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870531]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2-04-19 09: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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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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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에게 보내는 편지(六信) 


두 달! 그것은 무궁한 우주의 연령(年齡)으로 볼 때에 얼마나 짧은 것일까? 그러나 자네와 나 사이에 가로질렸던 그 두달이야말로 나는 자네의 죽음가지도 우려하고 자네는 나의 죽음까지도 우려하였음직한 추측이 오측(誤測)이 아닐 것이 분명할만치 그렇게도 초조와 근심에 넘치는 기―←고 긴 두 달이 아니었겠나. 자네와 나의 그 우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며 자네의 틀림없는 건강을 믿는 것과 같이 나는 다시없는 건강의 주인으로서 나의 경력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밤과 낮으로 힘차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M군! 나의 이 끊임없는 건강을 자네에게 전하는 기쁨과 아울러 머지 아니하여 우리 두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만나겠다는 기쁨을 또한 전하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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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말이나 지금쯤 창으로 노련(老鍊)한 한 사람의 의학사(醫學士)로 완성되어 있겠지. 그 노련한 의학사를 멀리 떨어져 나의 요즈음 열심히 하여 오던 의학의 공부가 지금에는 겨우 얼간 의사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그 무슨 희극적 대조이겠나 이것은 이곳에 친구의 직접의 원조도 원조이겠지만은 또 한편으로 멀리 있는 자네의 나에게 대하여 주는 끊임없는 사랑의 덕이 그 대부분이겠다고 믿으며 도한 자네가 더 한층이나 반가와할 줄 믿는 소식이겠다고도 믿는 것일세. 내가 고국에 돌아간 다음에는 자네는 나의 이 약한 손을 이끌어 그 길을 함께 걸어 주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주기를 바라며 마지않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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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꿈에만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고 보니 감개무량하여 나의 가슴을 어지럽게 하네. 십유여 년의 기나긴 방랑생활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한 분의 어머니를 잃었네. 그리고 절뚝발이가 되었네. 글 한 자 못 배웠네. 돈 한푼 못 벌었네. 사람다운 일 하나 못 하여 놓았네. 오직 누추한 꿈 속에서 나의 몸서리칠 청춘을 일생의 중요한 부분을 삭제당하기를 그저 달게 받아왔을 따름일세. 차인잔고(差引殘高)가 무엇인가 무슨 낯으로 고향 땅을 밟으며 무슨 낯으로 형제의 낯을 대하며 무슨 낯으로 고향 친구의 낯을 대할 것인가? 오직 회한(悔恨) 차인잔고가 있다고 하면 오직 이 회한의 한 뭉텅이가 있을 따름이 아니겠나?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나는 가벼운 한숨으로써 나의 괴로운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니 그렇게 부끄러워야만 할 고향땅에는 지금쯤은 나의 얼굴, 아니 나의 이름이나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한 사람조차도 있지 아니할 것일 뿐이랴. 그 곳에는 이 인생의 패배자인 나를 마음으로써 반가이 맞아줄 자네 M군이 있을 것이요, 육친의 형제 T가 있을 것이므로일세. 이 기쁨으로 나는 나의 마음에 용기를 내이게 하여 몽매에도 그리한 고향의 흙을 밟으려 하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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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삼년 동안이나 마음과 몸의 안정을 가지고 머물러 있는 이곳의 주인은 내가 자네와 작별한 후에 자네에게 주던 이 만큼의 우정을 아끼지 아니한 그렇게 친한 친구가 되어 있다는 말을 자네에게 전한 것을 자네는 잊지 아니하였을 줄 믿네. 피차에 흉금을 놓은 두 사람은 주객(主客)의 굴레를 일찍이 벗어난 그리하여 외로운 그와 외로운 나는 적적(비록 사람은 많으나)한 이 집안에 단 두 사람의 가족이 되었네. 이렇게 그에게 그의 가족이 없는 것은 물론이나 이만한 여관 외에 처처에 상당한 건물들을 그의 소유로 가지고 있는 꽤 있는 그일세. 


나로서 들어 아는 바 그의 과거가 비풍참우(悲風慘雨)의 혈사를 이곳에 나열하면 무엇 하겠나마는 과연 그는 문자대로의 고독한 낭인(浪人)일세. 그러나 그의 친구들의 간곡한 권고와 때로는 나의 마음으로의 권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아내를 취(聚)하지 아니하는 것일세. 


「돈도 그만큼 모았고 나이도 저만큼 되었으니 장차의 길고 긴 노후(老後)의 날을 의지할 신변의 고적을 위로할 해로가 있어야 아니하겠소」 


「하 그것은 전혀 내 마음을 몰라 주는 말이오」 


일상에 내가 나의 객관에 고적을 그에게 하소연할 때면 그는 도리어 나를 부러워하며 자기 신변의 고적과 공허를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일세.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안해를 얻지 아니하겠다 하며 그렇다고 허튼 여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하는 일도 결코 없는 것일세. 


