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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시계 [342948] · MS 2010 · 쪽지

2013-12-16 16:44:18
조회수 18,268

어느 3수생의 수험생활 회고록, 연경 합격 수기.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4085902


 



안녕하세요, 멈춘시계입니다. 3년의 시간이 걸려 비로소 파란 많았던 제 기나긴
수험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이 글은 그 동안의 수험생활에 대한 합격 수기이자, 길지 않은 제 인생에 대한 짧은 회고록이기도 합니다. 긴 입시를
치른 만큼 힘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역경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려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다름아닌 저보다 이 길을 먼저 거쳐간 선배들의 수기였습니다. 그분들의 수기는 한줄기
빛처럼 언제나 수험생활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때론 절 위로해 주었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제가 받은 만큼 저도 이
뒤를 이어 힘든 입시를 겪어나갈 후배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주고 싶습니다. 수기는 제 수험생활에 대한
회고록이기도 하므로, 독백체로 쓰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짧기에, 또 저라는 인간 자체가 그리 훌륭한 인간은 못 되기에 저의 부족한 생각, 행동이 드러나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타산지석으로 삼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최대한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저를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면서 느낀 그대로를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4부로 구성을 나누었습니다. 스압은 양해해 주세요^^;; 제 글이 성취를 꿈꾸는 어느 수험생의 가슴에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고등학교 이전)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나는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던 사람이었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늘 뭘 하고 놀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시험공부는 항상 벼락치기였다.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학원은 빠지기 일쑤였고, 학원 숙제마저 항상 답지를 베끼는 등 제대로 해간 적은 기억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교과목을 스스로 공부해 본 기억도 거의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 타율에 의한 공부였을뿐. 이때는 철이 없어 그것이 부모님께 매우 죄송스러운
일인 줄 몰랐었다. 하지만 요령이 좋았던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성적대는 항상 중간 이상을 유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부끄러운 모자란 성적이지만 그때는 이정도 공부하고 이정도 성적을 받을 걸 보면 난 천재구나하는 오만하고
ㅂ.ㅅ.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주 열심히 했다.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음악을 듣다보니 그것을 직접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특히 피아노 연주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강제로 시켜서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내 스스로 영혼을 다해 좋아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인 것 같다. 하루종일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을 때도 많았다. 학교 음악시간 시작
전후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유일하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또 우연한 계기로 드럼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데,
드럼을 배우고 싶어서 드럼학원을 부모님 몰래 다니기도 했다. 나중에 걸려서 엄청나게 혼나기는
했지만드럼 또한 한창 빠져있을 때는 미친듯이 연습했었다. 온종일
마음속으로 드럼연주를 시뮬레이션 한 적도 많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모여 취미로 밴드를 결성했었다. 1 때부터 매주 주말에 연습실을 빌려 합주를 하곤 했다. 3학년 때는 학교 축제에 나갔는데, 그때 했던 공연과, 평상시의 합주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 중 하나에 속한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편 중3 하반기, 나는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본의 아니게 외고 입시를 치르게
되었고, (당연히)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불합격이라는
글자의 충격은 정말 컸다. 며칠 동안 공황 상태에 빠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쓸모 없는 먼지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죄송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 헌신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가족을 위해 힘들게 일하시는
아버지의 삶을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좋아하는 일이었지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능도 없는 것 같았다. 또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내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할 텐데 음악을
업으로 삼아서는 떳떳한 남편 혹은 아버지가 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음악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음악을 업으로 삼는 분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음악으로 성공할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음악을 내 활력소로서 취미로 할 것을 결정했고, 무엇을
내 업으로 삼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그렇게 고뇌는 계속되었고,
과정에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의 학벌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또한 그것을 발판으로 열리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업으로 삼고 싶은지는 아직 몰랐지만, 무엇을
하든 이 사회에 적응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교를 가야만 한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일반적인 경우). 그러나
나는 어린이집 때부터 10년 넘게 살아온 동네에서 공부에 몰입을 하기 힘들 것 같았다. 무언가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었다. 이 생각에 부모님도 공감을 했고, 그렇다면 화끈하게(?) 전국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대치동으로
이사가는 것을 제안하셨다.



 그렇게
나는 중3 겨울방학,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다음해, 8학군 고등학교 중 한곳에 배정받게 된다. 목표는 확고했다. 반드시 좋은 대학교에 가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리라.



