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Debussy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5-13 09: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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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생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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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어제 저녁 꿈에도 저는 선생님을 만나뵈었습니다. 꿈 가운데 선생님은 참 다정하십니다. 저를 어린애처럼 귀여워해 주십니다. 


그러나 백일(白日) 아래 표표(飄飄)하신 선생님은 저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비굴이라는 것이 무슨 빛으로 되어 있나 보시랴거든 선생님은 거울을 한번 보아 보십시오. 거기 비치는 선생님의 얼굴빛이 바로 비굴이라는 것의 빛입니다. 


헤어진 부인과 삼년을 동거하시는 동안에 너 가거라 소리를 한 마디도 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유일의 자만이십디다그려! 그렇게까지 선생님은 인정에 구구하신가요. 


R과도 깨끗이 헤어졌습니다. S와도 절연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된다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믿어 주시는 바지요? 다섯 달 동안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청절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최후까지 더럽히지 않은 것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저의 히멀건 살의 매력이 이렇게 다섯 달 동안이나 놀고 없는 것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이 아깝습니다. 저의 잔털 나스르르한 목, 영한 온도가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어! 저를 부르십시오. 저더러 영영 오라는 말을 안 하시는 것은 그것 역시 가신쩍 경우와 똑 같은 이론에서 나온 구구한 인생 변호의 치사스러운 수법이신가요? 


영원히 선생님 '한분'만을 사랑하지요. 어서 어서 저를 전적으로 선생님만의 것을 만들어 주십시오. 선생님의 '전용'이 되게 하십시오. 


제가 아주 어수룩한 줄 오산하고 계신 모양인데 오산 치고는 좀 어림없는 큰 오산이리다. 


네 딴은 제법 든든한 줄만 믿고 있는 네 그 안전지대라는 것을 너는 아마 하나 가진 모양인데 그까짓 것쯤 내 말 한 마디에 사태가 나고 말리라, 이렇게 일러 드리고 싶습니다. 또— 


예끼! 구역질 나는 인생 같으니 이러고도 싶습니다. 


3월 3일날 오후 두 시에 동소문(東小門) 버스 정류장(停留場) 앞으로 꼭 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 징벌을 안 받지 못하리다. 


만 19세 2개월을 맞이하는 


정희(貞姬) 올림 


이상(李箱) 선생님 께 

 
 

물론 이것은 죄다 거짓부렁이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용심법(用心法)이 특히 그 중에도 결미(結尾)의 비견할 데 없는 청초(淸楚)함이 장히 질풍신뢰를 품은 듯한 명문이다. 


나는 까무러칠 번하면서 혀를 내어둘렀다. 나는 깜빡 속기로 한다. 속고 만다. 


여기 이 이상(李箱) 선생님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나는 지난 밤 사이에 내 평생을 경력(經歷)했다. 나는 드디어 쭈굴쭈굴하게 노쇠해 버렸던 차에 아침(이 온 것)을 보고 이키! 남들이 보는 데서는 나는 가급적 어쭙지않게(잠을) 자야 되는 것이어늘, 하고 늘 이를 닦고 그리고는 도로 얼른 자 버릇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또 그럴 세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짐짓 기이하기도 해서 그러는지 경천동지의 육중한 경륜을 품은 사람인가 보다고들 속는다. 그러니까 고렇게 하는 것이 내 시시한 자세나마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의 비결이었다. 즉 나는 남들 좀 보라고 낮에 잔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고 흔희작약, 나는 개세(蓋世)의 경륜과 유서의 고민을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하여 바로 이발소로 갔다. 나는 여간 아니 호걸답게 입술에다 치분을 허옇게 묻혀가지고는 그 현란한 거울 앞에 가 앉아 이제 호화장려(豪華壯麗)하게 개막하려드는 내 종생을 유유(悠悠)히 즐기기로 거기 해당하게 내 맵시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위선 그 작소(鵲巢)라는 뇌명(雷名)까지 있는 봉발(蓬髮)을 썰어서 상고머리라는 것을 만들었다. 오각수는 깨끗이 도태(淘汰)해 버렸다. 귀를 우비고 코털을 다듬었다. 안마(按摩)도 했다. 그리고 비누 세수를 한 다음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니 품(品) 있는 데라고는 한 귀퉁이도 없어 보이는 듯하면서 또한 태생(胎生)을 어찌 어기리오, 좋도록 말해서 라파엘 전파 일원 같이 그렇게 청초한 백면서생이라고도 보아줄 수 있지 하고 실없이 제 얼굴을 미남자거니 고집하고 싶어 하는 구지레한 욕심을 내심 탄식하였다. 


