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yohwan [883212]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1-11-20 22:49:19
조회수 366

교육봉사-학생 2명을 모집합 #서울 #제주도 #의대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40735816

5년간 교육봉사를 해왔고 나름 입결도 괜찮았습니다.(이전 글 참고)

현재 지방 의과대학을 재학중이구요.


조건


지역

-제주도(올해 방학은재제주도에서  생각이여서 그동안만이라도)

-서울 목동부근(목동까지 올 수 있는 사람)


고3 이상


이과



생1 지1중 적어도 한개 이상 선택


(차상위 계층이나 저소득계층 우선 선발)


양식


고3일 경우 최근 모의성적-성별-선택과목-연락처

N수생일 경우-수능성적-성별-선택과목-연락처



오후가 아닌 밤에 이글을 올리는 이유는 작년에 오후에 글을 올렸다가 베스트까지가서 너무 많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래는 제가 과거 언론사와 인터뷰 기회가 있었고 그 때 당시 작성해둔 초본글입니다. 이글을 올린 이유는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이런 사람한테 배울 생각이 있는 분만 연락을 주셨으면 해서 올려둡니다.



 //2년 전부터 봉사의 일환으로 장애 학생 카페에서 활동했습니다. 활동 중 한 시각 장애학생의 부모님께서 제게 부탁을 하신 적이 있는데, 자신의 아이가 삶에 의욕이 없으니 혹시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장애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할 수도 없었고, 그 아이의 삶이 앞으로 행복해질 것이라 말해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마 저처럼 미래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를 돕기 위한 수많은 복지 제도가 있긴 했지만, 실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미래는 너무나 불안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그런 아이들에게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한 선택들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주체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의존성이 불가피하게 형성되기 쉽습니다. 누군가의 배려가 필수적인 상황들도 있고, 그 배려가 없다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일을 스스로 결정했고,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조금 특이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판사, 검사이신 부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한 일은 제가 책임지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 집에는 10년 전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인터넷을 할 수 있는 공유기는 물론이고 에어컨, TV조차 없었습니다. (에어컨과 TV는 올해 설치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교육에 특히 엄격하신 것도 아니셨습니다. 제 돈으로 PC방에 가는 것에 반대하시지 않으셨고, 인터넷도 제 돈으로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허용해주시는 입장이셨습니다. 다만 그렇게까지 하셨던 이유는, 제가 장애가 있든 없든, 무엇이든 주체적으로 하길 바라셨기 때문이죠.


이러한 가정 환경은 제가 성인이 된 후 의대에 가기 위해 반수를 할 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반수를 위해 돈을 모아야 했는데, 청각 장애 때문에 일반적인 알바는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상하차 알바를 시작했습니다. 2년 간 매년 설날을 중심으로 2~3주 동안 상하차 알바를 해 돈을 모았습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견뎌내며 3개월 정도 공부를 한 뒤 수능을 봤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의대에 가게 되는 상황이 되어서야 제가 수능을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수능을 그럭저럭 잘 보고도 돈에 발목을 잡혔습니다. 당시 접수했던 의대들의 논술 최저 학점은 다 맞추었지만, 모아둔 돈을 수험 생활을 하며 다 썼기에 정작 논술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습니다. 후에 대학을 선택할 때도 금전적인 문제가 고려되었는데,소득분위로 국가 장학금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부모님께서 제가 받는 장학금은 개인적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제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대학을 선택했고, 그 장학금 덕분에 제 주머니 사정에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소에 하던 장애 학생 상담을 넘어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봉사(과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러 아이를 가르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가 성인이 된 후 한 선택들입니다.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은 아이러니합니다. 누구보다도 경청하고 싶지만 경청하지 못하기에 상대를 무시한다는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특히 지금은 코로나19 사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같이 입 모양을 통해 대화하는 사람들은 매장 직원의 “포인트 카드 있으신가요?”라는 말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때도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매장을 이용할 때마다 청각 장애인임을 밝힐 순 없기에, 지금도 많은 청각 장애인들은 남을 무시한다는 오해로 고통받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사에서 특히 이 점을 언급해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말에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상대방이 마스크 때문에 말을 듣지 못한 청각 장애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의대에 온 이유는 단순합니다.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서죠. 매년 유모세포(청각세포)에 대한 논문이 나올 때마다 읽어왔고, 그때마다 생겼던 일말의 희망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전 희망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희망을 만드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은 장애의 본질적인 치료법을 위한 연구의 길입니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저 또한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 인생을 전부 바쳐도 실패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겠죠. 하지만 제가 죽기 전까지 연구했던 것들이 훗날 저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 디딤돌이 된다면, 그 삶은 충분히 의미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의대에 왔고, 그러한 의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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