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초등부터 주저리주저리 쓰려다가 때려치고 핵심만 씁니다 ^^
지박령 아니니깐 지박령이냐고 묻지좀마세요 ^^
1. 2013.03 ~ 2014.02
고3때 난 미친듯이 공부했다.
일반고 2점 초반의 내신을 가진 나는 일찌감치 정시몰빵을 했다
내 꿈은 검사였고 내 목표는 최소 중경외시였다
정말 미친듯이 했다. 어느정도였냐면
고3때 수행평가로 수학문제 1000문제를 공책에 그대로 쓴 다음 풀어오는 것이 있었다. 난 그것을 3일만에 했다.
밤에는 시침이 두 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수학은 쏀과 자이스토리 를 3번 이상 돌려보았고, 영어는 역대 존재하는 사설, 교육청, 평가원, 그 외 이름없는 출판사의 모의고사를 전부다 풀었다. 감히 말하지만 시중에있는 영어문제 중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이때는 14년도 이야기고, 영어B형이 생긴 해다. 그렇기에 내가 영어를 이렇게나 열심히 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탐구는 6월까지 보지 않았고, 6월 전까지 수학과 영어를 고정100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영어가 점진적으로 올랐음에 반해 수학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나의 6평 모의고사 등급은 국수영 223 이었다.
문과에서 수학100은 기본이어야 한다. 난 아무리 해도 점수가 오르지 않는 수학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어는 거의 보지 않았고 탐구는 9모평을 볼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미친듯이 공부한 수학은 수능날까지조차 오르지 않았다. 국어는 젼향력에서 한참 해맸고, 수학은 자잘한 실수가 발생했다. 영어는 듣기에서 한 문제 틀렸다. 내 대망의 첫 수능 성적표는 33134였다.
수시에 쓴 논술전형 5개 중 3개가 최저조차 맞추지 못했다. 나머지 2개는 수리논술에서 망쳤다. 나는 6불합을 받았다.
부모님은 나의 재수를 반대하셨다. 난 그들의 신뢰를 잃은지 오래였다. 그들은 나를 성적표로만 판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난 억울했다
원서 사이트에 점수를 입력했다. 집 근처 국립대조차 10점이 모자랐다. 가능성은 10% 이하라고 나왔다.
그냥 썼다. 가 나군 전부 지거국 썼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장학금을 받고 합격통보를 받았다. -_-
부모님은 마지막에서야 재수를 허락하셨지만, 공부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나는 입학을 선택했다.
2. 2014.03 ~ 2014.06
처음부터 반수 할 생각은 없었다.
난 동기들과 어울렸고,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내가 다녔던 과는 로스쿨 특성학과였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거국의 상위과는 정말 특이한 곳이다. 최초 입결은 건동홍과 겹치며, 중경외시 성적이 됨에도 이곳으로 온 사람도 적지않다. 심지어 어떤 선배는 스카이 미만 동급! 을 외치며, 서성한 성적임에도 지거국으로 왔다고 한다. 물론 문닫고 들어온 사람의 성적은 그에 훨씬 못미치지만. 그렇기에 보통 중경외시 이상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에 모자라는 성적을 받았을 때 오는 곳이 바로 지거국 상위과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의고사를 얼마나 잘봤었는지 자랑했고 수능은 얼마나 못봤는지를 푸념했다. 그들은 지거국 졸업장을 받기엔 과분한 인재들이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동기들은 날 보고 '너같이 똑똑한 아이가 왜 이곳에 있냐'라는 반응을 보였고, 난 동기들에게 전교에서 세손가락 안에 들던 리즈시절을 떠벌리고 다녔다. 선배들, 심지어 교수님들조차도 나의 총명함을 알아보았다. 나는 이곳에 과분하디 과분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현실은 지거국 재학생이었다. 나는 매일아침 그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내가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 했다. 매일 보던 그 정문이 내가 다니는 학교의 입구라는걸 믿을 수 없었다.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다니는 대학 이름을 말할 때마다 자존심은 심하게 구겨졌고, 망가졌다. 내 내면은 점점 썩어들어갔다.
