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식T [68501] · MS 2004 (수정됨) · 쪽지

2020-04-18 0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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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 작가의 <사평역> 개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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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2019 기출 인문사회1 2번 - 사실추론.pdf

우리가 다 아는 그 작품 의 대합실 씬을 보면,


열혈 대학생의 심경 변화가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올바른 세상, 정의'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차서


혁명의 실천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잠든 자'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의 정의에 갇혀 열을 뿜다가,



문득, 대합실에 함께 있던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각자의 정의, 각자의 가치, 각자의 따뜻함과 사랑과 평화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그걸 인정하게 되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가, 평화로워졌다가, 마음이 가벼워진다.




건국대 논술 기출문제를 해제하면서 교재를 쓰느라, 다시 들여다 본 익숙한 이 대목에서


오늘 문득 내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옛날의 내가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검사를 꿈꿨다.


우리 반엔 양아치가 너무 많았지.


내 친구들을, 나를 괴롭히던 양아치들 다 잡아 가두겠다며 강력계 검사를 꿈꿨다.


그래서 양아치들보다 힘이 약해선 안 된다며 운동도 정말 열심히 했고,


사회적 강자가 되어 정의를 실현할 마음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재수, 삼수를 거치면서


초점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대단한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건 똑같았지.


지금 기억으로 삼수 땐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며,


같은 책들을 읽으며 진짜 손 부들부들 대면서 이렇게 살겠다면서 혼자 울고 그랬다.


ㅋㅋ 순딩이었지, 열혈이기도 했고, 뭘 해도 격했던 것 같다. 마음이. 뭔가에 화가 나 있던 것 같기도.



그러다 문득,


내 가장 사랑하는 엄마와 산책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꿈이 뭐야?"


"엄마? 그냥 은식이랑 오손도손 잘 지내고 사는 거~"


"정말 그게 다야? 뭐 이루고 싶은 원대한 목적 같은 게 없어?"


"응, 엄마는 그게 꿈이야."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왜 고작 오손도손 정답게 사는 게 꿈이란 말인가.


위대한 무언가를 위해 한 몸 불사르는 게 올바른 인생 아닌가.


그땐 그런 생각이 날 가두고 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몇 년을 더 그렇게 살아갔던 것 같다.


적성에 맞았던 교육을 삶의 길로 택할 때도


그래서 처음에 발을 담근 곳은 교육시민단체였다. 심지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그리고 아름다운배움.


난 심지어 그 시민단체 사무실을 다녀가는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급으로 일했다.


그런데도 어떤 날들은 집에도 안 가고 사무실 돌바닥에 점퍼를 깔고 자면서 일을 했다.


당연히 꾀죄죄하고 막 불편했고 그랬지만, 뭔가 자랑스러웠다. 뭔가 열혈이었다 그때도. 계속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열심히 살기는 오지게 열심히 살았다. 뭘해도 진짜 지구 끝까지 파고들면서 했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나름 인정이란 걸 받으며, 일했다. 좋았다. 인생에 자부심이 있었다.


아빠가 그런 거 해서 어떻게 먹고 사냐며 뭐라고 할 때, 나는 내가 무슨 독립투사라도 된 듯이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절대 썪지 않을 거라고 막 화를 냈다. 참 나... 그땐 그랬다.


누군가는 내게 이후에 교육계를 바꿀 재야의 정치인 같은 걸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얘기 같지만, 26살, 27살 즈음의 얘기들...



그러다가, 문득 문득 찾아오는 질문은


내 소중한 엄마의 삶은 정말로 위대하지 못한 것인가.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저 질문의 무게는 더 무겁다가 더더 무거워지다가, 결국 어느날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막 정의니 뭐니 하고 살아서


대애애애단한 뭔가를 이뤘다고 해보자.


근데


그때 그 기쁨을 그 눈물을 나눌 사람이 하나 없다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서로가 너무 소중한 그런 관계가 없다면


이게 다 뭔 지랄이지?


