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cha Heifetz [870531]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2-04-27 08: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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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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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어서자 T씨가 들어왔다. 그는 나가려던 발길을 멈칫하였다. 형제의 시선은 마주친 채 잠시 동안 계속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T씨의 안면 전체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강한 술의 취기를 인식할 수 있었다. 


「T! 내 마음이 그르지 않은 것을 알아다고!」 


「하…… 하……」 


T씨는 그대로 얼마든지 웃고만 서 있었다. 몸의 땀내와 입의 술내를 맡을 수 없이 퍼뜨리면서! 


「T야…… 네가 내 말을 이렇게나 안 들을 것은 무엇이냐? T! 나의……」 


「자 이것을 좀 보시오! 형님! 이 팔뚝을!」 


「본다면!」 


「아직도 내 팔로 내가…… 하…… 굶어 죽을까봐 그리 근심이시오? 하……」 


T씨가 팔뚝을 걷어든 채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볼 때 그의 고개는 아니 수그러질 수 없었다. 


「T! 나는 지금 집으로 도로 가는 길이다―어쨌든 오늘 저녁에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여 보아라」 


아직도 초저녁 거리로 그가 나섰을 때에 그는 T씨의 아직도 선웃음 소리를 그의 뒤에서 들을 수 있었다. 걷는 사이에 그는 무엇인가 이제껏 걸어오던 길에서 어떤 다른 터진 길로 나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감을 느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그가 새로 나온 그 터진 길이라는 것도 종래의 길과는 그다지 다름없는 협착하고 괴벽한 길이라는 것 같은 느낌도 느껴졌다. 


C라는 간호부에게 대하여 그는 처음부터 적지않게 마음을 이끌리어 왔다. 그가 C간호부에 대하여 소위 호기심이라는 것은 결코 이성적 그 어떤 것이 아닐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C간호부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이상한 기분이 날 적도 있었다. 


「도무지 어디서―본 듯해―」 


C는 일상 그와 가까이 있었다. 일상에 말이 없어 침울한 기분의 여자였다. 언제나 축축히 젖은 것 같은 눈이 아래로 깔리어서는 무엇인가 깊은 명상에 잠기어 있었다. 그리다가는 묵묵히 잡고만 있던 일거리도 한데로 제쳐놓고는 곱게 살 속으로 분이 스며들어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우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더욱 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울 때, 


「어디서 본 듯해― 도무지」 


생각날 듯 날 듯하면서도 종시 그에게는 생각나지 아니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생소한 C가 그에게 많은 친밀의 뜻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같았으나 각별히 간절한 회화 한 번이라도 바꾸어 본 일은 없었다. 늘 그의 앞에서 가장 종순하고 머리 숙이고 일하고 있었다. 


첫여름의 낮은 땅 위의 초목들까지도 피곤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종횡으로 불규칙하게 얽히운 길들을 축축한 생기라고는 조곰도 찾아 볼 수는 없고 메마른 먼지가 ‘포플라’ 머리의 흔들릴 적마다 일고 일고 하는 것이 마치 극도로 쇠약한 병자가 병상 위세서 가끔 토하는 습기 없는 입김과도 같이 보였다. 고색창연한 늙은 도시(都市)의 부정연한 건축물 사이에 소밀도(疎密度)로 낑기어 있는 공기까지도 졸음 졸고 있는 것같이 벙―하니 보였다. C는 건너편 책상에 의지하여 무슨 책인지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는 신문조각을 뒤적거리다 급기 졸고 앉아 있었다. 피곤해빠진 인생을 생각할 때 그의 졸음 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좋으십니까? 아― 저도!」 


그 목소리도 역시 피곤한 한 인생의 졸음 조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최면술사가 어슴푸렷한 푸른 전등 밑에서 한 사람에게 무슨 한 마디이고를 무한히 시진하도록 ‘리피트’시키고 있는 것과도 같이 꿈속같이 고요하고 어슴푸레하였다. 


「선생님! 선생님! 저도 한때는 신이라는 것을 믿었던 일이 있답니다!」 


「…………」 


「선생님! 신은 있는 것입니까?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있어도 관계치 않는 것입니까?」 


「……흥……C씨!…… 소설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여기서도! 그들은 신을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려! 한때의 저와 같이!」 


「…………」 


또한 졸음 조는 것 같은 침묵이 그 사이에 한참이나 놓여 있었다. ‘앵도지리―뻐찌―’ 어린 장사의 목소리가 자꾸만― 그들의 쉬이려는 귀를 귀찮게 굴고 있었다. 


