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想 [870531] · MS 2019 · 쪽지

2022-03-07 08: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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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등잡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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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삽화(秋夕揷話) 


일 년 삼백육십 일 그중의 몇 날을 추려 적당히 계절 맞춰 별러서 그날만은 조상을 추억하며 생의 

즐거움에서 멀어진 지 오래된 그들 망령을 있다 치고 위로하는 풍속을 아름답다 아니할 수 없으리라. 


이것을 굳이 뜻을 붙여 생각하자면, 그날그날의 생의 향락 가운데서 때로는 사(死)의 적막을 가끔 

상기해 보며 그러함으로써 생의 의의를 더한층 뜻있게 인식하도록 하는 선인(先人)들의 그윽한 

의도에서 나온 수법이 아닐까. 


이번 추석 날 나는 돌아가신 삼촌 산소를 찾았다. 지난 한식(寒食)날은 비가 와서 거기다 내 나태가 

가(加)하여 드디어 삼촌 산소에 가지 못했으니 이번 추석에는 부디 가 보아야겠고 또 근래 이 삼촌이 지금껏 살아 계셨던들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적이 많아서 중년에 억울히 가신 삼촌을 한번 추억해 

보고도 싶고 한 마음에서, 나는 미아리(彌阿里)행 버스를 타고 나갔던 것이다. 


왼 산이 희고 왼 산이 곡성(哭聲)으로 하여 은은하다. 소조(簫條)한 가을바람에 추초(秋草)가 나부끼는 가운데 분묘는 5년 전에 비하여 몇 배수나 늘었다. 사람들은 나날이 저렇게들 죽어 가는구나 생각하니 저으기 비감하다. 물론 5년 동안에 더 많은 애기가 탄생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날로 날로 지상의 사람들이 바뀐다는 것도 또한 슬픈 일이 아닌가. 


다섯 번 조락(凋落)과 맹동(萌動)을 거듭한 삼촌 산소가 꽤 거친 모양을 바라보고 퍽 슬펐다. 

'시멘트'로 땜질한 석상(石床)은 틈이 벌었고 친우(親友) 일동이 해 세운 석비(石碑)도 좀 기운 

듯싶었다. 


분토(墳土) 한 곁에 앉아 잠시 생전의 삼촌 그 중엄하기 짝이 없는 풍모를 추억해 보았다. 그리고 

운명하시던 날, 장사 지내던 날, 내 제복(祭服) 입었던 날들의 일, 이런 다섯 해 전 일들이 내 

심안(心眼)을 쓸쓸히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또 비명(碑名)을 읽어 보았다. 하였으되, 


 

 


公廉正直 信義友篤  (공렴정직 신의우독) 


金蘭結契 矢同憂樂  (금란결계 시동우락) 


中世摧折 士友咸慟  (중세최절 사우함통) 


寒山片石 以表哀情  (한산편석 이표애정) 


 

삼촌 구우(舊友) K씨의 작(作)으로 내 붓 솜씨다. 오늘 이 친우 일동이 세운 석비 앞에 주과(酒果)가 

없는 석상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 


그때 고 이웃 분묘에 사람이 왔다. 중로(中老)의 여인네가 한 분, 젊은 내외인 듯싶은 남녀, 10세 

전후의 소학생이 하나, 네 사람이다. 젊은 남정네는 양복을 입었고 젊은 여인네는 구두를 신었다. 

중로의 여인네가 보퉁이를 펴 드니 주과를 갖춘 조촐한 제상(祭床)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잔을 갈아 부으며 네 사람은 절한다. 


양복 입은 젊은 내외의 하는 절이 더한층 슬프다. 그리고 교복 입은 소학생의 하는 절은 너무나 

애련하다. 


중로의 여인네는 호곡한다. 호곡하며 일어날 줄을 모른다. 젊은 내외는 소리 없이 몇 번이나 향 피우고 잔 붓고 절하고 하더니 슬쩍 비켜서는 것이다. 소학생도 따라 비켜선다. 


비켜서서 그들은 멀리 북망산(北邙山)을 손가락질도 하면서 잠시 담화하더니 돌아서서 언제까지라도 호곡하려 드는 어머니를 일으킨다. 그러나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때 이날만 있는 이 북망산 전속의 걸인이 왔다. 와서 채 제사도 끝나지 않은 제물을 구걸하는 

것이다. 그 태도가 마치 제 것을 제가 요구하는 것과 같이 퍽 거만하다. 부처(夫妻)는 완강히 꾸짖으며 거절한다. 승강이가 잠시 계속된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앉았는 동안에 내 등 뒤에서 이 또한 중로의 여인네가 한 분 손자인 듯싶은 

동자(童子) 손을 이끌고 더듬더듬 나려오는 것이었다. 오면서 분묘 말뚝을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한다. 필시 영감님의 산소 위치를 작년과도 너무 달라진 이 천지에서 그만 묘연히 잊어버린 것이리라. 


이 두 사람은 이윽고 내 앞도 지나쳐 다시 돌아 그 이웃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래도 좀처럼 여기구나 하고 서지 않는다. 


건너편 그 거만한 걸인은, 시비(是非)의 무득(無得)함을 깨달았던지, 제물을 단념하고 다시 다음 

시주(施主)를 찾아서 간다. 


걸인은 동쪽으로 과부는 서쪽으로─. 


해는 이미 일반(日半)을 지났으니 나는 또 삶의 여항(閭巷)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코스모스 핀 언덕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그 과부는 영감님의 무덤을 찾았을까 걱정하면서 버스 선 곳까지 

오니까 모퉁이 목로술집에서는 일장(一場)의 싸움이 벌어진 중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거성 입은 

사람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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