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방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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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바위 같은 불안이 공기와 호흡의 중압이 되어 마구 짓눌렀다.
나는 이 야행열차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아니 된다.
미지의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차내의 한구석에서, 나의 눈은 자꾸만 말똥말똥해지기만 한다.
그는 이윽고 이 불손하기 짝이 없는 사나이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인가를 깨달았던 것일까.
비스듬히 맞은편 좌석에 누이동생인 듯한 열 살쯤 난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는 한 여학생 차림의 얌전한 여인 위에 그의 주의를 돌리기 시작한다(그런 것 같았다).
나처럼 그는 결코 여인을 볼 때에 눈을 번쩍이거나 하지 않는다.
느슨한 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과 같이 그야말로 평화스럽다.
평화스러운 눈매 그것이다.
나도 그 여자 쪽을 본다. 잘생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꽤 감성적인 얼굴이다.
살찐 듯하면서도 날렵하게 야윈 정강이는 가볍고 또 애처롭다.
포도를 먹었을 때처럼 가무스레한 입술이다.
멀리 강서 근처에서 폐를 요양하는 애인을 생각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 자신을 암살하고 온 나처럼, 내가 나답게 행동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세르팡』을 꺼낸다.
아폴리네르가 즐겨 쓰는 테마 소설이다.
「암살 당한 시인」.
나는 신비로운 고대의 냄새를 풍기는 주인공에게서 ‘벤케이’를 연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이기 때문에,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에, 저벤케이와 같이 결코 화려하지는 못할 것이다.
글자는 오수(午睡)처럼 겨드랑이 밑에 간지럽다.
이미지는 멀리 바다를 건너간다. 벌써 바닷소리마저 들려온다.
이렇게 말하는 환상 속에 나오는 나,
영상은 아주 반지르르한 루바슈카를 입은 몹시 퇴폐적인 모습이다.
소년 같은 창백한 털복숭이 풍모를 하고 있다.
그리곤 언제나 어느 나라인지도 모를 거리의 십자로에 멈춰 서 있곤 한다.
나는 차가운 에나멜의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다.
나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얼마 후 꿈 같은 강변으로 나선다.
강 저편은 목멘 듯이 날씨가 질척거리고 있다.
종이 울리는가 보다. 허나 저녁 안개 속에 녹아 버려 이쪽에선 영 들리지 않는다.
나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청년이 헌책을 팔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뒤적거린다. 찾아낸다. 나카무라 쓰네의 자화상 데생 말이다.
멀리 소년의 날, 린시드 유의 냄새에 매혹되면서 한 사람의 화인(畵人)은, 곧잘 흰 시트 위에 황달색 피를 토하곤 했었다.
문득 그가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이건 또 어찌 된 셈일까? 그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미간에 주름살마저 잡혀있지 않는가.
『킹구』―이 천진한 사나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기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일까?
나는 담배를 피우듯이 숨을 쉬었다.
그 아가씨는? 들녘처럼 푸른 사과 껍질을 깎고 있다.
그 옆에서 저 여동생 같기도 한 소녀는 점점 길게 드리워지는 껍질을 열심히 응시하고 있다.
독일 낭만파의 그림처럼 광선도 어둡고 심각한 화면이다.
나는 세상 불행을 제가끔 짊어지고 태어난 것 같은 오욕에 길든 일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왔다.
그들은 차라리 불행을 먹고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늘 저녁도 또 맛없는 식사를 했을 테지.
불결한 공기에 땀이 배어 있을 테지.
나의 슬픔이 어째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가?
잠시나마 나의 마음에 평화라는 것이 있었던가.
나는 그들을 저주스럽게 여기고 증오조차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멸망하지 않는다.
심한 독소를 방사하면서, 언제나 내게 거치적거리며 나의 생리에 파고들지 않는가.
지금 야행열차는 북위(北緯)를 달리고 있다.
무서운 저주의 실마리가 엿가락처럼 이 열차를 쫓아 꼬리가 되어 뻗쳐 온다. 무섭다, 무섭기만 하다.
나는 좀 자야겠다. 허나 눈꺼풀 속은 별의 보슬비다.
암야(暗夜)의 거울처럼 습기 없이 밝고 맑은 눈이 자꾸만 더 말똥말똥하기만 하다.
책을 덮었다. 활자는 상(箱)에게서 흘러 떨어졌다.
나는 엄격한 자세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이젠 혼자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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