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돌 [354222] · MS 2010 · 쪽지

2014-12-30 00:39:04
조회수 1,172

의사학적으로(+재미로) 읽어보는 대한민국 한/양방 갈등의 기원(스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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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전쯤 올라온 기사 하나로 막 시끄러운 와중에, 방학이라 할일도 없고 심심하고 제가 역사 이야기 좋아하기도 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배경 같은걸 그냥 한번 쭉 써 봤습니다. 재미(?)로 봐 주세요

1.
결론 선제시 : 일제 개생키(?!)

2.
1868년 막부와 막부타도세력(이과종자라 내용은 대충 아는데 저 막부타도세력을 역사책에선 뭐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대충 넘어갑시다) 사이의 긴 다툼이 끝나고 메이지유신이 일어나신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이후 본격적인 개항+서구문물 도입으로 일본은 진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구식으로 변화하게 되지요.

3.
이는 의료제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1874년 일본 의료제도의 기초를 만든 '의제'라는 것이 공포되고, 일본의 의료제도는 완전히 변화하게 됩니다. 서양의학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였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의사가 될 자격을 주었지요. 기존에 사용하던 한의학(동아시아의학. 현재 일본에서는 황한의학이라고 부릅니다)은 폐기처분되거나 의사의 범주로 포합됩니다.라고는 하지만 실제론 거의 사장당하고 근근히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지요. 1950년대 들어서야 동양의학회가 설립되고, 70년대들어 쯔무라제약등을 위시한 약효가 좋고 사용이 편한 한약 엑스제의 많은 개발 등등으로 다시 사용되기 전까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4.
한편 이 시기 한국 의료제도는 어땠느냐.
1882년 조선은 기존에 의료를 담당하던 부서인 혜민서, 활인서를 폐지합니다. 주요 원인으로는 당시 두 서 관리의 부패 + 민간의료의 성장으로 굳이 국가에서 더 이상 의료를 공급한다는 의미가 희박해졌던것이 큰 이유지요. 그리고 그 당시 서양의학의 외과적 처치의 정밀성 등이 군사적으로도 이득이 되네 어쩌네 하는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으로 조선 정부에서도 서양의학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도 했구요.(이 시기는 개화파가 그래도 지지를 받던 시기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그나마 좀 급진적이었던 편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도 혜민서 활인서 폐지에 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긴 합니다)
그러다 1884년, 갑신정변이 터집니다.

5.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고, 개화파는 전체적으로 스톱하게 됩니다. 의료제도에 있어서도 영향을 받게 되죠. 일단 나름 국가에서 인민을 위해 만들었던 의료기관인 혜민서 활인서를 아무런 대책 없이 폐지했던것도 반성(?)하기도 하고, 막 서양문물 짱짱맨 하던 것도 조금 조심스럽게 변해서 옛것을 기반으로 하면서 일부 새로운것들을 절충하여 도입하고자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885년, 드라마로 이름은 다 들어보셨을 제중원(설립당시에는 광혜원)이 설립되고 알렌을 고용해서 진료를 시작합니다. 앞서 82년 폐지되었던 혜민 활인서를 대신하여 대민의료부서를 만든 것이죠. 제중원에서는 당시 한국에 파견된 의료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의학적 처치가 이루어지게됩니다.(갑신정변당시 민영익이 죽을뻔한걸 알렌이 서양의학으로 살려낸게 광혜원 설립의 촉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기적으로도 정부의 대민의료기관설립의지+마침 서양의학으로 살아난 왕가 친척+알렌이 광혜원에서 무보수로 근무하겠단 조건 제시 등등 이래저래 짝짝궁이 잘 맞아서 서양의학 중심으로 설립되었지요)
1886년에 개교한 제중원의학당이라는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도 있긴 했으나 흐지부지되고 졸업생은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6.
그러면 한의학은?
뭐 국가에서 서양의학을 받아들인다 광혜원을 설립했다 어쩐다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건 한의학이었고, 당시 서양의학은 외과적 처치만을 중심으로 소개되었기에 아무래도 주로 사용되었던 의학은 한의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서양문물이 한국에 들어오던 시기였기에 한의사가 서양의학을 공부하기도 하고, 더 나은 건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러던 때였습니다. 당장 종두법을 들여온 지석영 선생만 해도 한의사였으니까요. 물론 국가의 대민의료기구가 서양의학병원(광혜원)이었던건 좀 흠좀무긴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 당시 짝짝궁이 잘 맞아서 그랬던거니ㅠ