 



2.(고등학교)



그해 겨울을 아주
혹독하게 보낸 탓에 1학년 첫 내신시험에서의 성적은 중학교 때에 비해 크게 상승했다. 그러나 기본실력이 워낙 바닥이었던 탔에 한계가 있었고, 나름대로
목표는 높았던 지라 만족스럽지 못했다. 미친듯이 공부만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정말 절박했다. 1 1초가
그렇게 소중한지 그때 깨달았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아껴서 공부시간을 더 확보하고자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밥 먹는 시간도 최소화하려고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 중에 하나는, 식사시간을 스탑워치로 재서 타임어택하는 것이다. 특히 점심은, 종이
치자마자 매점에 가서 빵과 우유를 사서 즉석으로 때우고 점심시간 내내 자습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이 때 실력이 오르기 위해서는 공부 시간과 공부 방법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실력은 지속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확 하고 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효율적인 방법을 고민해 가면서, 꾸준히
시간을 투입한 결과 고2 첫시험에서 난생 처음 전교 1등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내신에서는 계속 전교 수위권의 성적을 계속 유지했고 3학년에 올라가면서 문과 수석 진급자가 되어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모의고사
성적 또한 2학년 때부터는 전교 top급으로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 재미있는게, 무엇을 잘하게 되면 그것에 흥미가 생기게
되고, 그것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
무엇은 바로 공부였다. 어느샌가 목표도 목표지만 공부하는 것 자체가 그냥 재미있었다.



그런데 고3 개학 이틀 전, 시련이 내게 찾아왔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그날 아침부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미칠듯한 어지러움이 한 순간도 쉬지않고 계속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마치 누가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어 대는 느낌, 낭떠러지에서
한없이 떨어지고 있는 느낌 등 어떤 말로 표현해도 그보다 심한 어지러움증이 온종일 지속되었다. 일반적인
어지러움증이 아니었다. 구토가 나고,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아니, 너무 어지러움증이 심해 의식을 유지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1초마다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일상생활조차 너무나 힘들었는데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3
월 한달 내내 병원을 전전하며 각종 검사란 검사는 다 해봤다. 그런데도 좀처럼 원인이
나오지 않고 정상이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 병은 현대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인가 보다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좌절스러웠다가장 중요한, 공부의 절정을 달려야 할 시기에 이런 원인 모를 병에
걸린게 한없이 슬펐다.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주를 연속해서 결석한 적도 있다. 어지러움으로 인해 한 글자 한 글자 읽기가 너무나 힘들어 공부할 때는
정말 악을 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의식을 유지하면서 공부를 해야했고, 시험시간에는 문제를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말도 안돼는 실수로 억울하게 틀리는 문제도 매우 많았다. 그래도 포기는 하지 않았다. 내신시험은 친구들에게 학교 수업 녹음을 부탁해 녹음파일로 수업을 보충했고, 필기
등을 보고 간신히 따라갔다. 그래도 반 1등과 전교 10등 이내의 내신과 10등 이내의 모의고사 등수를 유지한 것을 보면
죽기 직전의 상황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진짜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니까....



신이 도운건지, 발병 후 약 1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이비인후과 검사를 통해 마침내
병의 원인을 찾아내었다. 몸의 평형을 담당하는 전정신경이 마비가 되었던 것이다. 가끔 이를 이석증과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석증과 전정기능장애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신경이 맛이 갔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니 그 동안의 증상이 이해가 갔다. 예를 들어, 장염 같은 병은 배가 아팠다 안 아팠다 하는 증상이
반복된다. 그런데 내 병은 신경 자체에 문제가 생기니 24시간
내내 단 1초도 쉬지 않고 증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을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기뻤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우스울 수 있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문제는 이게 재활운동을 하는 것 이외에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는 것이다. 호전되는 속도도 매우 더뎠다. 다행히 6월 이후에는 증상이 약간 호전되어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어지러움증은 그 다음해 3월까지 꼬박 1년을 나를 괴롭혔다. 집중 유지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심지어는 수능시험을 보는 날에도 어지러움증은 계속되었다. 공부와
관련없는 이야기지만,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게 이 병이 원망스러운 것은 고3때의 추억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이다. 좀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친구들과 보냈다면 좋았을걸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는 3학년 단톡방에 스승의 날 때 선생님과 친구들이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나에게
그 추억은 없다. 학교를 못나갔기 때문에. 수능은 다시 쳐도
되지만 학창시절은 다시가 없다. 그것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그 사진을 보고 눈물이 났다. ‘1…’



