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공사 [960875]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1-02-01 11:5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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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남겨보는 시골 소년 대치동 상경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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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달이 지나고 나름 서울 생활에 익숙해짐.


서울 생활이라 해봤자 고시원-학원을 왕복하는 일상이었음. 그리고 긴장감을 유지해주는 학원 친구들 (한번도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이 있기에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고시원을 오는 일이 별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음. 학원 직강은 이런 페이스 메이커가 옆에 있기 때문에 긴 시간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도 있었음.  고시원 앞 대신증권 건물에 수영장이 있었다는 걸 알고 새벽에 수영장도 등록해서 다녔던 기억이 남. 학원에서는 누구랑도 얘기를 할 순 없었지만, 운동을 하면서 외로움은 견딜 수 있었음.


밥은 거의 대부분 학원 건물 지하 식당에서 사먹었는데, 구조가 굉장히 특이했음. 식당과 식당사이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 개방형 식당은 처음에 참 신기했던 기억이 남. 그런데 음식들이 가격에 비해서는 많이 부실했음. 그도 그럴것이 뭐 학생이었으니까 비싼 밥을 사먹을 수는 없었음. 고향에서 내가 먹었던 수준의 밥을 당연히 기대할순 없었지만..., 하루는 학원 근처에 간장게장 전문점에 한번 들어갔다가 가격보고 기겁해서 나왔던적도 있었음. 들어가자마자 나온것이 아니고 자리잡고 한참 메뉴판을 보다가 도망치듯이 나옴. 어찌나 낯뜨겁던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내돈으로 사먹고 트라우마를 극복했던 기억이 남. 맛은 별로 였지만 꼭 극복해야할 트라우마였음. 기억은 선택적으로 남는데, 보통은 이렇게 부끄러웠던 기억은 정말 오래 가는 듯.


 이때 들었던 선생님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고, 강의력이나 이런 내용들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여서 지금 여기에 적는게 큰 의미는 없을 듯 함.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사탐 선생님 중 지리 선생님 (한만석 선생님이었던걸로 기억함)이 계셨는데, 쉬는 시간에 질문 답변도 해주셨지만 관상도 봐주셨음. 인기가 제법 있었기에 줄을 좀 섰어야 했는데, 나도 한번 가서 여쭤봄. 그때 해주셨던 말이 "노력한대로 결과가 나올 관상" 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만족했던 기억이 남. 언어영역은 강의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애매한 기준으로 찍듯이 정답을 골랐던 나에게 그래도 안정적으로 답을 찾는 법을 배웠던 것 같음. 그래도 어려웠음. 수능 때까지 어려웠음. 박승동 선생님도 계셨는데 직관적인 풀이가 정말 신기하긴 했지만, 내 능력으로는 그 직관적인 풀이를 다른 응용되는 문제들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웠음. 조금더 복잡해도 결론에 내가 자신 있는 풀이 방법이 오히려 편했던 기억이 남. 


그런 시간들을 보내다가 중요한 일이 생기는데. 두번째 달 정도에 학원 모의고사 순위에 내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함 !!


운이었을 수도 있지만 정말 뿌듯했던 기억이 남. 뿌듯한 느낌도 느낌인데 좀 이상한 느낌. 


그런데 이 조그마한 일이 나에겐 참 중요한 일이 됨.

아무 기록에 남지 않는 시험이지만, 그 당시까지 내가 느낀 가장 큰 성취감이었음. 

지금 처럼 스마트 폰이 있다면, 사진으로 기록해놓고 평생 간직하고 싶은 그런 사진이었을 것임. 


내가 대치동 생활 초반에 느꼈던 그런 기죽음이 있었기에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음. 이 친구들이 대단하긴 한데, 나도 못할건 없다라는 생각이 듬. 일개 학원에서의 모의고사에서 한번의 플루크일수도 있는 일로 너무 비약일 수도 있지만, 당시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움츠러든 상황에서의 조그마한 성취였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음.


그리고 그 조그만 성취감은 수험생활을 지속하는데 정말 큰 힘이 되어줌. 아니 이때 이 느낌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수험생활 뿐만 아니라 대학입학 이후 지금까지도 그 모의고사 게시판에 내이름이 처음 등장했을때 그걸 목격했을때의 느낌이 기억에 남아있음. 그리고 살면서 이겨내기 버거울 일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줌.

처음에 그 막막하고 기죽어 지내던 시간과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돌이켜보고, 안되겠다, 어렵겠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기억들을 되새긴 다음에 거기에서 나의 조그마한 승리를 쟁취했을 때 느낌을 돌이켜보면, 현재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김. 유튜브에 동기부여 영상들이 많이 있지만, 나한테는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동기부여 영상이 내 안에 있는 느낌. 후배들에게도 가끔 꼰대스러운 이야기를 해야할 때 아무리 조그마한 거라도 본인 만의 승리의 경험을 만들어보고 소중히 간직하라고 함. 그게 객관적으로 보기에 사소한 것일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큰 경험일 수 있다고 생각함.


 누가 나에게 가장 큰 성취감이 들었던 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런 배경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은 다른 이야기를 함. 그런데 내가 대학 입학 합격증을 인터넷에서 확인했을 때보다 그 게시판에서 내 이름을 봤을 때의 성취감이 좀 더 컸다면 믿을런지..


 대치동 선생님들의 "비급"은 결론적으로 내가 얻은 가장 큰 건 아니었음. 선생님들의 강의력은 훌륭했지만, 인터넷 강의로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음. 그런데 현장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진지함"과 "간절함"이 있었고, 수험과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정말 절실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걸 느끼게 해줌.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조그마한 성취의 기쁨이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이기게 해줬음.


한달 반정도 되는 시점에서 학교 담임 선생님께 전화가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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