「선생님! 저를 선생님의 곁에다― 제가 있고 싶어하는 때까지 두어 주시지요」 


「그것은? 그러면? 그렇다면?」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전연 모르셔도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들려는 잠은 일시에 냉수 끼얹은 것같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즉! 안다면!」 


「선생님! 팔년!― 어쨌든 그전― 명고옥의 생활을 기억하십니까?」 


「명고옥? ― 하―명고옥?」 


「선생님! 제가― 죽은 ××의 아우올습니다」 


「응! ××? 그 ―아!」 


고향을 떠나 두 형매는 오랜동안 유랑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죽음으로만 다가가는 그들을 찾아오는 극도의 곤궁은 과연 그들에게는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한 바른[正] 삶이었다. 차차 움돋기 시작하는 세상에 대한 조소(嘲笑)와 증오는 드디어 그들의 인간성까지도 변형시키어 놓지 않고는 마지 아니하였다. ××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가 이십이 조곰 넘었을 때 그는 극도의 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남의 대야 한 개를 훔친 일이 있었다. 물론 일순간 후에는 무한히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나 한 번 엎질러 놓은 물은 다시 어찌할 수도 없었다. 첫째로 법의 눈을 피한다느니보다도 여지껏의 자기를 깨끗이 장사지낸다는 의미 아래에서 자기의 본명을 버린 다음 지금의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청정된 새로운 생활을 영위(營爲)하여 나아가기 위하여 어린 누이의 C를 이끌고 그의 발길이 돌아 들어선다는 곳이 곧 명고옥―X―그냥 삼년 외국생활을 겪어 보던 그 식당이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이 두 신생에 발길 들이어 놓은 인간들은 곧 가장 친밀한 우인이 되었다. 


「참회! 자기가 자기의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면 그는 그의 지은 죄에 대하여 속죄받을 수 있을까?」 


그는 ××로부터 일상에 이러한 말을 침울한 얼굴로 하고는 하는 것을 들었다. 


「만인의 신은 없다. 그러나 자기의 신은 있다」 


그는 늘 이러한 대답을 하여 왔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 대야를 가지고 그 주인 앞에 엎드리어 울며 사죄한다면 그 주인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신까지도 나를 용서할 것인가」 


어느 밤에 ××는 자기가 도적하였었다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는 대야를 한 개 사가지고 돌아온 일까지도 있었다. ××의 얼굴에는 취소할 수 없는 어둔 구름이 가득히 끼어 있는 것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이 상처를 두고두고 앓는 것보다는― X! 내일은 내가 그 주인을 찾아가겠소. 그리고는 그 앞에서 울어 보겠소?」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를 말리었다. 


「이왕 이처럼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놓은 이상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옛날 그 죄악의 속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참회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순간에 벌써 모든 것으로부터 용서받았어! 지난날을 추억하느니보다는 새 생활을 근심할 것이야!」 


××의 친구 중에 A라는 대학생이 있었다. C는 A에게 부탁되어 있었다. A는 아직도 나어린 C였으나 은근히 장래의 자기의 아내 만들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C도 A를 극히 따르고 존경하여 인륜의 깊은 정의를 맺고 있었다. 


늦은 가을 하늘이 맑게 개인 어느 날 ××와 A는 엽총(獵銃)을 어깨에―즐거운 수렵의 하루를 어느 깊은 산중에서 같이 보내게 되었다. 운명은 악희라고만은 보아 버릴 수 없는 악희를 감히 시작하였으니 A의 겨냥대인 탄환은 ××의 급처에 명중하고 말았다. 모든 일은 꿈이 아니었다. 기막힌 현실일 뿐이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엄연한 과거였다. A는 며칠의 유치장 생활을 한 다음 머리 깎은 채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춘 후 이 세상에서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그의 자취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일시에 두 사람을 잃어버린 C는 A가 우편으로 보내 준 얼마의 돈을 수중에 한 다음 그대로 넓은 벌판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동안 칠년―팔년의 저의 삶에 대하여서는 어떤 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까지 이야기한 C의 눈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분먹은 뺨에 가느다란 두 줄의 길을 내어놓고까지 있었다. 


「제가 선생님을 뵈옵기는 오라버님을 뵈오러 갔을 때 몇 번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도 이상히 선생님의 얼굴만은 저의 기억에 가장 인상깊은 그이였나 보아요!」 


이곳까지 들은 그는 여지껏 꼼짝할 수도 없이 막히었던 그의 호흡을 비로소 회복한 듯이 길다란 심호흡을 한 번 쉬었다. 


「C씨― 그래 그 A씨는 그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셨소?」 


「선생님! 제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천하를 헤매이는 것도 A씨를 찾아보겠다는 일념입니다― A씨는 벌써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오늘― 돌아가신 오라버님의 기념처럼 X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모시게 되니― 선생님 아무쪼록 죽은 오라버님을 생각하시고 저를 선생님 곁에 제가 싫증나는 날까지 두어 주세요. 제가 싫증이 났을 때에는 또―선생님, 가엾은 이 새[鳥]를 저 가고 싶은 데로 가게 내버려 두어 두세요. 저는……」 


수그러지는 고개에 두 손이 올라가 가리워질 때에 


「도무지 어디서 본 듯해!」 


그 기억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명고옥에서의 기억은 아니었고 분명히 다른 어느 곳에서의 기억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시 그의 기억에 떠올라오지는 아니하였다. 


「선생님! A씨나 오라버님이나―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저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신을 믿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의 존재 커녕은 신의 존재의 가능성까지도 의심합니다」 


「만인을 위한 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한 사람의 신은 누구나 있습니다」 


창밖의 길 먼지 속에서는 구세군 행려도의 복음과 찬미의 소리가 가장 저음으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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