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생​ [919266]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0-04-11 20: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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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숲 펌)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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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71번째포효


오빠, 안녕.


오빠 기억나?


나 재작년에 오빠한테 과외 받았었잖아.


오빠 첫 과외였다고 들었어.


나도 그렇게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사람한테 과외 받아본 건


처음이었어.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난 굳이 어색한 분위기에 나 자신을 던져두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새내기인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서 오빠를 만나기 전에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 맨날 서로 얼굴 보던 학교 친구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나름 신경도 좀 썼었고.


오빠 발소리가 들리는 찰나의 순간에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리고 문 열고 들어오는 게 프사로 본 그 사람이었을 때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 마음이 얼마나 몽글몽글해졌는지, 오빠는 알까.


오빠 수업 잘했어. 우리 선생님은 진짜 설명도 못하고 어렵게 가르쳤는데, 

오빠한테 들으니까 한 번에 이해되는 거야.


그리고 우리 말도 잘 통했잖아. 어색함도 나름 금방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오빠는 어떨지 모르겠네.


그래, 나는 오빠가 어떨지 몰랐지.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대학생인 오빠를 보니까 오빠가 멋있었어. 대학생만의 후광이 있다고 해야 하나? 복잡하기만 했던 과학 식들에는 어느새 반응의 과정만이 아니라 내 간지러운 마음까지 얼기설기 얽혀있었고, 식의 답을 찾아내면 오빠는 내가 잘 한다며 추켜세워줬지.


난 기쁘지 않았어. 내 식의 답은 오빠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오빠가 날 학생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을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어. 대학생의 입장에서 과외 학생을 이성으로 보는 거, 있기 힘든 일이잖아. 가능성 없는 일에 내 마음을 걸고 싶지 않았어. 또 다른 이유로 절대 선을 넘을 수 없기도 했고. 그래서 난 내 답을 공백으로 남겨놓은 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문제를 풀었지.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오빠와의 수업 횟수가 늘어갈수록 내 마음은 이제는 공백에 낙서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커져갔어. 오빠를 만나러 가는 길도, 과외 시간도, 과외가 끝나고 둘이 같이 역으로 걸어가는 길도, 내게는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순간들이었어.


그리고 곱씹을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짝사랑이었지.


애초에 내신시험 준비를 위해 과외를 받았기에 오빠한테 오래 과외를 받지는 못했잖아. 마지막 시간에는 나도 시험 직전이라 정신이 없었고, 시험 잘 보라는 오빠의 말 한마디를 뒤로하고 허겁지겁 스터디 카페로 뛰어갔으니까.


그 뒤로 나도 고3이 되어 바빠서 연락도 못했고, 연락할 이유도 없었지. 과외는 끝났고 더 이상 만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그 기억이 조금 아린 짝사랑으로 끝날 줄 알았어. 길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그렇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줄 알았어.


근데 아닌 거야. 2년이 지나 오빠는 군대에 있고 나는 새내기가 된 지금까지도, 조금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금방 오빠가 생각나더라. 이런 거 보면 내 마음이 단순히 대학생에 대한 환상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아직까지도 내 식의 정답은 비어있어.


얼른 오답 표시를 하고 넘어가야 할 텐데, 해답지가 없잖아. 그 핑계로 아직까지 오답 처리 안 하고 계속 냅두고 있잖아.


나는 용기가 없어서 오빠 대학교의 대나무숲에 이 글을 쓰지도 못하고, 그냥 내가 다니는 대학교 대숲에다가 아직까지도 공백으로 남아있는 내 마음 위에 낙서를 끄적거릴 뿐이야.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사이이고, 이제는 너무 오래전 얘기니까.


오빠 내 쓰잘데기없는 질문 하나하나 잘 받아줬었지? 이번에도 알려줘. 이 식은 어떻게 채워? 지금 질문해도 받아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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