7.
광혜원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넘어가 보겠습니다. 광혜원, 그러니까 제중원이라는게 국가의료기관비스무리하게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형태는 조금 이상했습니다. 애초에 설립당시 조선에는 양의사가 없었으므로 운영비는 국가에서 지원하되 알렌을 고용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최초의 계약직 공무원? 그런데 고용이라고 보기도 이상한게 제중원에 근무할 의사를 뽑는 소관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단 알렌은 미국 선교사였기도 했고, 미국 선교부는 제중원을 선교활동의 기지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갖고있기도 했고요. 뭐 그 운영권이란걸로 정부랑 선교부간 파워게임이있었다고도 하고 뭐 이래저래 말이 많기도 하고 합니다. 그러다가 1894년 조선 정부는 아예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선교부에 넘겨버렸고(미국 선교부와의 마찰+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의 간섭 심화. 일본을 견제하려 차라리 미국에 주겠다 하는 것도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이후로 제중원은 국가의료기관이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의 모태가 되지요.

8.
국가의료기관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갑오개혁 등등 뭐 이런저런 복잡한 사건들이 숙숙 지나가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1899년-1900년 사이 새로운 국가의료기관이 설립되는데 이것이 광제원입니다.
아예 외국인인 서양의사를 고용하는 형태로 만들어져 아예 양방병원이었던 제중원과는 달리, 광제원은 상대적으로 한방병원의 형태였습니다. 상대적이라고 한 이유는 종두법 등의 예방접종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기도 하는 등의(지석영 선생도 여기에서 근무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새로이 유입된 서양의학적인 내용도 포함된 진료가 이루어졌으니까요. (아마 의료가 이러한 형태로 계속 이루어졌다면 한의학+서양의학의 콜라보레이션 혹은 중국과 비슷한 형태의 의료'제도'가 이루어졌을 것 같긴 합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요. 다만 어떤 형태이든간에 지금처럼 한-양방 간 갈등이 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9.
이렇게 광제원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고 끝나면 참 좋았겠지만(ㅠㅠ) 슬프게도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고 통감부가 설치됩니다.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광제원에서 한의사를 다 쫒아냈고, 기존에 대한제국에 존재하던 광제원, 적십자병원 등등 몇 병원을 통합해서 대한의원을 설립하고 양방병원으로 바꾸어버립니다. 형태상으로만 보자면 한일합방 이전이라 대한의원은 대한제국의 국가의료기관이라 할 수 있지만, 설립 자체가 통감부 주도로 이루어졌기에 일제가 설립한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죠.

10.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이제 거리낄것 없이 조선의 의료제도를 입맛대로 바꾸게 됩니다. 그래서 메이지유신때의 일본처럼 기존의 한의사(당시에는 의사)를 다 폐지시켜버리고 서양의학을 배우고 전공한 의사만을 의사로 인정하게 되죠.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비교적 일찍(본격적인 개항 이전에도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서) 서양의학이 받아들여졌고, 메이지유신 이후 6년째에야 의료제도를 바꾼만큼 나름의 준비기간이 있었지만, 당시 조선은 그런거 없ㅋ음ㅋ인 상태였으니까요.
수많은 한의사들을 졸지에 민간인으로 만들어버리니 조선인들의 의료를 책임질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존의 한의사 인력을 "의생"이라는 의사인듯 의사아닌 의사같은 애매한 지위를 만들어 의료활동을 하게 했죠.
그리고 이 상황은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됩니다.(차라리 이때 한의사가 의생도 못하고 싹 갈려버렸으면 아마 대한민국의 한의학은 일본과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
이렇게 일제 때 '의사'와 '의생(한의사)'간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고, 두 집단 간의 학문적 논쟁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주요 일간지의 투고 지면?을 통해 의사와 한의사 간의 학문적인 논박이루어지기도 했고 한의계에서도 한의학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요.
해방 이후에 한의과대학(당시 동양의과대학)이 설립된 주요 목적 중 하나가 한의학의 과학적 연구이기도 했던 만큼, 한의학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제법 예전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접근이 쉬운 한약재의 약리성분 및 in vitro, rat 등등에서의 작용에 대한 연구는 정말 많이 이루어졌죠.(물론 대규모의 임상시험등등은 여건상 못했지만요)

