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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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두 주일 동안
거기는 참 오래간만에 가본 것입니다. 누가 거기를 가보라고 그랬나 모릅니다. 퍽 변했습디다. 그 전에 사생(寫生)하던 다리 아치가 모색(暮色) 속에 여전하고 시냇물도 그 밑을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양 언덕은 잘 다듬어서 중간중간 연못처럼 물이 괴었고 자그마한 섬들이 아주 세간처럼 조촐하게 놓여 있습니다. 거기서 시냇물을 따라 좀 올라가면 졸업기념으로 사진을 찍던 나무 다리가 있습니다.
그 시절 동무들은 다 뿔뿔이 헤어져서 지금은 안부조차 모릅니다. 나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의자처럼 생긴 어느 나무 토막에 앉아서 물속으로도 황혼이 오나 안 오나 들여다보고 앉았습니다.
잎새도 다 떨어진 나무들이 거꾸로 물속에 비쳤습니다. 또 전신주도 비쳤습니다. 물은 그런
틈바구니로 잘 빠져서 흐르나 봅니다. 그 내려놓은 풍경을 만져 보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람 없는 저녁입니다. 그러더니 물속 전신주에 달린 전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마치 무슨 요긴한 ‘말씀’
같습니다
― ‘밤이 오십니다’
― 나는 고개를 들어서 땅 위의 전신주를 보았습니다. 얼른 불이 켜집니다. 내가 안보는 동안에
백주(白晝, 대낮)를 한 병 담아 가지고 놀던 전등이 잠깐 한눈을 판 것도 같습니다. 그래밤이 오나…… 그러고 보니까 참 공기가 차갑습니다.
두루마기 아궁탱이 속에서 바른손이 왼손을 아귀에 꼭 쥐고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허공에 있거나 물속으로 가라 앉았을 동안에도 육신은 육신끼리의 사랑을 잊어버리거나 게을리하지는
않는가 봅니다. 머리카락은 모자 속에서 헝클어진채 끽소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가난한 모체(母體)를 의지하고 저러고 지내는 그 각 부분들이 무한히 측은한 것도 같습니다.
땅으로 치면 메마른 불모지 같은 셈일 테니까. 눈도 퀭하니 힘이 없고 귀도 먼지가 잔뜩 앉아서
너절한 행색입니다. 목에서는 소리가 제대로 나기는 나지만 낡은 풍금처럼 다 윤기가 없습니다.
콧속도 그저 늘 도배한 것 낡은 것 모양으로 우중충합니다. 20여 년이나 하나를 믿고 다소곳이 따라 지내온 그들이 어지간히 가엾고 또 끔찍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그윽한 충성을 지금 그냥 없이 하면서 나는 망하려 드는 것입니다.
일신의 식구들이(손, 코, 귀, 발, 허리, 종아리, 목 등) 주인의 심사를 무던히 짐작하나 봅니다. 이리
비켜서고 저리 비켜서고 서로서로 쳐다보기도하고 불안스러워 하기도 하고 하는 중에도 서로서로
의지하고 여전히 다소곳이 닥쳐올 일을 기다리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꽤 어두워들어왔습니다.
별이 한 분씩 두 분씩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오시나 굿이브닝 뿔뿔이 이야기꽃이 피나 봅니다. 어떤 별은 좋은 담배를 피우고어떤 별은 정한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기도 하고 또 기념촬영을 하는 패도있나 봅니다. 나는 그런 오붓한 회장(會場)을 고개를 들어 보지 않고 차라리 물속으로 해서
쳐다봅니다. 시각이 거의 되었나 봅니다.
오늘 밤의 프로그램은 참 재미있는 여흥이 가지가지 있나 봅니다. 금단추를 단 순시(巡視)가
여기저기서 들창을 닫는 소리가 납니다. 갑자기 회장이 어두워지더니 모든 인원 얼굴이 활기를
띱니다. 중에는 가벼운 흥분 때문에 잠깐 입술이 떨리는 이도 있고 의미 있는 듯한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눈을 끔벅하는 이들도있나 봅니다. 안드로메다, 오리온, 이렇게 좌석을 정하고 궐련들도 다 꺼버렸습니다.그때 누가 급히 회장 뒷문으로 허둥지둥 들어왔나 봅니다. 모든 별의 고개가
한쪽으로 일제히 기울어졌습니다. 근심스러운 체조, 그리고 숨결 죽이는겸허로 하여 장내 넓은 하늘이 더 깊고 멀고 어둡고 멀어진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고? 넓은 하늘 맨 뒤까지 들리는 그윽하나 결코 거칠지 않은 목소리의 음악처럼 유량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에는 모두들일찍 돌아가시라는 전령입니다. 우 ─ 들 일어나나 봅니다. 베레모 검정모자는 참 품(品)이 있어 보이고 또 서반아식 망토 자락도 퍽 보기 좋습니다.
