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4Answer [592707] · MS 2015 · 쪽지

2021-08-18 02: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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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학원에서 근무했던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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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 1학년, 동아리 일정으로 인해 방학때 서울로 가지 못하고 학교가 있던 지역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어야 했던 시기였다. 


어차피 자취방 월세는 계속 나가는거, 이참에 학교 근처에서 돈이나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주변 학원의 구인공고를 보고 다녔다. 


본인의 강점이라고 한다면 오랜 기간의 입시 생활을 통해 지2를 제외한 모든 과탐을 다 찍먹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고 마침 그 지역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학원에 과탐 강사 구인 공고가 있어 고민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 고대때 친한 친구가 자기 고향인 광역시에서 오랜 기간 강사로 일했는데, 나 정도 학벌이면 이랏샤이마세 수준으로 대우받을거라고 해서 진짜 그런가 호기심이 동한 것도 이유이긴 했다. 


원래 내 주 강의과목은 국어와 물리학1이긴 했지만, 강의해본 짬바가 얼마인데 솔직히 말해서 화생도 고3 개념강의 수준이면 걍 참고서 한번 읽기만 해도 어떻게 강의해야 할지 대충 그림 다 그리고 들어갈 수준이긴 해서 뭐 그렇게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일요일에 예과 수료 증명서를 들고 갔다(정식 강사로 일하려면 법적으로 2학년 이상의 대학 수료 경력이 있어야 한다) 

원장님이 오셔서 참고서 하나 주더니 단원 하나 보고 시강을 함 해보라고 하셨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테니까 한번 그 단원 읽어보시고 설명을 해보세요" 

"네"


그리고 5분동안 그 단원 쫙 보고 그냥 청산유수로 강의를 마쳤다. 당시 강의 짬바 5년, 대치동에서의 학원조교로 학생들의 기상천외한 질문들 다 받아쳐본 경험도 있었고...거기에 일반화학 유기화학까지 뒤져라 대가리에 때려넣은 의머생한테 화학1, 생명과학1 개념강의는 막말로 당일날 술처먹고 가서 해도 될 정도로 쉽긴 했다. 물론 절대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 통보를 받고, 계약서를 썼다. 마침 학원에서 관리하던 최상위반 선생님이 무슨 실습 일정 때문에 빵꾸가 나버려서 바로 그 반으로 들어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솔직히 그 학원에서 엄청 애지중지 키우는 핵심 학생들이라는 말에 약간 긴장되긴 했다. 애들이 너무 잘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 약간 머치동에서 조교하던 시절 킬러문제들 들고 와서 즉석에서 다 풀어야 했던 긴장의 시간들이 재현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솔직히 강의 전 첫날은 잠을 좀 설쳤던 것 같다. 


그래도 나름 강사인데 준비는 빡세게 해가야 하지 않냐는 생각에 문제지 다 풀고, 수능에서 꼬아서 퍼즐맞추기를 시킬 경우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전략 정도는 세워서 갔다. 약간 윤즈 열화판 버전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애초에 화1 생1 전문 강사가 아니니 뭐 이거 이상 준비도 한정된 시간에 불가능하긴 했고.


그리고 강의 첫날, 나는 비광역시권 지방과 강남 8학군의 학력 격차가 얼마나 심한지 몸으로 느끼고야 말았다. 


딱 교실에 들어선 순간,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솔직히 해설지 이제 가방에 던져버립시다. 해설은 내가 합니다 이제. 아시겠어연?"


그리고 준비해 간 모든 것을 다 풀어버렸는데, 난 솔직히 상술했듯 머치동때 가락이 있다 보니 학생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 엄청 했다. 아니 근데 이걸 보는데 세상 처음 보는 신문물 보듯 나를 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님 저런 풀이 첨봐요." 


음 나는 그때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당신들 모의고사 준비하면 이걸 보고 신기해하면 안되는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음날 원장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매우 만족한다는 내용이었다. 뭐 으레 하는 인사치례겠거니 하고 넘겼다. 