 이러한
상황 때문에, 나는 12학년도 수능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내 성적은 고려대 사범대가 적정한 점수라는게 중론이었다. 그런데
주변에는 고3때 피크를 쳐서 서울대급 점수를 받고, 정시로
결국 서울대를 간 친구들이 꽤 많았다. 그 친구들이 고3 초반기에
쳤던 모의고사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던 내 성적보다 꽤 차이가 날 정도로 낮았기에 나는 끝없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내가 이 병만 아니었어도….이것만 아니었어도 이것보다 훨씬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친구들의 결과에 대해 화가 나는 게 아니었다. 친구들도 노력해서
이뤄낸 결과이다. 박수 받을 일이다. 내가 화가 났던 것은
병에 걸린 내 자신이었다. 분했다. 3때 그런 병에 걸려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도 못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했다.
나는 정시 원서를 쓰기도 전에 재수를 결심했다.



 



 3.(재수)



상위권 재수생(표현이
좀 웃기지만)은 강대에 간다는 것이 우리 학교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므로, 그리고 주변에서도 강대에 갈 것을 권유했으므로 나는 강남대성에 들어갔다. 상반기에는
정말 열심히 했다. 족쇄와도 같던 병마에서 벗어나니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빌보드에는 계속 들었고, 가끔 끝자락에 들기도 했지만 8, 18등과 같이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었다. 6월 평가원 시험에서 전국 0.08%의 성적을 거뒀고 이걸로 오르비에서
에피를 달았다. 논술 대비도 철저히 해야겠다 싶어서 논술실록 저자인 페로즈님께 페로즈님 제발 불쌍한 재수생 구제한다 생각하고 논술 좀 가르쳐주세요ㅠㅠㅠ쪽지를
보냈고, 논술 과외를 받으며 수시도 착실히 준비해 나갔다.



 재수생활은 9월까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9월 평가원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받았다.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도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불안해졌다. 자습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고(원래 그랬지만 이때부터 더욱), 학원 수업을
잘 안 듣고 자습을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 자습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결국 나는 학원을 잘 안 나가고 강대에 적은 두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독학생과 다름없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돈이 아깝지 않냐라고 물었는데 당연히 돈이 아까웠다. 부모님께는 환불받자고 했는데 부모님은 소속이 아예 없으면 좋지
않다라는 이유를 들어 등록을 계속 하셨다. 나는 잘 이해가
안되었지만, 부모님도 이것이 당신들의 철학이었던지 결국 관철하셨다. 독학은
초반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9평 직후 월례고사(학원수업은
안나가고 시험만 보러감;;)에서 빌보드 약 50등 대로 다시
회복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점점 생활이 무너져 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이 무너지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와
수능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 멘탈을 붕괴시켰고 그것이 공부에 악영향을 주고,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에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잠 못드는 불면증이
찾아오고….악순환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안돼는
뻘짓을 하나 했는데, 바로 매일 사설모의고사를 1개씩 푸는
것으로 언어영역 공부를 한 것이다. 아직도 내가 이 때 왜 이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 두 가지가 내 재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 현역,재수 때 평가원에서 시행한 언어 시험점수는 100,100,96(12수능),100,98로 항상 1등급이었기 때문에 순전히 언어 때문에 수시가
일반선발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재수는 실패했다. 왜냐면
백분위가 현역 때랑 똑같이 나왔기 때문이다. 고경 논술은 수리 답이 틀려서 일찍이 포기한 상태였고, 연대 논술은 잘 썼다는 느낌이 있어서 마지막 희망을 연경 논술 일반선발에 걸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대기 42. 광탈. 그 후로 여차저차해서(페로즈님의 천재적인 정시상담으로…) 스카이 중 한곳의 하위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페로즈님은 수험생들을
진심으로 위하면서 상담을 해주신다. 논술 수업도 그렇고. 그것이
인터넷에서는 어떻게 왜곡이 되었는지 참 안타까울 때도 가끔 있다. 이 말도 광고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아무튼 내가 받은 느낌은 그렇다. 어쨌든 그렇게 합격은 했으나 내 마음속에는 크나큰 아쉬움과
후회가 남아 있었다….



