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Debussy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5-12 06: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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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생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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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侈奢)한 소녀는', '해동기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의 낙화(落花)지듯 좀 파래지면서', '박빙(薄氷)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운기를 품은 훈풍이 불어와서', '스커트', 아니 아니, '너무나.' 아니 아니, '좀' '슬퍼 보이는 홍발(紅髮)을 건드리면' 그만. 더 아니다. 나는 한마디 가련한 어휘를 첨가할 성의를 보이자. 


'나붓 나붓'. 


이만 하면 완비된 장치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의 서장을 꾸밀 그 소문 높은 산호편을 더 여실히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실로 나로서는 너무나 과람히 치사(侈奢)스럽고 어마어마한 세간살이를 장만한 것이다. 


그런데— 


혹 지나치지나 않았나. 천하에 형안이 없지 않으니까 너무 금칠을 아니 했다가는 서툴리 들킬 염려가 있다. 허나— 


그냥 어디 이대로 써〔用〕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 가을바람이 자못 소슬(한 내 구중중한 방에 홀로 누워 종생하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에 의하면 나는 추호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와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라는 것이다. 그렀건만 나는 확실히 노옹이다. 그날 하루 하루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랗다.'하는 엄청난 평생(平生)이다. 


나는 날마다 운명(殞命)하였다. 나는 자던 잠— 이 잠이야 말로 언제 시작한 잠이더냐.— 을 깨이면 내 통절한 생애가 개시되는데 청춘이 여지없이 탕진되는 것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웠지만 역력히 목도한다. 


나는 노래(老來)에 빈한한 식사를 한다. 12시간 이내에 종생을 맞이하고 그리고 할 수 없이 이리 궁리 저리 궁리 유언다운 어디 유실(遺失)되어 있지 않나 하고 찾고, 찾아서는 그 중 의젓스러운 놈으로 몇 추린다. 


그러나 고독한 만년 가운데 한 구의 에피그람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처참히 나는 물고하고 만다. 


일생의 하루— 


하루의 일생은 대체 (위선) 이렇게 해서 끝나고 끝나고 하는 것이었다. 


자― 보아라. 


이런 내 분장(粉裝)은 좀 과하게 치사스럽다는 느낌은 없을까 없지 않다. 


그러나 위풍당당 일세를 풍미할 만한 참신무비(斬新無比)한 햄릿(망언다사)을 하나 출세시키기 위하여는 이만한 출자는 아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나는 가을. 소녀는 해동기. 


어느 제나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즐거운 소꿉장난을 한번 해 보리까. 


나는 그해 봄에도— 


부질없는 세상이 스스러워서 상설(霜雪)같은 위엄을 갖춘 몸으로 한심한 불우의 일월(日月)을 맞고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문(美文), 미문, 애아(曖呀)! 미문. 


미문이라는 것은 저윽이 조처(措處)하기 위험한 수작이니라. 


나는 내 감상(感傷)의 꿀방구리 속에 청산(靑山) 가던 나비처럼 마취(痲醉) 혼사(昏死)하기 자칫 쉬운 것이다. 조심 조심 나는 내 맵시를 고쳐야 할 것을 안다. 


나는 그날 아침에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지 이를 닦으면서 내 작성 중에 있는 유서 때문에 끙 끙 앓았다. 


열세 벌의 유서가 거의 완성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을 집어내 보아도 다 같이 서른 여섯 살에 자수(自殊)한 어느 '천재'가 머리맡에 놓고 간 개세의 일품(逸品)의 아류에서 일보를 나서지 못했다. 내게 요만 재주 밖에는 없느냐는 것이 다시없이 분하고 억울한 사정(事情)이었고 또 초조의 근원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되 가장 고매한 얼굴은 지속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리고 계속하여 끙 끙 앓고 있노라니까 (나는 일시일각(一時一刻)을 허송하지는 않는다. 나는 없는 지혜를 끊치지 않고 쥐어 짠다) 속달 편지가 왔다. 소녀에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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