에나멜 구두가 부드러운 융전(絨氈)을 딛는 소리가 빠드득빠드득 꽈리 부는소리처럼 납니다. 뿔뿔이 걸어서들 갑니다. 인제는 회장이 텅 빈 것 같고군데군데 전등이 몇 개 남아 있나 봅니다. 늙은
숙직인이 들어오더니 그나마 하나씩 둘씩 꺼들어 갑니다. 삽시간에 등불도 다 꺼지고 어둡고 답답한하늘 넓이에는 추잉껌, 캐러멜 껍데기가 여기저기 헤어져 있습니다.무슨 일이 있으려나. 대궐에
초상이 났나보다.
나는 팔짱을 끼고 오랫동안잊어버렸던 우두 자국을 만져 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버지도 다얽으셨습니다. 그분들은 다 마음이 착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손톱이 일곱밖에 없습니다. 궁내부 활판소에 다니실 적에 손가락 셋을 두 번에 잘리우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생일도 이름도
모르십니다. 맨 처음부터 친정이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외갓집 있는 사람이 퍽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장모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그분들께 돈을 갖다 드린 일도 없고 엿을 사다 드린 일도 없고 또 한 번도 절을 해본
일도없습니다. 그분들이 내게 경제화(經濟靴)를 사주시면 나는 그것을 신고 그분들이 모르는 골목길로만 다녀서 다 해뜨려 버렸습니다. 그분들이 월사금을 주시면 나는 그분들이 못 알아보시는 글자만을 골라서 배웠습니다. 그랬건만 한 번도 나를 사살하신 일이 없습니다.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 어머니는 내 대님과 허리띠를 접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내 모자와 양복저고리를 걸기 위한 못을박으셨습니다. 동생도 다 자랐고 막내누이도 새악시 꼴이 단단히 박였습니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
동무도 없어졌습니다. 내게는 어른도 없습니다. 버릇도 없습니다. 뚝심도없습니다. 손이 내 뺨을
만집니다. 남의 손같이 차디차구나. ‘무슨 생각을그렇게 하시나요? 이렇게 야위었는데.’ 모체가 망하려 드는 기색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이내 위문(慰問)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얼 하나 속절없지.
내 마음은 벌써 내 마음 최후의 재산이던 기사(記事)들까지도 몰래다 내다 버렸습니다. 약 한 봉지와 물 한 보시기가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이고 밤 깊이 너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망하리라. 그
생각이 하나 적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는 고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께는 전화 걸지
않고 기아(棄兒)하듯이 망하렵니다.
하하, 비가 오시기 시작입니다. 살랑살랑 물 위에 파문이 어지럽습니다.고무신 신은 사람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눈물보다도 고요합니다. 공기는 한층이나 더 차갑습니다. 까치나 한 마리…… 참, 이 스며들 듯 하는 비에 까치집이 새지나 않나 모르겠습니다. 인제는 까치들도 살기가 어려워서 경성근방에서는 다 없어졌나 봅디다. 이렇듯 궂은 비가 오는 밤에는 우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건너편 양옥집 들창이 유달리 환하더니 인제 누가 그 들창을 안으로 닫쳐 버립니다. 따뜻한 방이 눈을 감고 실없는 장난을 하려나 봅니다. 마음대로 하라지요.
하지만 한데는 너무 춥고 빗방울은 차차 굵어갑니다. 비가 오네, 비가 오누나. 인제 비가 들기만 하면 날이 득하렷다. 그런 계절에 대한 근심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때 나는 사람이 불현듯 그리워지나
봅니다. 내 곁에는 내 여인이 그저 벙어리처럼 서 있는 채입니다.나는 가만히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면 참 희고도 애처롭습니다. 여인은 그전에 월광 아래 오래오래 놀던 세월이 있었나 봅니다. 아, 저런
얼굴에……그러나 입 맞출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입 맞출 자리란 말하자면 얼굴 중에도 정히
아무것도 아닌 자그마한 빈 터전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건만 이여인의 얼굴에는 그런 공지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 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
두는 중입니다. 텅텅 빈 내 모체가 망할 때에 나는 이 ‘시몬’과 같은 여인을 체(滯)한 채그러렵니다 이 여인은 . 내 마음의 잃어버린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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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런 글 너무 좋음
감사합니다! 매일 업로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