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andonedS [59684] · MS 2004 · 쪽지

2013-11-07 19:40:03
조회수 11,194

낙심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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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언제나 수능날과 그 다음 날에는, 많은 학생들이 오르비에 삼삼오오 모여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저는 이쯤에서, 아주 먼 옛날, 여러분이 초딩꼬꼬마이던 시절 있었던 한 사람의 입시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때는 2005년. 각종 모의고사 언어와 수리에서 거의 고정100퍼를 받고, 외국어가 1~2등급 사이에서 간당간당하던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수능시험을 치게 되었고, 참으로 이기적인 바람을 갖고 수능시험장에 들어갑니다. '언수는 아무리 어려워도 잘 볼 자신 있으니까 어렵게 나오고, 외국어가 쉽게 나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 일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죠.

2006학년도 수능 언어는 역대급 물이었습니다. 1컷 98. 운 나쁜 친구들은 한 문제만 틀리고도 2등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은 채 30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60문제를 다 풀고 멘탈이 터졌습니다. 수능이 말도 안 되게 쉽다는 걸 인지해버린 거죠. 그리고, 무려 두 문제를 틀리게 됩니다. 96점이었죠. 10월 서울교육청 모의고사에서 99.93%를 받았던 이 학생은, 정작 수능에서는 소수점 뒤에 있는 저 숫자보다도 낮은 백분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연쇄작용이라는 게 있는 법이죠. 터진 멘탈을 부여잡으며 본 수리영역에서, 4점짜리 하나를 마킹실수하고, 3점짜리 하나를 마지막에 2로 안 나눠서 또 날립니다. 93점이네요.

밥을 먹고 나니 멘탈을 좀 찾았는지 외국어와 사탐은 평소실력대로 풀었지만, 이미 말아먹은 언수를 복구할 방법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은 재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냥 동네에 있는 논술학원을 공짜로 다니긴 했지만, 정작 수업에는 관심따위 없었고 학원이 끝날 때마다 친구들과 피씨방에 가서 스타1, 스페셜포스, 카오스를 하는 것이 낙이었죠.(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논술학원이 얼마나 허접했는지 참..... 당장 제가 가르쳐도 그따위 수업은 안 할듯)

이 학생에게는 그 후에 재미있는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서울대 지균에서 일찌감치 1차 광탈한 이 학생은, 딱 하나 넣어두었던 수시2학기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일반선발에서 5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합격합니다. 이미 재수를 결심했던 이 학생은, 2006년을 재수학원이 아닌 안암학사(고려대학교 기숙사)에서 시작하게 되죠. 그리고 어느새, 졸업을 바라보는 시기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이 학생이 만약 수시논술에 떨어졌다면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 되었을 거라는 겁니다. 2006학년도 정시에서 연경은 역대급 빵꾸가 났고(4%까지 털렸다고 소문이 자자했었죠), 이 학생의 정시전략은 가군 연경 나군 설경 다군 패스였기 때문이죠.

한 가지 더, 만일 이 학생이 수능을 조금 더 잘 봤다는 것까지 가정해보면 어땠을까요(수리 마킹미스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가군 고경, 나군 설경, 다군 한법을 썼을 겁니다. 그랬다면 가나군은 모두 떨어졌을 테고, 다군은 꼬리를 잡았거나 떨어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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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아시겠지만, 이 글에서의 '이 학생'은 바로 접니다.

인생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할 수 없어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겁니다. 이미 답안지는 여러분의 손을 떠났어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떤 방법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오늘 하루 정도는 실컷 울어도 됩니다만, 내일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운을 내가 받을 것이라고 믿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행동하세요. '필요 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쓸데없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동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들 진심으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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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44023 · 13/11/07 19:52 · MS 2010

    아방동님 04학번이신줄 알았는데 06학번이셨군요

  • AbandonedS · 59684 · 13/11/07 19:56 · MS 2004

    ㄷㄷ.......

  • 일격필살 · 382478 · 13/11/07 22:13 · MS 2011

    상처받은 아방돔님 ㅠㅠ

  •        · 344023 · 13/11/08 03:49 · MS 2010

    ㅠㅠ 죄송해요

  • 제주수의 · 443609 · 13/11/07 20:22 · MS 2018

    하하. 막상 시험점수를 낮게 받고보니 그렇게 직접적으로 위안이 되진 않네요ㅠㅠ.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렇든 저렇든 능력껏 나온거라 생각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열심히 살려구요.

  • Fear · 243365 · 13/11/07 20:34

    흑흑 수능은 끝났지만 입시는 끝나지 않았죠

  • 쓸닉네임이없다 · 427910 · 13/11/07 20:36 · MS 2012

    결국 될놈될 안될안이라는..
    수능 망치신 분들에게 그닥 위로가 되지는 않을듯ㅠㅠ

  • AbandonedS · 59684 · 13/11/07 21:34 · MS 2004

    중요한 건 자신이 될놈인지 안될놈인지 아직 모른다는 것.....

  • 손선­생 · 383894 · 13/11/07 20:49

    역시 인생이라는건 아무도 모르는것 같아요. 이 글을 보니 더 느껴지네요 ㅎㅎ

  • Fear · 243365 · 13/11/07 21:00

    소..손돼지!

