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想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3-09 07: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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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등잡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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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禮儀) 


걸핏하면 끽다점(喫茶店)에 가 앉아서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차를 마시고 또 우리 전통에서는 

무던히 먼 음악을 듣고 그리고 언제까지라도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취미를 업수이 여기리라. 그러니 전기기관차의 미끈한 선, 강철과 유리 건물 구성, 예각(銳角), 이러한 데서 미(美)를 발견할 줄 아는 

세기(世紀)의 인(人)에게 있어서는 다방의 일게(一憩)가 신선한 도락(道樂)이요 우아한 예의(禮儀) 아닐 수 없다. 


생활이라는 중압은 늘 훤조(喧噪)하며 인간의 부드러운 정서를 억누르려 드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라는 데 깃들이는 사람들은 이 중압을 한층 더 확실히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교착(交錯)된 강철과 거암(巨岩)과 같은 콘크리트 벽의 숨찬 억압 가운데 자칫하면 거칠기 쉬운 

심정을 조용히 쉴 수 있도록, 그렇게 알맞은 한 개의 의자와 한 개의 테이블이 있다면 어찌 

촌가(寸暇)를 에어 내어 발길이 그리로 옮겨지지 않을 것인가. 가(加)하기를 한 잔의 따뜻한 차와 

가구(街衢)의 훤조한 잡음에 바뀌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면 그 심령들의 위안 됨이 더한층 족하다고 하지 않으리요. 


그가 제철공장의 직인이건, 그가 외과의실의 집도인이건, 그가 교통정리 경관이건, 그가 법정의 

논고인이건, 그가 하잘것없는 일용 고인(雇人)이건, 그가 천만장자의 외독자이건 묻지 않는다. 그런 

구구한 간판은 '네온사인'이 달린 다방 문간에 다 내려놓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다 같이 

심정의 회유(懷柔)를 기원하는 티 없는 '사람'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에서는 누구나 다 겸손하다. 그리고 다 같이 부드러운 표정을 하는 것이다. 신사는 다 조신하게 차를 마시고 숙녀는 다 다소곳이 음악을 즐긴다. 


거기는 오직 평화가 있고 불성문(不成文)의 정연하고도 우아 담박한 예의 준칙이 있는 것이다. 


결코 이웃 좌석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그만큼 낮은 목소리로 담화한다. 직업을 떠나서 투쟁을 떠나서 여기서 바뀌는 담화는 전면(纏綿)한 정서를 풀 수 있는 그런 그윽한 화제리라. 


다 같이 입을 다물고 눈을 홉뜨지 않고 '슈베르트'나 '쇼팽'을 듣는다. 그때 육중한 구두로 마룻바닥을 건드리며 장단을 맞춘다거나, 익숙한 곡조라 하여 휘파람으로 합주를 한다거나 해서는 아주 못쓴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곳의 불성문인 예의를 깨뜨림이 지극힌 큰 고(故)로. 


나는 그날 밤에도 몸을 스미는 추랭(秋冷)을 지닌 채 거리를 걸었다. 천심(天心)에 달이 교교(皎皎)하여 일보 일보가 저으기 무겁고 또한 황막(荒漠)하여 슬펐다. 까닭 모를 애수 고독이 불현듯이 인간다운 

훈훈한 호흡을 연모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달빛을 등지고 늘 드나드는 한 다방으로 들어섰다. 


양삼인(兩三人)씩의 남녀가 벌써 다정해 보이는 따뜻한 한 잔씩의 차를 앞에 놓고 때마침 '사운드박스' 울리는 현악 중주의 명곡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또한 신사답게 삼가는 보조(步調)로 그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리고 차와 음악을 

즐기기로 하였다. 


오 분 십 분 이십 분, 이 적당한 휴게가 냉화(冷化)하려 들던 내 혈관의 피를 얼마간 덥혀 주기 

시작하는 즈음에─. 


문이 요란히 열리며 4, 5인의 취한(醉漢)이 고성 질타(高聲叱咤)하면서 폭풍과 같이 틈입하였다. 

그들은 한복판 그중 번듯한 좌석에 어지러이 자리를 잡더니 차를 청하여 수선스러이 마시며 

방약무인하게 방가(放歌)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음악은 간곳없고 예의도 간곳없고 그들의 

추외(醜猥)한 성향(聲響)이 실내를 흔들 뿐이다. 


내 심정은 다시 거칠어 들어갔다. 몸부림하려 드는 내 서글픈 심정을 나 자신이 이기기 어려웠다. 나는 일 초라도 바삐 이곳을 떠나고 싶어서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서 문간으로 나가려 하는 즈음에─. 


이번에는 유두백면(油頭白面)의 일장한(一壯漢)이 사자만이나 한 '셰퍼드'를 한 마리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경실색하여 뒤로 물러서면서 보자니까 그 개는 그 육중한 꼬리를 흔들흔들 

흔들며 이 좌석 저 좌석의 객(客)을 두루두루 코로 맡아보는 것이다. 


그때 취한 중의 한 사람이 마시다 남은 차를 이 무례한 개를 향하여 끼얹었다. 개는 질겁을 하여 뒤로 물러서더니 그 산이 울고 골짝이 무너질 것 같은 크낙한 목소리로 이 취한을 향하여 짖어대는 

것이었다. 


나는 창황히 찻값을 치르고 그곳을 나와 보도를 디뎠다. 걸으면서 그 예술의 전당에서 울려 나오는 

해괴한 견폐성(犬吠聲)을 한참 동안이나 등 뒤에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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