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Debussy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5-18 06: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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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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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2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앉아서 나는 듣는다. (12월 23일) 


"언더 더 워치―시계 아래서 말이에요, 파이브 타운스―다섯 개의 동리란 말이지요. 이 청년은 요 세상에서 담배를 제일 좋아합니다 ―― 기다랗게 꾸부러진 파이프에다가 향기가 아주 높은 담배를 피워 빽― 빽― 연기를 풍기고 앉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낙이었답니다." 


(내야말로 동경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 치밀을 때 저― 폐까지 쭉― 연기나 들이켜지 않고 이 발광할 것 같은 심정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 


"연애를 했어요! 고상한 취미――우아한 성격――이런 것이 좋았다는 여자의 유서예요――죽기는 왜 죽어 ―― 선생님――저 같으면 죽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있다지요. 그렇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나는 일찍이 어리석었더니라. 모르고 연(姸)이와 죽기를 약속했더니라. 죽도록 사랑했건만 면회가 끝난 뒤 대략 이십 분이나 삼십 분만 지나면 연이는 내가 '설마' 하고만 여기던 S의 품안에 있었다.) 


"그렇지만 선생님――그 남자의 성격이 참 좋아요. 담배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이 소설을 읽으면 그 남자의 음성이 꼭――웅얼웅얼 들려 오는 것 같아요. 이 남자가 같이 죽자면 그때 당해서는 또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저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사람이 정말 죽을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있다면 저도 그런 연애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러나 철부지 C양이여. 연이는 약속한 지 두 주일 되는 날 죽지 말고 우리 살자고 그럽디다. 속았다. 속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나는 어리석게도 살 수 있을 것을 믿었지. 그뿐인가. 연이는 나를 사랑하노라고까지.) 


"공과(功課)는 여기까지밖에 안 했어요 ―― 청년이 마지막에는――멀리 여행을 간다나 봐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여기는 동경이다. 나는 어쩔 작정으로 여기 왔나? 적빈(赤貧)이 여세(如洗)――콕토 가 그랬느니라――재주 없는 예술가야 부질없이 네 빈곤을 내세우지 말라고. 아― 내게 빈곤을 팔아먹는 재주 외에 무슨 기능이 남아 있누. 여기는 간다쿠 진보초(神田區 神保町), 내가 어려서 제전(帝展) 이과(二科)에 하가키 주문하던 바로 게가 예다. 나는 여기서 지금 앓는다.) 


"선생님! 이 여자를 좋아하십니까――좋아하시지요――좋아요――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는――남자는 행복되지요――네― 선생님――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이상(李箱) 턱에 입 언저리에 아― 수염이 숱하게도 났다. 좋게도 자랐다.) 


"선생님――뭘――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네― 담배가 다 탔는데――아이―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 눈을 좀――뜨세요.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네― 무슨 생각 그렇게 하셨나요." 


(아― 참 고운 목소리도 다 있지. 십 리나 먼――밖에서 들려 오는――값비싼 시계 소리처럼 부드럽고 정확하게 윤택이 있고――피아니시모――꿈인가. 한 시간 동안이나 나는 스토리보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한 시간같이 길었지만 십 분――나는 졸았나? 아니 나는 스토리를 다 외운다. 나는 자지 않았다. 그 흐르는 듯한 연연한 목소리가 내 감관(感官)을 얼싸 안고 목소리가 잤다.)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잔 것도 아니요 또 누웠던 것도 아니다. 


 

3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끄면 그만이지. 그러나 S는 껄껄――아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타이른다. 


"상(箱)! 연이와 헤어지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상이 연이와 부부? 라는 것이 내 눈에는 똑 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못 보겠네." 


"거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 


이 S는, 아니 연이는 일찍이 S의 것이었다. 오늘 나는 S와 더불어 담배를 피우면서 마주 앉아 담소할 수 있었다. 그러면 S와 나 두 사람은 친우였던가. 


"상! 자네「EPIGRAM」이라는 글 내 읽었지. 한 번――허허― 한 번. 상! 상의 서푼짜리 우월감이 내게는 우숴 죽겠다는 걸세. 한 번? 한 번――허허― 한 번." 


"그러면(나는 실신할 만치 놀란다) 한 번 이상――몇 번. S! 몇 번인가." 


"그저 한 번 이상이라고만 알아 두게나그려."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10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 꿈은 없다. (천사는――어디를 가도 천사는 없다. 천사들은 다 결혼해 버렸기 때문에다.) 23일 밤 열시부터 나는 가지가지 재주를 다 피워 가면서 연이를 고문했다. 


24일 동이 훤―하게 터올 때쯤에야 연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장구한 시간! 


"첫 번――말해라." 


"인천 어느 여관." 


"그건 안다. 둘째 번――말해라." 


"......" 


"말해라." 


"N빌딩 S의 사무실." 


"셋째 번――말해라." 


"......" 


"말해라." 


"동소문 밖 음벽정." 


"넷째 번――말해라." 


"......" 


"말해라." 


"......" 


"말해라." 


머리맡 책상 서랍 속에는 서슬이 퍼런 내 면도칼이 있다. 경동맥을 따면――요물은 선혈이 댓 줄기 뻗치듯 하면서 급사하리라. 그러나――나는 일찌감치 면도를 하고 손톱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예년 10월 24일경에는 사체가 며 칠 만이면 썩기 시작하는지 곰곰 생각하면서 모자를 쓰고 인사하듯 다시 벗어 들고 그리고 방――연이와 반년 침식을 같이 하던 냄새나는 방을 휘― 둘러 살피자니까 하나 사다 놓네 놓네 하고 기어이 뜻을 이루지 못한 금붕어도 ―― 이 방에는 가을이 이렇게 짙었건만 국화 한 송이 장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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