썩어들어간 내 내면을 계속해서 찌르는 사람은 나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명문대에 입학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를 1 8년동안 참았지만, 그녀의 인내심도 이젠 바닥이 난 듯 했다. 그녀는 집에서 통학하는 나와 수시로 부딪혔고, 일주일에 한 - 두번씩 별 것도 아닌 꼬투리를 잡아 나와 싸웠다. 그 중에는 깨진 안경과 깨진 스마트폰, 산산조각난 베란다 통유리창, 박살난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집안 꼴이 엉망이었다. 착하고 성실했던 모범생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틈만 나면 가출하는 청소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심지어 내가 다니는 1학기동안 '대학에서 열심히 하면 되지'라는 생각은 눈녹듯이 사라졌다. 우리 학과는 로스쿨특성학과임에도 한 해에 겨우 1~2명이 로스쿨을 가는 수준.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학벌의 벽은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사의 꿈을 고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결정해야 했다. 꿈과 대학, 둘 중 하나를 바꿔야 했다. 난 후자를 선택했다.
3. 2014. 07 ~ 2014. 11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1.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할 것
2. 독학으로 공부하는 곳일 것
내가 등록한 곳은 경기도의 어느 시골에 있는 기숙학원이었다.
주변에는 산과 나무 뿐, 시내로 나가려면 차타고 10분이상 가야했다. 그곳에서 난 현역 때의 나를 천천히 곱씹었다.
충분한 잠을 잘 것.
매일매일 새벽 2시가 되도록 공부하는게 문제 될건 없었다. 다만 낮에 학교에서 조는 것이 문제였다.
사실 나는 2시까지 공부하면 다음 날 어김없이 학교에서 졸곤 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하루에 4시간 씩 자면서 낮에 졸지 않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때문에 나는 반수하는 동안 매일 8시간 씩, 주말에는 12시간 가까이 잠을 잤다.
대신 낮에는 한순간도 졸지 않았다. 덕분에 12시간 가까이 되는 자습시간동안 쉬지않고 집중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수시-논술전형을 쓰지 않았다.
사실 누구라도 수시 원서 시즌이 되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논술전형이라도 넣게 된다. 이게 접수하고 떙이면 상관이 없지만, 접수할 때 까지 어디 쓸까 부터 시작해서 실시간 경쟁률을 새로고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 공부할 때 수시 최저만 맞추자 ! 라는 느슨한 생각을 갖기 십상이다. 때문에 나는 수시 원서 6번의 기회 중 어느하나도 접수하지 않았다.
재수할 때는 '절박함'을 가져야 한다. 반수생은 더더욱 그렇다. 마치 배수진을 친다는 심정으로, 수능망치면 끝이라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원래 대학에 복학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나에게 수능을 망친다는 것은 꿈을 포기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꿈을 포기한 나의 삶은 의미가 없었다.
현역 때 영어를 완성한 나는 국어와 수학, 탐구에 전념했다. 더욱이 15학년도는 영어 절대평가 예고로 인해 영어가 말도안되게 쉬워졌다. 영어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먼저 국어는 매일매일 모의고사를 1회씩 풀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대략 D-130정도 였다. 나는 역대 교육청모의고사를 70개정도 미리 준비해놓고 매일 8시 40분에 맞춰서 하루에 1회씩 풀었다. 평가원 모의고사는 수능을 앞두고 실전감각을 끌어올릴 때 쓰기위해 일부러 풀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전에는 LEET를 한지문씩 풀었다.
수학. 내가 현역 때 죽어라 했음에도 올리지 못한 게 바로 수학이었다. 나는 똑똑했다. 나의 사고 수준은 분명 4점짜리를 충분히 풀 정도라고 믿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개념!
대머리 선생은 개념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했다. 나는 그 사람의 강좌를 받아 개념 부분만 반복해서 들었다. 하루종일 인강만 들을 경우 이틀이면 한바퀴가 끝났다. (하루 수1 하루 미적분.통계) 수능 볼 때까지 대략 5~6바퀴 정도 돌려봤다.
이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다. 개념을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오개념이 많았다. 학교선생님이나 과외 선생님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정확한 개념을 그제서야 제대로 배웠다. 그동안 내가 헛공부를 했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탐구는 나의 가장 큰 허물 중 하나였다. 확실히 나는 탐구와 맞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현역때도 적지않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국영수에 비해 현저히 낮은 등급을 맞던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그것이 '실전 경험 부족'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영수는 모의고사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실전경험'이 풍부했지만 탐구는 '개념만 알면 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어떤 문제던지 수능시험장에서 풀면 긴장이 많이 되는 법이다. 더군다나 탐구는 제한시간이 30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타 과목보다 긴장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사회문화 표풀이같은 경우 긴장감의 유무는 큰 차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 기출중심으로 시간재고 푸는 연습을 많이했고 덕분에 고정 50까진 아니더라도 1등급은 안심하고 맞을 정도가 되었다.
