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조경민 [875628]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0-12-13 13: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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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아쉬운 상위권 문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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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도 오고 연말 느낌이 나서, 수능 이후 두 번의 겨울이 생각나네요.


작년의 저한테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 적어보겠습니다.




상위권 문과 학생들은 어찌되었든 아쉬운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어요.


남들이 보았을 때는 높은 점수, 좋은 대학이더라도


자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저는 19수능 때 성적을 많이 남기고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수시도 고려대 철학과 한 장 썼어요(1차 광탈).


당시에 굉장히 염세적이기도 했고


사회성도 많이 떨어져서 남들하고 어울릴 자신이 안 났으며


당해 수능 수학을 조진 탓에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를 갈 용기가 안 났어요.




연세대 철학과, 고3때는 꿈의 학교였지만


막상 입시가 끝나니


한 문제 차이로 서울대 인문을 못 간 것이 아쉬웠어요.


저는 여러 이유를 찾아서 반수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이유들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어요.


당시의 저는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고


우울증이 굉장히 심했어요.


잘 하는 것이 수능 공부밖에는 없었고


다시 한 번 수능을 봐서 저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서 좋아하던 누나랑 관계가 망가진 것도 사실 큰 이유였습니다.





제가 만약 반수를 성공해서 서울대에 갔으면 저 문제들이 해결됐을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동기 자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도 최선을 다 할 수 없었고


결국 현역 때랑 거의 비슷한 점수를 받습니다.


서울대식 누백 0.3으로, 여전히 수학 한 문제 때문에 반수를 실패했죠.





아마 지금 +1을 생각하는 상위권 문과 학생들은


작년의 저랑 거의 비슷한 상황일 것 같아요.


미래는 불투명하고,


잘 하는 것이 수능 공부밖에 없고.


사실 어찌 보면 그게 일반적인 문과 학생의 상황이겠죠.




지금 시기에 수능 공부를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잠시 self talk를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1년 공부해서 대학을 한 급간 올리는 것이 의미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20대 초반의 1년? 생각보다 길어요,


평생 남을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책을 한 권 낼 수도 있어요.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탈 수도 있으며


어떤 공부를 해도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이에요.




단순히 지금까지 본 것이 수능 강의밖에 없다는 이유로


수능이 마치 유일한 길인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보통 재수보다는 반수를 권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에요.


대학교 한 학기 다니면서 교양 수업도 들어보고,


동아리도 해보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면


그동안 몰랐던 자기 자신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새로운 꿈을 찾을 수도, 새로운 길을 알게 될 수도 있어요.




올해 n수생들을 여럿 만나면서 놀란 것이,


많은 학생들이 수능 강사를 하고 싶어 해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아요. 가장 많이 보는 이들이 인강 선생님들이고,


그 분들 사실 멋지거든요. 돈도 많이 버시고.




근데 그 직업의 장단점과는 별개로


그게 과연 본인에게 맞는 일일지도 생각해봐야 해요.


살인적인 스케줄, 과도한 부담과 압박...


개인적으로는, 현우진 쌤처럼 진짜 uptight control freak인 사람들한테나 어울리는 일 같아요.




암튼 말이 길었습니다.


수능 말고도 길은 정말 많아요.


문과가 할 수 있는 일들? 그거 사실 대학 안 나와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에요.




+1 결심하신다면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12월 한 달이라도 자기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보셨으면 해요.


눈도 오는데, 마스크 끼고 동네 공원이라도 한 번 산책하면서


연말 즐기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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