  • Penia · 389525 · 13/11/07 21:36 · MS 2011

    06이셨던 건가요? ㄷㄷㄷㄷ

    이제 졸업하셨겠군요. ㅇㅅㅇ

  • 플라시보 · 441821 · 13/11/07 21:59

    수능, 수학B 쉽고 쉽고 정말 쉬웠습니다.... 외국어, 과탐 II과목 빼고 어려운 거 하나도 없었어요

  • ZetaOmicron · 98720 · 13/11/07 23:00 · MS 2005

    본인도 재수할 때는 몰랐는데 어느덧 지금 오르비 하고 있음

  • Slayer · 431438 · 13/11/07 23:26 · MS 2012

    좋은글 감사합니다. 조졌는데도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남은 논술전형에 목숨걸고 발버둥쳐야겠습니다. 끝날때 까지 아직 끝난게 아니니.....

  • 커어커 · 452489 · 13/11/07 23:37 · MS 2013

    근데 너무 망해버렸네요...

  • 합격루팡 · 461863 · 13/11/07 23:38 · MS 2013

    논술 평소에 잘 하셨나요? 저도 지금 일반전형에 다 걸어야 하는데 특출난 편이 아니어서ㅠㅠㅠ 희망 얻고 가요~

  • AbandonedS · 59684 · 13/11/07 23:53 · MS 2004

    제가 수험생일 때만 해도 수시가 크게 활성화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논술준비라는 것을 아예 아무것도 안하고 시험을 봤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기출문제조차 풀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만 글쓰는 것에는 원래부터 자신이 있었고, 중학생때까지 경시대회준비를 했었던 터라 수리논술에도 어느정도 자신은 있었긴 합니다.

  • 천사아이유 · 402370 · 13/11/07 23:48 · MS 2018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다들 화이팅 합시다!!

  • 천사아이유 · 402370 · 13/11/07 23:48 · MS 2018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다들 화이팅 합시다!!

  • januzai · 453401 · 13/11/08 00:26 · MS 2013

    고대학추붙엇음좋겟다...

  • 면도날리프 · 435266 · 13/11/08 02:34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또 될놈안될놈이라는건 길게봐서 대학 입학 하고도 어떻게하느냐에 따라서 또 달라지는거니 결국 자기가만드는거라고 봅니다^^ 아방동님 글 참으로 배울점이 많아요ㅎㅎ

  • AbandonedS · 59684 · 13/11/08 10:03 · MS 2004

    맞아요. 공감합니다.

    사실 저는 뭔가 한번 제대로 미끄러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때론 부럽기도 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가끔 실패하더라도, 신기하게 그 실패가 전화위복이 되어 저에게 더 좋은 방향으로 돌아온 경험이 많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실패 때문에 괴로워해 본 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게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나 싶어요.

  • 가인남편 · 350317 · 13/11/08 06:23 · MS 2010

    동갑이시네요ㅠㅠ 06수능 언어 ㅅㅂ.....

  • drokok · 364422 · 13/11/08 11:44 · MS 2011

    막내 아들때문에 들어 와 읽은 첫 글인데.... 마음이 고맙네요. 감사

  • AbandonedS · 59684 · 13/11/08 16:27 · MS 2004

    학부모님이시군요...
    이 세상의 모든 부모님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어느덧 결혼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부모님이란 존재는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그 자체만으로 위대하고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누군지도 모를 수험생의 어버이시지만, 감사드린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주신 선배님께...

  • IDSH · 410294 · 13/11/08 12:08 · MS 2017

    좋은 글이라 페이스북에 퍼가려합니다. 문제 된다면 삭제할게요

  • AbandonedS · 59684 · 13/11/08 16:28 · MS 2004

    괜찮습니다. 출처만 밝혀주신다면..

  • 바로그날 · 467205 · 13/11/08 16:12 · MS 2013

    아직 논술이 남았어요 ㅡㅡ

  • J.M.S · 414680 · 13/11/08 18:12 · MS 2012

    인생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할 수 없어요.

    저 말투 참 공감이갑니다. 서울대에 진학해서 잘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뭐.. 그냥 목표잃고 떠도는 새입니다.
    왠지 이느낌이랄까요 대형마트에서 엄마 잊어버린 한 아이의 느낌?
    인생의 목표도 없고 공부하다보면 왜 내가 이걸 하고있지?
    하고 바로 펜 놓고 침대에 달려가서 스마트폰으로 아프리카 방송이나 보면서
    낄낄 거리는게 지금 제 현실이네요 하..

    이 상황을 중지시켜야하는데 중지시키고싶지만 중지시킬 여력이 없어서
    이번학기만 끝내고 시원하게 군대 들어갈려고 합니다.

    분명히 입학 전까진 다른 대학생들 절때 안부러웠는데 그들은 그들의 목표가 있고 쭉 직진하는걸보니까 부럽네요

    입시계를 떠나면 좋을줄 알았더만 대학교때 더욱더 열심히 해야하고

    참 한번더 언급되네요

    인생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예상조차 할 수 없어요.

    참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하아 ㅠㅠ

  • 꾸당 · 437207 · 13/11/08 19:13 · MS 2012

    그 편안한 마음이 잘 안가져지네요ㅠㅠ 이렇게 울어봤자 득될거 하나 없다는거 알면서도 계속 징징대고 울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