12.
뭐 연구는 연구고, 여튼. 막 해방되고 대한민국은 의사와 한의사라는, 세계에 유래를 찾기 힘든 의료이원화 체제를 이루게 됩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까지만해도 의사와 한의사의 직역이 크게 겹치지도 않았고, 의료인의 수도 많지 않았고 해서 그냥저냥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후 한의학계에서도 조금씩 연구가 축적되기도 하고, 전통 한의학이 새로이 들어온 현대과학과 접목되어 현대 한의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양의학과 바운더리가 겹치기도 하고 하는 과정에서 이래저래 마찰이 생기게 되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에 악화살님께서 적으셨던 글이 있어 (허락은 받지 않았지만ㅠ) 링크로 갈음하겠습니다. http://orbi.kr/bbs/board.php?bo_table=united&wr_id=3675153 (혹시 허락없이 사용하여 문제가 된다면 말씀해주세요ㅠㅠ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3.
으어...꽤 길게 이어졌네요. 처음엔 이리 길게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야기를 쓸데없이 제중원부터 시작해서ㅠㅠ 그냥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할걸 그랬나 봅니다.....
쓰고보니 역사같은거 좋아하는 저는 재밌긴 한데 다른분들이 많이 읽으실진 모르겠군요..

요약
1. 갑자기 서양의학이 일제에 의해 빨대꽂듯이 들어옴
2. 그런데 한의사가 싹 사라진것도 아니고 의생이라는 신분으로 유지됨
3. 해방 이후 의사/한의사 직역이 나뉨
4. 양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바운더리가 겹치고 충돌 발생
5. 지금 이 모양 이 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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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르비메씬져 · 549204 · 14/12/30 01:03 · MS 2014

    그냥 애초에 한의학을 복수전공 혹은 대학원과정 이나 하나의 분과로만들었으면 이런 논쟁들 안할텐데 ..안고가야할 숙명이죠

  • 김돌 · 354222 · 14/12/30 01:09 · MS 2010

    10번 맨 마지막에 적었듯이 아예 한의사가 싹 갈려버리고 의생으로도 존재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크겠죠. 지금 일본처럼요.
    뭐 이래저래 복잡한 문제 같습니다.

  • 岳畵殺 · 72210 · 14/12/30 01:15 · MS 2004

    일본은 근대화 시기니 그런 식으로 의료일원화가 가능했지

    현대 사회에서 그런 식의 의료일원화는 불가능합니다.

  • 김돌 · 354222 · 14/12/30 01:35 · MS 2010

    아아..저는 그 일제강점기때 말하는 겁니다. 한의사가 의생으로써 의료인 비스무리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것도 해방 이후 한의사라는 제도가 만들어진것에 일조했다고 생각해서요.
    아마 당시에 아예 명맥이 끊겨버렸다면 제도적으로 의료인으로 만들어지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제 현대에 와서 그렇게 한다면 큰일나겠죠....

  • 김돌 · 354222 · 14/12/30 01:48 · MS 2010

    아 그것도 그렇고ㅠㅠ 허락없이 링크 걸어서 죄송합니다. 링크 계속 걸어놓아도 괜찮을까요??

  • 岳畵殺 · 72210 · 14/12/30 01:51 · MS 2004

    네 괜찮습니다~

    왜 이런 갈등이 생겼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죠.

  • 김돌 · 354222 · 14/12/30 02:03 · MS 2010

    감사합니다~

  • 岳畵殺 · 72210 · 14/12/30 02:29 · MS 2004

    사실 이 글에 하나 더 추가하면 통일 후 북한 의료인 면허 문제도 잠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언젠간 터지고 말거에요.

  • SNU ECON · 487503 · 14/12/30 04:36 · MS 2014

    흥미로운 글이네요ㅎㅎ
    2는 존왕양이 세력입니다.
    그리고 아실것 같지만 딴 분들 위해서 세부사항 덧붙이자면 대한의원이 설의로 이어지고요. 세브란스하고 광혜원의 적통이 누구인가로 이견이 있다고 하네요.(광제원이 국가 의료 기관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요.)

  • 김돌 · 354222 · 14/12/30 14:12 · MS 2010

    그렇죠
    실제 진료가 이어진 측면으로 보자면 광혜원-세브란스병원 이지만
    국가의료기관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광혜원-광제원-대한의원-서울대병원이니까요

    흥미롭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ㅋㅋ

  • 탱구가조앙 · 402818 · 14/12/30 15:28 · MS 2012

    이글도 좋은글이고 글중에 링크달린 악화살님글도 좋은글 같습니다!! 둘다읽어보세요!!!!

  • 좀생김 · 453922 · 15/01/02 11:42 · MS 2013

    제가 읽은 논문에서는 해방이후 한의사가 제도권으로 들어온 이유에 대해서 한국전쟁후 의료인력 부족을 가장 큰 원인으로 봤던것 같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순수하게 학문적 동기가 있었다기 보기엔 사실 아전인수격 해석이 낀게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