 



4.(삼수)



 



정시 원서를 쓸 때는 거기 들어가서 고시를 치겠다는 생각으로 지원을 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정책을 만드는 일 등에 관심이 있었으니까그런데 자꾸만 마지막에 했던 두 가지 잘못된
행동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리고 원래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된 현실이 싫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에 잠깐 에피옵티무스 모임에 나갔었는데, 그때
각별히 친해진, N수로 대학을 가신 몇몇 분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삼수
무지막지하게 힘들지만 성공만 한다면 해도 괜찮다는 것(사회 진출까지 큰 무리 없다는 것)과 몇 가지 멘탈 관련 조언과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 것 같았는데,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마지막 도전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치아를 다쳐서 수술을 해야 했는데, 입시 때문에 계속 미뤄오다 올해가 지나면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소견이 3월 즈음 나왔다. 그렇게 공교롭게도 3월 말에 수술을 받게 되면서 학교는 질병 휴학 처리를 했다. 수술은
반수를 공언하지 않고 휴학을 할 수 있는 적절한 핑계가 되었다.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같은 과 동기들과 몇 명의 선배들이 병실까지 와서 격려를 해주었다. 정말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만약에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더라도 이 사람들과는 인연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수능공부는 틈틈이 계속 하다가, 몸이 5월 초 쯤에 상당히 회복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작년 실패의 교훈은, 나는 종합반 체질이 아니라는
것과 생활관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언어 영역은 기출이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올해는 독서실처럼 풀 자습을 할 수 있으면서도
출석체크로 생활 관리를 해주는 독학학원에 등록을 하게 된다. 언어영역도 홀로서기에서 전개년도 모든 언어 기출 모의고사를 전부 주문해서 풀게 된다. 그리고 마닳도 1바퀴 돌렸다. 본격적 삼수를 시작하고 한달 뒤, 6평에서 언수외 300을 찍게 된다. 이대로만 하면 성공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름에 동생 유학
때문에 미국에 나가 계시던 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귀국했다. 어머니께서는 온 김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유방 쪽에 혹이 있어서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소견이 나왔다. 검사
결과가 확실히 나오려면 몇 주는 있어야 했기에 그 기간 동안은 공부가 거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머니는 유방암 확진을 받으셨다.
후로도 며칠간은 온 집안이 울음바다였다. 다행히 전이가 없는 초기 단계여서, 마음을 추스린 후에는 온 가족이 힘을 합쳐 극복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몇 달 간 일을 비서를 통해서 처리하기로 하고, 동생을 케어하러 8
즈음 출국하셨다. 나는 어머니 간병과 수험공부를 같이 병행 해야만 했다. 초기라고는 해도, 항암의 어려움은 모든 암 환자들이 같은 정도로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이 마지막 기회를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해 나갔다. 9평은 영어를 2개 틀리고 나머지 모두 만점. 영어에서 조금 방심을 하게 된 것 같았다. EBS를 무한반복하고, 단어도 꾸준히 외웠으며, 문법 문제도 매일 2문제, 10년도 이후 모든 빈칸기출 정리로 남은 기간 영어학습을
진행했다. 대망의 수능 날. 이 정도로 열심히 한 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런 후회나 아쉬움도 없었고,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단지 결과에 상관없이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이젠 더 이상 못하겠다고, 이번 수능 결과는 온전히 내 실력이고 나는 이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과, 적당한 긴장감이 나를 휩싸고 돌았다. 리웰 형님의 정신을 철저히 이성적으로 유지하라라는 조언을 계속 세뇌시키면서 감상적이
되려는 마인드를 컨트롤 하려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래도 언어
1
문제와 영어 1문제가 끝까지 헷갈렸는데,
두 문제는 결국 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쉽지는 않았다.
문제는 내가 수능이라는 시행을 아무리 반복해도 맞추지 못할 문제니까. 그 만큼 이번 시험은 나의 전부를
쏟아 부은 시험이었다. 백분위 추정을 해보니, 연고 프리패스에
서울대는 경사 논술 경합 혹은 농경,소아,인문 적정권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그래서 열심히 논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경 수시를 올해도 써놔서, 수시 발표가 있던 주에는 아무것도 못했다.
결과는 대기 1…. 붙은 것도 아니고 떨어진
것도 아니고 기분이 참 묘했다. 추가 합격자 발표일까지 신분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추합자 발표 전날에 친구와 부산으로 즉흥여행을 떠났다. 다음날 새벽, 마침내 내가 스스로 만족할 만한 학교의 학과에 합격했다는 글자를 보게 된다.
그 날 송정해수욕장 해안가에서 본 일출은 정말 의미가 깊었다. 떠오르는 저 태양이 내 인생과
같게 느껴졌다. 긴 어둠과 새벽을 지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태양처럼 내 인생도 긴 수험생활의 어둠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시작하는 거라고….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정오의 태양처럼 높게, 멀리, 뜨겁게 빛을 비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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