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아쉬운 상위권 문과에게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33837003
눈도 오고 연말 느낌이 나서, 수능 이후 두 번의 겨울이 생각나네요.
작년의 저한테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 적어보겠습니다.
상위권 문과 학생들은 어찌되었든 아쉬운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어요.
남들이 보았을 때는 높은 점수, 좋은 대학이더라도
자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저는 19수능 때 성적을 많이 남기고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수시도 고려대 철학과 한 장 썼어요(1차 광탈).
당시에 굉장히 염세적이기도 했고
사회성도 많이 떨어져서 남들하고 어울릴 자신이 안 났으며
당해 수능 수학을 조진 탓에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를 갈 용기가 안 났어요.
연세대 철학과, 고3때는 꿈의 학교였지만
막상 입시가 끝나니
한 문제 차이로 서울대 인문을 못 간 것이 아쉬웠어요.
저는 여러 이유를 찾아서 반수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이유들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어요.
당시의 저는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고
우울증이 굉장히 심했어요.
잘 하는 것이 수능 공부밖에는 없었고
다시 한 번 수능을 봐서 저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서 좋아하던 누나랑 관계가 망가진 것도 사실 큰 이유였습니다.
제가 만약 반수를 성공해서 서울대에 갔으면 저 문제들이 해결됐을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동기 자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도 최선을 다 할 수 없었고
결국 현역 때랑 거의 비슷한 점수를 받습니다.
서울대식 누백 0.3으로, 여전히 수학 한 문제 때문에 반수를 실패했죠.
아마 지금 +1을 생각하는 상위권 문과 학생들은
작년의 저랑 거의 비슷한 상황일 것 같아요.
미래는 불투명하고,
잘 하는 것이 수능 공부밖에 없고.
사실 어찌 보면 그게 일반적인 문과 학생의 상황이겠죠.
지금 시기에 수능 공부를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잠시 self talk를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1년 공부해서 대학을 한 급간 올리는 것이 의미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20대 초반의 1년? 생각보다 길어요,
평생 남을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책을 한 권 낼 수도 있어요.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탈 수도 있으며
어떤 공부를 해도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이에요.
단순히 지금까지 본 것이 수능 강의밖에 없다는 이유로
수능이 마치 유일한 길인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보통 재수보다는 반수를 권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에요.
대학교 한 학기 다니면서 교양 수업도 들어보고,
동아리도 해보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면
그동안 몰랐던 자기 자신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새로운 꿈을 찾을 수도, 새로운 길을 알게 될 수도 있어요.
올해 n수생들을 여럿 만나면서 놀란 것이,
많은 학생들이 수능 강사를 하고 싶어 해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아요. 가장 많이 보는 이들이 인강 선생님들이고,
그 분들 사실 멋지거든요. 돈도 많이 버시고.
근데 그 직업의 장단점과는 별개로
그게 과연 본인에게 맞는 일일지도 생각해봐야 해요.
살인적인 스케줄, 과도한 부담과 압박...
개인적으로는, 현우진 쌤처럼 진짜 uptight control freak인 사람들한테나 어울리는 일 같아요.
암튼 말이 길었습니다.
수능 말고도 길은 정말 많아요.
문과가 할 수 있는 일들? 그거 사실 대학 안 나와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에요.
+1 결심하신다면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전에, 12월 한 달이라도 자기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보셨으면 해요.
눈도 오는데, 마스크 끼고 동네 공원이라도 한 번 산책하면서
연말 즐기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문과뿐만아니라 대다수의 이과생한테도 좋은글이네요
상위권은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네요공부의 시간이나 양이 부족한 학생은 아닐 것 같은데, 저라면 학교 등록해놓고 반수는 할 것 같긴 하네요.

문과가 할 수 있는 일들? 그거 사실 대학 안 나와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에요.그건너무 이상적인말이고 사실 문과가 할수있는 일들이 좋은대학을 나올수록 '수월'한건 팩트아닌가
팩트이긴 한데 대학 안나온 사람이 그걸 할 수 있도록 사회가 길을 열어주지는 않죠...
전 9평 때 연대 어문 성대 글로벌 성적을 받았는데 수능을 망쳤어요. 아마 가군에 경희대 회세무 나군에 한양대 사회를 넣을 것 같은데요. 너무 후회가 많이 남아요.ㅠㅠ
제가 재수한 거라 만약 반수를 한다고 쳐도 삼수로 입학하는 거잖아요 혹시 그런 나이 부분에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삼수까지 나이는 큰 의미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군대가 조금 문제긴 한데...
수능을 한 번 더 봐야하는 상황이고, 마땅한 동기가 있다면 나이는 문제가 아닐 것 같아요.
여자면 5수까지도 문제없음
남자면 3수가마지노선이라생각
오......
감사합니다.
매우 공감하는 글입니다. 정말 평소에 하고 싶던 말을 다 해주셨네요...ㅎㅎ
스무살땐 이런 말을 들어도 난 아니야..라는 생각이었는데.. 몇 년 더 지나고 보니 정말 와닿네요
국에서 무너져서 일년을 더 생각하고 있어요. 반수를 하려고는 하는데 하면서 또 그 생활에 젖어들고 만족하면서 더 높은 제 목표로 도달하지 못할까봐 걱정이에요. 안정과 도전 사이를 오가는 순간인데. 또 자기혐오와 내가 이렇게 해왔다는 자기애가 같이 나타는데 막막하네요
자기혐오와 자기애의 공존 진짜 이 말 너무 공감됩니다...
이제 수학 통합하면 기존 나형 1등급 20%정도만 공통수학 1등급 받을수있다는 물공인가 어떤 네임드 분석글 본것같네요. 수학못하는 문과는 그냥 만족하면서 진학하는것도 나쁠것같진않음.
진짜 저한테 딱 맞는 글이네요... 남들이 보기엔 그정도면 괜찮다고 하지만 기대치엔 미치지 않아서 만족스럽지 않고 1년 더하면 서울대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상황인데 꿈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라서 무작정 좋은 대학에 가는 게 다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혹시 재수하려는 현역에게도 반수를 권하시나요?
왠만하면 반수를 권하지만, 사람마다 다 상황이 있고 생각이 있을 텐데 딱 뭐해라 제가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 글은 그냥 작년의 저한테 보여주고 싶은 얘기들...
사실 국수 둘 중 하나라도 뛰어나게 잘하면 반수해도 재수하는 거랑 성적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지는 않아요
앗 .. 사실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해왔는데 문과 수학이라 그런 것 같은 생각이 없지 않아 있어서 내년에 통합됐을때 1등급을 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도 하고, 국어를 과연 얼만큼 올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네요 그럼에도 재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수시 결과 나올 때까지 일단 고민해봐야겠어요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좋은글이내요 파이팅!!
정말 좋은 글이에요. 추천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한테 필요한 말만 해주셨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ㅠㅠ 많이 생각하게 되는 글이네요
여태 오르비에서 본 글 중 가장 도움되는 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너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뒤돌아보니 3년이 어느새 수능공부로만 채워져 있었네요...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지금이라도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려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누나.. 라면 그맘 이해합니다
아니 ㅋㅋㅋ
이거 ㅆ레알임 ㄹㅇ
걍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제가 +1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랑 소름끼치게 같으시네요

수시 조지고 생각나서 다시 들어왔습니다많이 공감이 되네요ㅠㅠ
오늘 봤는데 되돌아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