영어는 긴말 안하겠다. 현역 때 이미 완성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반수하는 5개월동안 푼 수십번의 모의고사 중 100점이 아닌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게다가 난 대학다니는 동안 고3 최상위권 영어과외를 했을 정도니까말이다.
당시 생활에 대해 잠깐 말해주자면, 6시 30분 기상, 8시~12시 자습, 12시~6시 자습, 6시~10시 자습이었다. 희망자에 한해 11시까지 야간자습을 실시했지만 난 참여하지 않았다. 밥먹는 시간은 항상 10분이내였다는걸 감안했을 때 대략 13시간동안 최고 수준의 집중력으로 자습만 했다. (독학학원이었기에 수업은 없었다.) 또 주변사람들하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의 유일한 말상대는 자기 전에 만나는 룸메이트 두명뿐이었다. 휴가는 추석 때만 한번 나갔으며, 한달에 한번 정도 아버지가 근처에 와서 밥을 사주신것 뿐이다. 그러니까 가족하고는 반년동안 5번 정도만 봤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공부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있던 기억. 점심먹던 기억. 자기전에 누운 기억같은 것 말이다. 그곳에 있으면서 추억이라 부를만한 것은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15학년도 9월 모의고사 성적은 국수영탐 21133이었다. 국수영 원점수가 98 100 100 인 것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점수였다. 다만, 다시한번 탐구를 망쳤는데, 당일 탐구를 보기 전까지 '만점'임을 직감했던 것에 비하면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오를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의심치 않았다.
나는 평소에 탐구만 30분 재서 푸는 것과 실전에서 하루종일 국-수-영을 풀고난 다음에 기진맥진해서 푸는 것이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 떄문에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홍삼과 영양제를 매일 자기 전 꼭꼭 챙겨 먹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난 절박했다.
9월모의고사 이후에는 마인드컨트롤과 실전연습에 매진했다. 매주 월-수-금 마다 역대 평가원 모의고사를 1일치씩 실전처럼 하루종일 푸는 연습을 했다. (그동안 풀지않고 아껴두었던 평가원국어를 이때 풀었다.) 결과는 굉장히 좋았다. 비록 실전이 아니란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수학과 영어는 거의 고정100이었으며 국어는 95 이상, 탐구는 47~50을 왔다갔다 했다. 그 때 나에게 1등급은 기본이었으며, 100점이냐 아니냐만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만점도 2번인가 맞았던 것 같다.
그렇게 수능이 다가왔다. Lacri님이 과거 수능 전날에 썼었던 용기를 북돋아주는 글과 탐구 요점정리한 것을 프린트 한 후 9시에 숙소로 돌아왔다. 안경이 부러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담담하게 테이프로 붙였다. 지난 6개월동안 최선을 다했기에 떨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11월 7일, 수능 날이 되었다. 바로 시험보던 시간으로 넘어가겠다.
국어시험지를 받고 내가 든 생각은 '어쩔 수 없구나'였다. 130일동안 130개의 모의고사를 풀고, 대부분 좋은 결과가 나왔음에도 결국 수미잡이었다. 이번 국어는 분명 수능역사에 남을 정도의 난이도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분걸리던 화작문을 25분만에 풀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신채호 지문이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서 5분을 더 날렸다. 다음 비문학 역시 만만치않았다. 비문학을 바로 넘기고 문학부터 풀었다. 고전소설 지문 하나가 두 페이지를 꽉 채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문학을 어찌어찌 푼 다음 비문학으로 돌아왔다. 신채호지문은 여전히 재껴두고 다음 지문부터 풀었다. 다 풀고 다시 신채호를 봤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되었다. 대충 답같은 걸로 고르고 과학 지문으로 넘어갔다. 시간은 겨우 10분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마킹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지문 완독을 포기하고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만 캐치해서 풀었고, 종이 울리기 전에 낼 수 있었다.
아무리 공부해도 결국엔 수능이었다. 수능의 긴장감 속에서 푸는 고난이도 국B는 내 에상보다 훨씬 어려웠다. 국어를 망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며 멘탈을 다잡았다. 91점-2등급
수학A는 너무 쉬웠다. 단순히 문제만 보더라도 어려운 '유형'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당시의 6월 모의고사와 비슷한 향기를 풍겼다. 다만 30번은 공식을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해맸고, 막판에 알아채고 고쳤지만 결국 틀렸다. 96점-1등급
영어 - 100. 쉬움
탐구 시간이 되어서 난 다시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았다. 확실히 탐구는 나의 편이 아니었다. 9모평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과목임에도 결국 좋은 결과는 나오지 못했다. 각각 2등급 컷.
