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kyl [989808] · MS 2020 (수정됨) · 쪽지

2020-12-09 18: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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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우리나라 대학서열화의 숨은 진실 가장 큰 피해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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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퍼온 글인데 저는 가해자 피해자 개념보다 대학 졸업하고도 실업자 된다는 것이 문제 같아요




요즘 고등학생들이 부른다는 대학 서열 노래대학 서열화의 숨은 진실...학벌사회 가장 큰 피해자는?

입력 : 2020.12.02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불렀던 노랫말 가운데 ‘태정태세문단세~’가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왕조의 계보인데, 요즘 고등학생들은 다른 계보를 외운다.‘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인서울 대학 서열이다.

오늘날 무한 경쟁사회에서 점수와 서열은 모든 분야에 존재하며 우수성 혹은 경쟁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회사들은 매출액 혹은 시가총액으로 서열이 정해지고, 프로 야구팀은 리그 순위 그리고 선수들은 연봉 순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입학생의 내신등급과 수능성적 등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데, 입시철 대형 학원들이 제공하는 ‘지원가능대학 배치표’는 학부모와 수험생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우리나라 대학과 학과의 서열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대학 입시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발표되는 의과대학과 서울대 합격생 수는 전국 고등학교의 서열을 결정한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동물의 서열은 어떻게 정해질까? 양육강식, 힘의 논리에서는 사자가 당연히 1등이다. 하지만, 빠르기로 순서를 정하면 치타가 1등이 되고, 키로 따지면 기린을 능가할 동물은 없다. 힘의 논리에서도 사자와 하마가 땅에서 싸우면 사자가 이기겠지만, 물 속에서 싸우면 하마가 당연히 이긴다.

다양한 동물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자연 생태계가 유지 보존되는 이유는 각각 자신의 강점을 바탕으로 적응하고 진화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고 약한 동물들이 높은 번식력과 강한 생존력으로 생태계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인간이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만일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동물원에서 약육강식 혹은 무한 경쟁의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동물원 우리의 벽을 허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약한 동물들은 강한 동물들에게 잡아 먹히고, 먹이가 충분한 경우에도 힘센 동물들의 위세에 눌려 피해 달아나기에 급급할 것 같다. 평화롭게 풀을 뜯는 사슴, 무리 지어 춤추는 홍학 떼, 한가로이 나무에 매달려 노는 원숭이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고, 동물원은 제 기능을 잃는다. 마지막 남은 사자조차도 행복하지 못하고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는데, 안타깝게도 그 곳에는 힘의 잣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학 서열화의 숨은 진실

대학 서열화의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대학평가기관인 QS가 발표하는 세계대학 순위는 대학들의 학문적 평판, 교수/학생 비율, 교수당 논문 인용수, 외국인 교수 비율, 외국인 학생 비율 등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고 서열을 세운다. 세계 명문대학들도 QS 평가 앞에서는 선생님 앞에서 선 학생 마냥 안절부절 하고, 필자가 근무하는 KAIST도 QS 순위의 오르내림에 학교가 매년 일희일비 하곤 한다.

하지만, 필자는 동물의 세계와 같이 대학의 경우도 한 가지 잣대로만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의구심이 깊다. 예를 들어, QS 평가의 20%를 차지하는 ‘교수당 논문 인용수’는 연구중심을 표방하는 대학들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항목이나, 학생들의 인성과 리더쉽을 중시하고 취업과 학생 창업을 강조하는 대학들의 경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해당 대학들은 사회와 기업에서는 큰 환영을 받고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을 수 있으나, 교육목표와 무관한 논문 인용수가 적다는 이유로 QS 순위에서 낮은 서열에 놓이게 된다. 연구의 경우에서도 산학협력 혹은 학부생 연구는 산업발전에 매우 중요하고 교육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낮은 논문 인용수로 인해 불이익을 받거나 등한시 될 수 있다.

평가 점수의 5%를 차지하는 외국인 교수 비율은 일반적으로 영어 강의를 전제로 하는데, 대부분 우리 대학들의 경우 영어 강의의 필요성은 높지 않고 오히려 외국 국적이란 이유로 교수를 우선 채용한다면 역차별 소지가 될 수 있다. 전면적인 영어강의를 실시하는 KAIST 조차도 외국인 교수 채용에 어려움이 많은데, 대학의 위상 혹은 노력과 별개로 지역 공동체의 외국인 생활 여건 등과도 연계되어 있어 외국인 교수 비율이 대학 평가 잣대로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다소 조심스럽다.

외국인 학생 비율도 5%인데, 명문대학에 진학하고자 멀리 유학을 온 경우와 자국 학생들이 떠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공부에 큰 관심이 없는 외국인 학생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같은 잣대로 점수 매겨진다면 그 또한 어불성설이다.

결국, 세계적인 대학 평가 QS 조차도 단지 하나의 잣대일 뿐, 만일 대학들이 각 대학들의 교육목표와 철학 그리고 강점과는 별개로 모두 한 방향으로만 진화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서열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싶다. 기린의 목표가 얼룩말이 아니고, 하마와 치타는 살아가는 생태계와 방법이 다르며, 사과와 수박이 구태여 크기를 비교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학벌사회 가장 큰 피해자는? 

 

그러면 서열화된 대학이 만든 오늘날 학벌사회에서 피해자들은 누구일까?

첫번째 피해자는 서열의 아래에 위치한 비명문대학일 수 있다. 오랜 세월 당연 시 되어온 학벌사회의 틀 안에서 출발점이 뒤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라톤과 같은 긴 인생 길에서 뒤처진 출발점이 막상 달리다 보면 출발점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큰 불이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인생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역설적으로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큰 피해자는 명문대 학생들 가운데 있다. 학벌사회의 끝자락에 있는 오늘날에도 학벌사회가 계속 지속되리란 기대 속에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그 명문대들 안에서 사회에 나갈 준비를 제대로 안 하기 때문이다.

오랜 과거에는 명문대 이름만으로 평생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필자 세대의 경우 대학 이름이 보장했던 기간은 기껏해야 10여 년, 그 이후 인생에서는 진정한 실력과 인간관계 혹은 운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라져가는 학벌사회의 틀 속에서 충실히 준비하지 못한 그래서 공허한 자존심만 남은 명문대생들에게 과연 몇 년을 보장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일류대학만 가면 성공한다’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만 했던 우리나라의 착하고 성실한 모범생들이 명문대 입학으로 자신의 인생 최고점을 찍고 진정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하는 사회에서 억울하게 사그라드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 아니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이란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학생들과 우리 사회가 깨닫았으면 좋겠다. 우리사회에 대학 교육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진정한 실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는 학벌사회는 더 이상 발 붙일 곳은 없다. 그리고 없어야 한다. 

글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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