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조경민 [875628]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2-01-07 01:29:21
조회수 14,562

국문과 전공 수업 때 쓴 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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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문제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문학하는가'에 대해 2시간 동안 자유롭게 서술하는 거였음





2019117033 철학과 조경민

2021-2 <문학이란무엇인가> 중간고사 답안


 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문학을 하는 이는 없다. 사람은 우선 문학하고, 그 뒤에 자신이 문학하는 이유를 구한다. 이는 ‘문학한다’라는 행위가 우리의 본질적인 1차적 욕구로 인해 발현되는 이후에, ‘왜 문학하는가’의 물음이 우리의 존재론적 당위성에 대한 2차적인 욕구를 필연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일 테다.

 그 전에, ‘문학하다’란 무엇인가? 나름의 인문학적 교양을 가진다는 궐자들은 이에 각각의 호사스런 정의를 내리겠으나, 기본적으로는 ‘나’의 생각을 언어의 형태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근대의 문학이 가지는 모순은 바로 이러한 정의에서 비롯한다. ‘나’의 개인성이 ‘언어’의 사회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문학이고, 따라서 우리는 ‘온전한 나 자신’이 되면서, 동시에 ‘다수의 나’가 된다. 근대문학의 주체들은 끊임없이 ‘개인’을 탐닉해왔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을 개척해 왕국을 만들었고, ‘무정’의 형식은 사회와 자신을 거리 두며 계몽의 주체가 되고자 소망했다. 사회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나, 사회와 구별되는 나의 단위는 근대문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첫 번째 목표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 수단을 ‘나와 세계 사이의 대립’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모든 언어는 사회적이다. 주체적 개인이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도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사회적으로 발산된다. 지금 우리 각각이 근대적 개인일 수 있는 것은 문자의 보급과 산업혁명 등의 역사적 배경 덕분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사제의 탄식이 예고했듯, 문자의 발생 이후 기존의 단일한 덩어리로서의 사회는 점차 분할되고 개인은 비편재화됐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로 인해 각 개인이 비로소 개인이고자 하는 욕망을 자각한다. 어쩌면 ‘온전한 나 자신’의 욕망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욕망, 사회와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장 사회적인 방식으로서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모순적인가? ‘나/우리는 글자로 숨 쉰다. 나는 언어로 실천한다. 우리는 문학으로 대화한다.’ 개인이고자 함은, 그리고 사회와 구별되고자 함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실천될 수 있다. 문학하는 일은 사춘기의 중학생이 몰래 일기를 쓰면서도 누군가가 그것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어떤 연약한 바램과도 같을지 모른다.

 요컨대 ‘문학한다’는 괴롭다. 가장 달콤한 바램을 성취될 수 없는 방법으로, 온몸으로 부딪쳐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널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문학은 ‘단지 읽고 쓰는 과정’과 차이가 있다. 확정되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관측해내어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언어의 형태로 포착해낸다. 그런데 장자가 일찍이 통찰했듯, 생각을 말로 뱉으면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언어로 표현해낸 생각은 생각 그 자체의 모습과는 필연적으로 차이를 지닐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이 ‘지금 이 순간,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소리성 덕분이다. 말로 내뱉으면서 문학은 실제의 나와는 구별되어 또다른 실체가 된다. ‘나는 문학한다’ - 이는 ‘나’와 ‘문학’이 동일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말이다. 나의 ‘문학’은 내가 아니다. 나이고자 했던 몸부림에서 부수적으로 산출된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그래서 ‘왜 나는 문학하는가?’ 서두에 말했듯 이는 우리의 2차적인 물음이다. 왜 그렇게 개인이고자 몸부림치는가? 자신 안에서 사회를 지워낼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나와 사회를 대립시키는 것은 결국 자기부정과 자기혐오로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 김수영의 구절을 빌려,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 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이 왜 거리에 나와 집을 보고, 집에 앉아 거리를 그리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 역시 우리의 욕망에 근거한다. 문학하는 행위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두 요구에 근거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가’의 메타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내포한다. ‘왜 나는 문학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나는 문학해야 하는가?’의 의문으로 이어진다. 다시. ‘왜 나는 문학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왜 인간은 문학하는가?’로 넘어간다. 첫 번째 질문이 ‘나’가 ‘문학한다’는 사실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마지막 질문은 ‘인간’이 ‘문학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에 대한 질문이다.

 앞서 ‘왜 인간은 문학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루었다. 그러나 문학이 인간 욕구의 소치라는 사실은 당위로 나아가지 못한다. 문학의 당위가 오로지 ‘문학’ 그 자체가 실체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면, ‘문학한다’의 당위는 그러한 문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로 이어질 때에 성립한다.

 문학은 의미를 표현하지만 그 발현은 소리로 이루어진다. 소리성을 가진 실체는 다시 타자에게(그러나 ‘나’에게) 전달된다. 그것은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며,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로부터 수신자는 다시금 전방위적인 발신을 욕구한다. ‘우리는 문학으로 대화한다. 그리고 귓속말하듯이, 누군가의 세포 속으로 스며든다.’ 이는 가장 개인적이고자 하는 문학이 다른 개인에게 동력의 원천을 제공하는 과정이다. 발신되고 수신되는 메시지는 때로는 고발이고 때로는 위로이며 어쩌면 사랑이다. 이런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수신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문학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각각의 메시지가 큰 힘을 가진다는 사실이 판명한 것일지라도, 그것 각각이 과연 가치있는 것인가는 그 역시 주체로서의 개인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문학한다’는 괴롭다. 우리는 때론 ‘무릎 꿇고 괴로워하면서 눈물 흘린다’. 완료될 수 없는 개인성의 실현을 끝없이 온몸으로 시도하는 시지프스의 울음이다. 그로써 산출된 ‘문학’은 우리 삶의 큰 동력이 되나, 문학하는 주체 대개는 문학의 이러한 사회적 효용성, 타자에게의 영향을 동기로 문학하지는 않을 테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생물의 선택과 행동은 개체 단위의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문학하는’ 개인은 인간 내면의 참을 수 없는 욕구로 문학하며, 문학하는 자신을 발견한 뒤 메타적인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까지도 어쩌면 우리가 욕구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 고통을 마침내 수용하고 긍정했을 때 인간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초인이 된다. 곧, 문학 작품들이 우리 내면에 영감이자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면, ‘문학한다’라는 행위는 인간 개인의 본질, 혹은 순수하게 완결된 개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 ‘왜 나는 문학하는가?’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문학한다’는 스스로 가치를 만드는 주체가 되기 위한 과정이고, 문학은 다시금 ‘문학한다’의 원천이 된다. 이로써 문학은 하나의 영역으로 완결된 순수한 자족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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