아차! 나에게도 모자가 있다. 겨울내 꾸겨박질러 두었던 것을 부득부득 끄집어내어다 15분간 세탁소로 가지고 가서 멀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흰 바지저고리에 고동색 대님을 다 치고 차림차림이 제법 이색이 있다. 공단은 못되나마 능직 두루마기에 이만하면 고왕금래 모모(某某)한 천재의 풍모에 비겨도 조곰도 손색이 없으리라. 나는 내 그런 여간 이만저만 하지 않은 풍모를 더욱더욱 이만저만 하지 않게 모디파이어 하기 위하여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고다지 알맞은 단장을 하나 내 손에 쥐어주어야 할 것도 때마침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별 수 없이— 


오늘이 즉 3월 3일인 것이다. 


나는 점잖게 한 30분쯤 지각해서 동소문(東小門) 지정받은 자리에 도착하였다. 정희는 또 정희대로 아주 정희다웁게 한 30분쯤 일찍 와서 있다. 


정희의 입상은 제정 노서아쩍 우표 딱지처럼 적잖이 슬프다. 이것은 아직도 얼음을 품은 바람이 해토(解土)머리답게 싸늘해서 말하자면 정희의 모양을 얼마간 침통하게 해 보일 탓이렷다. 


나는 이런 경우에 천만(千萬) 뜻밖에도 눈물이 핑 눈에 그뜩 돌아야 하는 것이 꼭 맞는 원칙(原則)으로서의 의표(意表)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벅저벅 정희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들은 이 땅을 처음 찾아온 제비 한 쌍처럼 잘 앙증스럽게 만보하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도 나는 내 두루마기에 잡히는 주름살 하나에도 단장을 한번 휘저었는 곡절에도 세세히 조심한다. 나는 말하자면 내 우연한 종생을 깜쪽스럽도록 찬란하게 허식(虛飾)하기 위하여 내 박빙을 밟는 듯한 포즈를 아차 실수로 무너뜨리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굳게굳게 명(銘)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맨 처음 발언으로는 나는 어떤 기절처참(奇絶慘絶)한 경구(警句)를 내어놓아야 할 것인가, 이것 때문에 또 잠깐 머뭇머뭇 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대이고 거 어쩌면 그렇게 똑 제정 로서아쩍 우표 딱지 같이 초초(楚楚)하니 어쩌니 하는 수는 차마 없다. 


나는 선뜻 


'설마가 사람을 죽이느니.' 


하는 소리를 저 배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그런 까라앉은 목소리에 꽤 명료한 발음을 얹어서 정희 귀 가까이다 대이고 지껄여 버렸다. 이만하면 아마 그 경우의 최초의 발성으로는 무던히 성공한 편이리라. 뜻인즉, 네가 오라고 그랬다고 그렇게 내가 불쑥 올 줄은 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는 꼼꼼한 의도다. 


나는 아침 반찬으로 콩나물을 3전어치는 안 팔겠다는 것을 교묘히 무사히 3전어치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미끈한 쾌감을 맛본다. 내 딴은 다행히 노랑돈 한푼도 참 용하게 낭비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내 청천(晴天)에 벽력(霹靂)이 떨어진 것 같은 인사에 대하여 정희는 실로 대답이 없다. 이것은 참 큰일이다. 


아이들이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하고 노는 그런 암팡진 수단으로 그냥 단번에 나를 어지러뜨려서는 넘어뜨려버릴 작정인 모양이다. 


정말 그렇다면! 


이 상쾌한 정희의 혹호(確乎) 부동자세야말로 엔간치 않은 출품(出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내어놓은 바 살인촌철은 그만 즉석에서 분쇄되어 가엾은 불작(不作)으로 내려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나는 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손짓발짓을 한벌 해 보이고 이윽고 낙담하였다는 것을 표시하였다. 일이 여기 이른 바에는 내 포즈 여부(與否)가 문제 아니다. 표정도 인제 더 써먹을 것이 남아 있을 성싶지도 않고 해서 나는 겸연쩍게 안색을 좀 고쳐가지고 그리고 정희! 그럼 나는 가겠소, 하고 깍듯이 인사하고 그리고? 


나는 발길을 돌쳐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 파란만장의 생애가 자지레한 말 한 마디로 하여 그만 회신(灰燼)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나는 세상에도 참혹한 풍채 아래서 내 종생을 치룬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그럼 그럴 성싶기도 하게 단장도 한두 번 휘두르고 입도 좀 일기죽일기죽 해보기도 하고 하면서 행차하는 체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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