「그러면 그가 여자에 대하여 무슨 갖지 못할 깊은 원한이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선입관념(先入觀念)을 가진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그는 남자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친절하게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냉정하기 짝이 없는 것일세. 예(例)를 들면 이 집 여중(女中)들에게 하는 그의 태도는 학대, 냉정, 잔인, 그것일세. 


나는 때로 


「너무 그러지 마오, 가엾으니」 


「여자니깐」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네. 그의 이 수수께끼의 대답은 나의 의아(疑訝)를 점점 깊게만 하는 것이었네. 하루는 조용한 밤 두 사람은 또한 떫은 차를 마셔가며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그 끝에 


「여자에 관련된 남에게 말 못할 무슨 비밀의 과거가 있소?」 


「있소! 있되 깊소!」 


「내게 들려 줄 수 없소?」 


「그것은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오. 오직 신(神)이 그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어야만 할 것이오. 그것은 내가 눈을 감고 내 그림자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사라져야만 할 따름이오」 


나는 물론 그에게 질기게 더 묻지 아니하였네. 그의 그림자와 함께 사라질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쾌활한 기상의 주인인 그는 또한 남다른 개성의 소유자인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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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보다 십여세(十餘歲) 맏일세. 그의 나이에 겨누어 너무 과하다 할만치 많이 난 그의 흰 머리털(白髮)은 나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네. 또한 동시에 그의 풍파 많은 과거를 웅변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같으니 그와 같은 그가 나를 사귀어 주기를 동년배의 터놓은 사이의 우의(友誼)로써 하여 주니 내가 나의 방랑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나의 ‘희로애락’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겠나? 그와 나는 구구한, 그야말로 경제문제(經濟問題)를 벗어난 가족―그가 지금에 경영하고 있는 여관(旅館)은 그와 내가 주객의 사이는커녕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차라리 어떤 때에는 내가 주인 노릇을 하게금 되는 말하자면 공동 경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그와 나 사이인 것일세. 그의 장부(帳簿)는 나의 장부이었고, 그의 금고(金庫)는 나의 금고이었고, 그의 열쇠는 나의 열쇠이었고, 그의 이익과 손실(利益損失)은 나의 이익과 손실이었고, 그의 채권과 채무(債權債務)는 나의 채권과 채무인 것이었네. 그와 나의 모―든 행동은 그와 내가 목적을 같이 한 방향을 같이 한 그와 나의 행동들이었네. 참으로 그와 내가 서로 믿음은 마치 한 들보를 떠받치고 있는 양편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믿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사이도 같은 것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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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기쁜 소식만을 나열하고 있던 나는 지금 돌연히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자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조우(遭遇)된 지 오래인 것을 말하네. 나와 만난 후 삼년에 가까운 동안뿐 아니라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이전에도 몸살이나 감기 한 번도 앓아 본 적이 없는 퍽 건강한 몸의 주인이던 그가 졸지에 이렇게 쓰러졌다는 것은 그와 오랫동안 같이 있던 나로서는 더욱이나 의외인 것이었네. 한 이삼일을 앓는 동안에는 신열이 좀 있다 하더니 내가 옆에 앉아 있는 앞에서 고요히 잠자는 듯이 갔네. 


「사람 없는 벌판에서 별(星)을 쳐다보며 죽을 줄 안 내 몸이 오늘 이렇게 편안한 자리에 누워서 당신의 서러운 간호를 받아가며 세상을 떠나니 기쁘오. 당신의 은혜는 명도에 가서 반드시 갚을 것을 약속하오―이 집과 내 가진 물건의 얼마 안되는 것을 당신에게 맡기기로 수속까지 다 되어 있으니 가는 사람의 마음이라 가엾이 생각하여 맡아 주기를 바라고 아무쪼록 그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형제 친구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 주기를 바라오. 내가 이렇게 하잘 것 없이 갈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러나 그것도 다― 내가 나의 과거에 받은 그 뼈살에 지나치는 고생의 열매가 도진 때문인 줄 아오. 나를 보내는 그대도 외롭겠소마는 그대를 두고 가는 나는 사바(裟婆)에 살아 꿈즉이던 날들보다도 한층이나 외로울 것 같소!」 


이렇게 쓰디 쓴 몇 마디를 남겨 놓고 그는 갔네. 그후 그의 장사도 치른 지 며칠 째 되던 날, 나는 그의 일상 쓰던 책상 속에서 위의 말들과 같은 의미의 유서(遺書), 그리고 문서들을 찾아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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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것이 나에게 기쁜 일일까 그렇지 않으면 슬픈 일일까 나는 그 어느 것이라고도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일세. 


