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4Answer [592707] · MS 2015 · 쪽지

2022-01-25 20:5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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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썰-유급 문턱에서 개같이 부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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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


많은 전문직학과 지망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실제 겪기는 쉽지 않으나 또 어버버 하다 보면 동기가 복사가 되는 찬스를 주는 망령과도 같은 것이다. 


특히 본인의 경우 5수 레벨로 학교를 들어간지라 한번 삐끗하는 순간 현역 영장의 서늘한 칼날이 목 앞에 들어와 있었기에 지난 5년간의 의대 생활은 곧 유급과의 사투였다. 


보통 장수생들 보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으나, 예과 2학년때 야구 선수들 입스 오는 것 마냥 공부에 입스가 와버린 나는 본격적으로 본과 과목을 배우는 예과 2학년 2학기에 공부에 아예 흥미를 잃어버리고 군 입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그 당시 나에게 가장 혐오스러웠던 과목은 해부학이었는데, 생리학이나 생화학은 공대 과목이랑 비슷한 점이 그나마 있어서 이해를 하고 넘어가면 외우는 양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었는데, 해부학은 도무지 해도해도 내가 뭘 하고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 시작때는 나름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는데, 뭐 나만 열심히 하는게 아니었고, 해도 안나오는 과목이라 더더욱 하기 싫어지는 악순환속에 나는 초반 시험 절반을 하위 5%에 단골로 출석하는놈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는 족보(야마)의 중요성을 비로소 꺠닫게 된다. 왜 보통 무지의 골짜기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학부생때는 내가 이 과목을 다 아는 것 같은데, 석사 들어가면 내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무지의 골짜기에 진입하고, 박사때는 그래도 여기는 좀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고. 의대 공부도 이 그래프와 같아서 애매하게 참공부를 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족보를 까먹게 되어서 족보만 본 사람들보다 성적이 안나오기 십상이다. 그것을 다 뛰어넘는 자 만이 천상계에서 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꿔, 족보만 벅벅 긁기로 한다. 그런데 하필 그 와중에 탈족(족보에 없는 문제가 나오는 것)빔을 씨게 맞아버려서 성적은 더더욱 참사가 나긴 했다만, 그래도 족보만 벅벅 긁었더니 어째 이전보단 성적이 좋아서 유급권은 벗어나게 되었다. 


땡시를 보기 전까지는


땡시. 카데바에 핀으로 문제를 표시해 두고 제한시간 내에 그 부위와 관련된 문제를 푸는 시험으로, 시험 순간순간에 치사량의 아드레날린을 느낄 수 있는 시험 방식이다. 


문제는 내가 머리 회전이 조금 느린 편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5수까지 간 이유도 타임어택식 과탐때문에 발목 잡히는 경우가 많아서였는데, 나처럼 이렇게 머리 회전 느리고 한번 막히면 뇌절파티가 되는 사람에게 땡시란 극악의 상성을 가진 시험이었다. 


당시 친하던 동기들에게 땡시 족집게 과외까지 받으면서 공부했지만, 결과는 처참하게도 100점 만점에 학번 유일 10점을 못넘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떙시 점수 비중이 굉장히 컸기에 이것은 곧 에프각이 날카롭게 선 것을 의미했고, 설사 재시를 본다 해도 애초에 해부학 재시를 통과할 수준의 사람은 재시까지 갈 일이 없다. 즉 해부학 에프는 그냥 다이렉트 유급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예2 2학기 종강 이후 성적 뜨기까지 시간은 나에게 있어 4수때 생2 믿고찍는 2번 사태로 백분위가 작살난 뒤 성적표를 받으러 가기 직전보다 더한 걱정과 악몽이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대망의 성적 공개날, 나는 도저히 집에서 성적을 볼 자신이 없어 근처 피씨방에 나와서 줄담배를 태운다. 


그런데 시발, 9시에 공개되어야 할 해부학 성적이 공개가 안되는 것이다. 


다른 과목은 이미 유급과는 거리가 먼 성적이었기에 해부학만 넘기면 되는데, 아무리 새로고침해도 성적이 안나온다. 그렇게 점심도 못 먹고 담배를 거의 두갑 가까이 태워가며 애꿎은 머리만 졸라게 잡아뜯었다. 중간에 동기한테 씨발 왜 해부학 성적 안나오냐고 징징거리기도 하고.(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는 이미 에프가 하나 뜬 상태였다ㅋㅋ 물론 그 친구는 재시 가서 마찬가지로 개같이 부활해서 내 죄책감은 좀 덜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공개시간보다 8시간 반이나 늦은 오후 다섯시 반, 대망의 해부학 성적이 뜨게 된다. 


D-ㅋㅋㅋㅋ


알고보니 나보다 더 조진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 사람만 에프받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때 에프였으면 그레이, 아틀라스, 무어(해부학 교과서)전 범위를 다 공부해야 했던지라 짤없이 유급각이었는데 단 하나의 등수 차이로 나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그 사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다니, 생각해보면 참 잔인한 순간이었다. 


뭐 그래서 그렇게 해부학 못하면 그 이후 학년은 어떻게 진급했나 궁금할 수 있을텐데, 생각보다 의머 교육과정은 튼튼해서 나같은 해부학 버러지도 본3때 들들 볶이다보면 어느정도는 해부학 아는 흉내는 낼 수 있게 된다. 지금 돌아가서 해부학 시험보라 하면 솔직히 본2때 보던 내용보다 양이 훨씬 적어서 할만하다 생각하는데, 떙시는 지금도 어떻게 할 방법이 안보인다. 


생각해보면 이 순간이 가장 크리티컬했지 유급 위기는 늘 나와 함께였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게 본2때인데 그것도 성적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공부 안하다가 돌팔이 되면 진짜 환자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빡공을 하게 된 것인지라 나의 예2-본1 이 시기는 뭐 어마어마했다. 


약리학에서도 큰 위기를 한번 겪어본 적 있는데 이것은 후에 다시 푸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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