흔히 일상적 가치의 소중함이라고 쉽게 정리되는 것들이


내겐 그때 한방에 크게 다가왔다.



그때 그 옛날 엄마의 대답이 떠올랐다.


나를 실망시켰던 그 대답이.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면서, 내 삶의 방향은 크게 바뀐 것 같다.


지금 나는 옛날에 갖고 있던 그 뭐랄까 막 분노에 찬 격함 같은 건 없다.


그래서 솔직히 옛날 만큼 열심히 살고 있지도 못하다. 이건 뭐 반성....


대신 나는 내 사랑하는 아내 한 명에 대해서라도


내가 배운 그 사랑의 가치, 사랑의 인내를 온전히 실현해 보려고 노력한다.


뭐 그래봤자, 실수도 많고, 나태도 많아서 늘 부족하기 일쑤지만,


어쨌든 삶의 어떤 커다른 명분이나 이런 걸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 가장 소중한 사람들 아내, 엄마 같은 사람들이 울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일단 그걸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나는 뭐 내가 나름대로 대애단한 사상적 변화를 겪은 줄 알았더니만,


오늘 을 다시 읽어보면서


나도 그냥 이 모든 것들을 거쳐 사랑 많은 남편이나 아빠가 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평범함이 깊이 자랑스럽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와씨 나 이거 내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지울 것 같은데, 이래서 새벽은 위험햌ㅋㅋ


진짜 오그라든다 지금 슥 봐도.



그래도 뭔가,


용기내서 부끄러운 내면을 공유하는 이유를 떠올려 보면,


19살, 20살, 21살... '열혈청년'으로 살아가고 있을


옛날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뭔가 이 아재가 지금 갖는 평온함을 보여주고 싶달까 뭔가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이래도 괜찮다고 느낄 떄가 언젠가 올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만약에 끝까지 열혈로 살아간다면, 그것도 너무 훌륭하고 멋있고 막 박수쳐주고 싶다는 거


뭔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원래 논술 강사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이런 뭔가 내가 논술을 배울 때 느꼈던 이런 마음들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런 마음을 내 첫 교재 머릿말에도 다 써놨는데,


어쩌다가 나는 4시간이나 수업을 하면서


남들을 이기는 법이나 가르치고 앉아 있다


여기까진 어느 정도 상위권이면 할 수 있는데, 여기서부턴 진짜 최상위권만 할 수 있으니까


이런 걸 잘 해서 이겨야 한다고 이딴 소리만 하고 있다


내게 논술을 전해주신 스승님도 이투스 강사셨고


그 치열한 입시를 가르치시면서도 내게 순수한 인문학의 감동을 깨우쳐주시기도 했는데,


나는 세상에.... 뭔 이기는 법만 줄창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대학 가서 꿈을 찾으라면서 한 마디 찔끔 덧붙이기만 한다.


이투스에 처음 들어올 떄도


어린 왕자랑 갈매기의 꿈이랑 꽃들에게 희망을 이거 3권을 꼭 무료특강으로 풀어서


논술을 하든 안 하든 모든 학생들에게 인문학의 감동을 나눠줘야겠다 다짐을 했는데,


심지어 우한기 쌤은 그렇게 하셨는데, 그래서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


근데 난 왜 그 우한기 쌤의 후임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여기까지 와서 그 꽁무니도 못 따라가도 있을까



이런 것까지 적다니 진짜 새벽을 졸라 위험하다


내 제자들이 이거 보고 나 놀려도


이렇게라도 뭔가 앞으로도 그런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이기는 법만이 아니라 삶의 감동을 찾는 것도 함께 나누는 그런 강사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


역시 논술강사라고 해봤자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갈겨 쓰니까, 글도 더럽게 못 쓰는구나 ㅎㅎㅎ


벌써 지우고 싶지만, 일단 올리고 자버려야지. 후후후후훟ㅎㅎㅎ


근데 이런 일기 같은 건 어디데 올리는 건가? 생활상담실? 선배(?) ㅋㅋㅋ 선배 대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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