내가 그의 생전에 그와 내가 주고받던 친교를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나에게 무한히 슬픈 일이 아니겠나마는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던 날부터 적빈에만 지질리워 가며 살아온 내가 비록 남에게는 얼마 안되게 보일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나의 일생에 상상도 하여 보지도 못할만치의 거대한 재산을 얻은 것이 어찌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러한 나의 생각은 세상을 떠난 그를 생각하기만 하는 데에서도 더없을 양심의 가책을 아니 받는 것도 아니겠으나 그러나 위의 말한 것은 나의 양심의 속임 없는 속삭임인 것을 어찌 하겠나. 


「어째서 그가 이것을 나에게 물려 줄까」 


「죽은 그의 이름으로 사회업에 기부할까」 


이러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의 머리에 지나가고 지나오고 한 것은 또한 내가 나의 마음을 속이는 말이겠나? 그러나 물론 전에도 느끼지 아니한 바는 아니나 차차 나이 들고 체력이 감퇴되고 원기가 좌절됨을 따라서 이 몸의 주위의 공허가 역력히 발견되고 청운(靑雲)의 젊은 뜻도 차차 주름살이 잡히기를 시작하여 한낱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한 낱 이 몸의 쓸쓸한 느낌만이 나날이 커가는 것일세. 그리하여 어서 바삐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친구와 얼싸안기 원하며 그립던 형제와 섞이어 가며 몇 날 남지 아니한 나의 여생(餘生)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좀더 기쁨과 웃음과 안일한 가운데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날이 가면 갈수록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층 더하여 가는 것일세. 내가 의학공부를 시작한 것도 전전푼의 돈이나마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가엾은 짓들이었네. 


사회사업에 기부할 생각보다도 내가 가질 생각이 더 컸던 나는 드디어 그 가운데의 일부를 헤치어 생전 그에게 부수(附隋)되어 있던 용인(庸人) 여중(女中)들과 얼마 아니되는 채무를 처치한 다음 나머지의 전부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였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으로부터는 단언커니와 나의 일생에 들어본 적이 없던 비난의 말까지 들었네. 


「돈! 재물! 이것 때문에 그의 인간성(人間性)이 이렇게도 더럽게 변하고 말다니! 죽은 그는 나를 향하여 얼마나 조소할 것이며 침 배앝을 것이냐」 


새삼스러이 찌들고 까부러진 이 몸의 하잘 것 없음을 경멸하여 연민하였네. 그러면서도 


「이것도 다― 여태껏 나를 붙들어 매고 그는 적빈 때문이 아니냐」 


이렇게 자기변명의 길도 찾아보면서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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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잃은 슬픔은 어느 결에 사라졌는가 지금에 나의 가슴은 고향 땅을 밟을 기쁨 친구를 만날 기쁨 형제를 만날 기쁨 이러한 가지의 기쁨들로 꽉 차 있네. 놀라거니와 나의 일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면서라도 최근 며칠 동안만큼 기뻤던 날이 있었던가를 의심하네. 


아― 이것을 기쁨이라고 나는 자네에게 전하는 것일세 그려. 눈물이 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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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일상 나의 조카 업의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아니하여 왔지. 최근에 자네의 편지에 이 업에 대한 아무런 말도 잘 볼 수 없음은 무슨 일일까, 하여간 젖 먹던, 코 흘리던 그 업이를 보아 버리고 방랑생활 십유여 년 오늘날 그 업이 재질의 풍부한 생래의 영리한 업이로 자라났다 하니 우리 집안을 위하여서나 일상에 적빈에 우는 T 자신을 위하여서나 더없이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감개무량하네. 또한 미구에 만나 볼 기쁨과 아울러 이 미지수의 조카 업이에 대하여 많은 촉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세. 


M군! 나는 아무쪼록 빨리 서둘러서 어서 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차리려 하거니와 이곳에서 처치해야만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해서 아직도 이곳에 여러 날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형편이나 될 수만 있으면 세전(歲前)에 고향에 돌아가 그립던 형제와 친구와 함께 즐거운 가운데에서 오는 새해를 맞이하려 하네. 어서 돌아가서 지나간 옛날을 추억도 하여 보며 그립던 회포를 풀어도 보아야 할 터인데! 


일기 추운데 더욱더욱 건강에 주의하기를 바라며 T에게도 불일간 내가 직접 편지하려고도 하거니와 자네도 바쁜 몸이지만 한 번 찾아가서 이 소식을 전하여 주기를 바라네. 자―그러면 만나는 날 그때까지 평안히― X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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