탐구까지 보고 제2외국어 포기 각서를 쓰고 나왔다. 내가 시험장에서 제일 먼저 나온 듯 했다. 교문 밖에 있던 누군가의 학부모님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집까지 거리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차타고 집에 오는 동안 채점을 했다. 결과는 위와 같다. 나는 국어를 더 망치지 않았음에 감사했고, 수학 계산실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감사했다. 결과는 더 나쁠수도 있었다.
본문에 쓰지 않았지만, 독학재수하는 동안 나의 유일한 취미는 오르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피밴도 당하고, 또 수기도 읽으면서
사실 '인터넷 커뮤니티'라는걸 처음 해본 것이 이곳 오르비같네요
이렇게 미천한 성적표로 수기를 쓰는 것은,
그동안 오르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이곳의 수기를 읽으면서 감명도 받았기에
제가 올린 짧은 글도, 지금 당장의 관심보다는
이곳에 영원히 저장되어 먼 훗날의 수험생들에게 영감을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힌편으론 제 수험생활의 '마침표'를 의미하기도 하고요.
오르비를 하는 누구나 이곳에 자신의 수기를 한편 쓰는걸 꿈꿀 겁니다. 개인적인 소망을 하나 이룬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제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절박감'입니다
저는 주변에 몇안되는 +1을 성공한 사람입니다. 반수를 했음에도 말이죠. 여기서 '성공'은 현역보다 성적이 많이 올랐고, 만족할만한 대학에 합격한 것을 의미합니다. 쌩재수를 한 친구들조차 현역과 비슷한 성적을 받은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저와 그들의 차이가 뭔지 압니다. 바로 절박감의 차이죠. 아마 제가 쌩재수를 했더라면 절대 성공하지 못햇을 겁니다.
저는 1학기동안 소위 말하는 '지잡대'를 다녔고, 그곳에서 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못났는지를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당시 대학 1학기동안의 열등감, 패배의식, 우울증 이 모든것이 합쳐져 저에게 절박감을 만들어냈고, 이는 제가 반년동안 숨도 안쉬고 공부만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대학 1학기동안 저는 자살 직전까지 갔지만 그것은 저를 죽이지 못했고, 결국 더 강해졌다는 것이지요.
반수하는 동안 추석이 있었고, 저는 조부모님 댁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얼마나 벌레같은 존재인지, 돈만 뺴먹는 죄수생이라는 것을 주변의 반응으로부터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재수생에게는 이러한 절박감이 진정으로 필요합니다. 절박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당장 주위를 보더라도 삼수를 성공할 사람과 실패할 사람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절박감의 유무이지요.
삼수를 계획하는 친구 한명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자기는 재수할 때 너무 절박하지 않았다고, 빠른년생이라는 생각에 천천히 해도 되지 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번 수능을 망치고 자기 가슴을 쥐어 뜯고 싶을 정도로, 벽에 머리 박고 죽고싶을 정도였다고, 이제 삼수하면 미친듯이 공부할거라고 말이죠.
현재 +1을 계획하는 분들께선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계신지 묻고싶습니다. 이러한 불덩이를 마음 속 깊은 곳에 품지 않는 한, 당신의 +1은 분명히 실패할 것입니다.
이 글이 지금 당장을 바라보고 쓴 것은 아니지만, 당장을 위한 조언을 하나 해드리자면 그것은 바로 이번 설날 때 참석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1을 위해, 친척집을 방문하지 않는 재수생이 대부분이겠죠
그곳에서 당신을 벌레취급하는 주변 친척들의 시선과, 말 하나하나에 숨겨진 정곡을 찾으세요. 명문대 합격한 친척과 그를 당신과 비교하는 어른들의 어리석은 말을 한마디 한마디 마음 속에 새기세요
그것이 당신을 죽이지 않는 한, 당신의 재수생활 동안 크나큰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하찮은 꺠달음 한줌이라도 얻어가길 바라면서 끝맺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끊으시면...ㅠㅠ
우와...
에휴 아주 신화를 써요
ㅋㅋㅋㅋ
리플리증후군 ㅋㅋㅋㅋ사회부적응자 에휴
한번 더 하셔야될듯... 철이 안드심
이렇게 좋은글에
저렇게 구진댓글이
달리는거보니까 원래 댓글같은거 잘안남기는데 너무 화나서 댓글씁니다
잘보고갑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