원래 루팡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냥 여기서 각 보고 대충 책으로 시간이나 떼우다 가자 이렇게 해도 될 것 같긴 했다. 근데 또 본인이 약간 완벽한 준비(?) 이런거에 강박이 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기는 죽어도 싫었다. 뭔가 여기서 경력 좀 쌓고 한단계 스탭업 해서 이제 강의 영역을 좀 넓혀봐야겠다는 야망아닌 야망이 있기도 했었고. 


그렇게 한달이 좀 넘는 시간동안 이 학생들과 부대끼면서 내가 전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전수하고 왔었다. 


그 과정에서 수업 첫날처럼 충격받은 에피소드가 몇개 더 있었다. 


일단 이해 수준이 머치동 친구들과 확연히 다른 것과는 별개로, 다들 학교에서 내신으로는 한가닥 하던 친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도 궁금해서 나중에 내신 시험문제를 한번 본적이 있는데 이 때 한번 더 충격을 먹었다. 아니 썅 이건 서울권 일반고 수준보다 쉬운 시험문제들급 아닌가? 나름 지역에서 알아주는 학교라는데? 


두번째는 한 학생의 입시상담이었다. 나름 내가 잔뼈가 굵다는걸 아니까 물어본거 같기는 한데, 진짜 내가 생각도 못해본 학교의 입결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뭐 아는 바가 없으니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학원 시스템도 뭔가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종합학원식으로 운영을 하는데 한번 수업시간도 굉장히 짧고 무조건 전과목을 다 수강해야 하고(전반적인 학생 코칭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이 있긴 했다) 하루에 한시간반정도 짧은 수업을 세개 정도를 듣고 가야 했다. 다 다른 과목으로. 내가 고등학교때 다니던 내신대비 보습학원보다 못한 커리큘럼이 아니겠는가. 내가 필요한 과목 단과를 신청해서 최소 두시간 빡세게 조지는 머치동식 교육 시스템에 익숙해 있던 나는 도저히 이 주먹구구식 운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저렇게 하는게 얼마나 상위권에 도움이 된다는거지?


지역인재나 농어촌 전형으로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 대학 공부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지 대강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경쟁자의 수준이 다르고, 같은 상위권 소리를 들어도 그 편차가 너무 심해서 정확한 내 학습수준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학원들이란 곳은 상위권 학생의 니즈에 맞추기보단 전반적으로 햐향평준화에 가까운 수업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필요한 부분을 보강하기도 쉽지가 않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인강으로 그런 학습격차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인강에 대한 정보마저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업 마지막날, 나는 학생들에게 최대한 내가 아는 인강 정보를 다 주고 수업을 끝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할 줄 알면 학원의 커리큘럼에만 수동적으로 맞춰가려 하지 말고, 스스로 필요한 부분은 좀 더 보강을 하라는 조언 이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학원에서는 나에게 아예 원래 선생님 돌아오더라도 지금 반 그대로 맡길테니까 계속 정규강사로 일해주면 안되겠냐 물었지만 나는 좋게 거절했다. 솔직히 내가 하는 강의 수준에 비해 돈을 노동착취에 가깝게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여기서 내가 계속 있어봐야 사교육계에서는 지방 보습학원 선생 이상의 커리어를 가져가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노동 착취를 당할거면 대치동에서 수험생 응대 조교로 구르면서 킬러문제들 ㅈㄴ풀이하는게 내 커리어에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오르비에서 농어촌이나 지역인재 전형 관련해서 파이어가 터지긴 하는데, 난 직접 참담한 교육의 실태를 보고 나니 참 뭐라고 내 의견을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교육도 내가 보기엔 진짜 개판 오분전 주먹구구식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흔히들 지방 ㅈ반고라 불리는 곳들의 공교육은 얼마나 무너져 있을까 안봐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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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학원이 학생들한테는 잘해주는데 강사들한테는 맨날 회식강요하고 꼰대질하는 개 블랙학원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와 회식강요를 한번도 안당하다니. 이것도 나름 이랏샤이마세급 대우라면 대우였던건가. 그리고 거기 정규강사로 눌러앉지 않은것은 참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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