재인가 싶으이. 나는 졌네. 이렇게 내가 먼저 지껄였다는 것부터가 패배를 의미하지." 


일고 휘장(一高徽章)이다. HANDSOME BOY――해협 오전 2시의 망토를 두르고 내 곁에 가 버티고 앉아서 동(動)치 않기를 한 시간 (이상?) 나는 그 동안 풍선처럼 잠자코 있었다. 온갖 재주를 다 피워서 이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천재로 하여금 먼저 입을 열도록 갈팡질팡했건만 급기야 나는 졌다. 지고 말았다. 


"당신의 텁석부리는 말을 연상시키는구려. 그러면 말아! 다락 같은 말아! 귀하는 점잖기도 하다 마는 또 귀하는 왜 그리 슬퍼 보이오? 네?" (이놈은 무례한 놈이다.) 


"슬퍼? 응――슬플밖에――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 ―― 만일 슬프지 않다면――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슬픈 포즈라도 해보여야지 ―― 왜 안 죽느냐고? 헤헹! 내게는 남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같이 그렇게 중속(衆俗)을 속여 주기만 하는 거야. 아― 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이 상접. 아야아야. 웃어야 할 터인데 근육이 없다. 울려야 근육이 없다. 나는 형해(形骸)다. 나――라는 정체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흔적일 따름이다." 


NOVA의 웨이트리스 나미코는 아부라에(油繪)라는 재주를 가진 노라의 따님 코론타이의 누이동 생이시다. 미술가 나미코 씨와 극작가 Y군은 4차원 세계의 테마를 불란서 말로 회화한다. 


불란서 말의 리듬은 C양의 언더 더 워치 강의처럼 애매하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그만 울어 버리 기로 했다. 눈물이 좔좔 쏟아진다. 나미코가 나를 달랜다. 


"너는 뭐냐? 나미코? 너는 엊저녁에 어떤 마치아이(待合)에서 방석을 베고 19분 동안――아니 아니 어떤 빌딩에서 아까 너는 걸상에 포개 앉았었느냐. 말해라――헤헤― 음벽정? N빌딩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의 사무실? (아― 이 주책없는 이상아 동경에는 그런 것은 없습네.) 계집의 얼굴이란 다마네기다. 암만 벗기어 보려무나. 마지막에 아주 없어질지언정 정체는 안 내놓느니." 


신주쿠의 오전 1시――나는 연애보다도 우선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9 


12월 23일 아침 나는 진보초 누옥(陋屋) 속에서 공복으로 하여 발열하였다. 발열로 하여 기침하 면서 두 벌 편지는 받았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로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정. 


이 편지 받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는 따뜻한 방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이가 기다리고 있 습니다. 연 서(書). 


이날 저녁에 부질없는 향수를 꾸짖는 것처럼 C양은 나에게 백국(白菊) 한 송이를 주었느니라. 그러나, 오전 1시 신주쿠역 폼에서 비칠거리는 이상의 옷깃에 백국은 간데없다. 어느 장화가 짓밟았을까. 그러나――검정 외투에 조화를 단, 댄서――한 사람. 나는 이국종 강아지올시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또 무슨 방석과 걸상의 비밀을 그 농화장(濃化粧) 그늘에 지니고 계시나이까? 


사람이――비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외다그려! 나를 좀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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