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데아퀴노 [849734]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19-12-26 0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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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와 아이누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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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스튜디오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라고 들어보셨나요? 만일 영화 안 보셨으면 스포를 해드릴 수 없으니 보고 오시길 바랍니다~ㅋㅋ 

이 영화는 환경과 자연 파괴를 경고하는 영화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원령공주라고도 속칭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16세기 무로마치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요. 정확히는 센고쿠(전국)시대라고 하여, 덴노(천황, 일왕)과 무로마치 시대의 쇼군(세이이타이쇼군, 정이대장군; 일본 막부의 군주로서 실권이 없는 덴노를 대신해 국가를 다스리는 실권자)이 모두 힘을 잃고 각지의 다이묘(대명, 영주, 쇼군이나 천황의 재가 하에 일정 지역을 차지하여 다스리는 상급 무사계급)들이 일본 각지를 지배하며 실권을 다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센고쿠 시대 지도



이 당시 일본은 혼란한 정국을 틈타 각지에서 승려와 농민세력까지도 분란을 일으키던 시대였고, 다이묘들은 명나라와 포르투갈 등지에서 넘어온 상인들과 교류해 화포와 총포 등을 받아 더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총포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등장한 것입니다. 사진 속 인물인 에보시도 나중엔 일왕 혹은 쇼군의 따까리 역할을 하긴 하지만, 영화 초창기부터 자기만의 세력을 가진 영주/다이묘로서 등장합니다. 여성 다이묘라는 캐릭터성을 부각하려는지, 그녀의 영지에서는 여성들의 발언권과 권한이 센 편입니다.




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남주인공 아시타카 역시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일본 북부 에미시 부족의 청년으로서 부족장 자리를 곧 이어야 할 왕자 급의 인물인 그는 부족을 공격한 재앙신이 그에게 내린 상처의 저주를 풀기 위한 숙제를 안고 무녀의 말에 따라 일본의 남쪽으로 산양 야쿠르를 타고 내려 갑니다. 



그리고 에보시의 영지인 타타라 마을과 그 근방의 '사슴신의 숲'에서 그는 정말 많은 여정 끝에 거기서 거대한 들개 정령 패밀리인 모로 일가와 그 집안의 양녀이자 원령공주, 진 히로인인 '산'도 만나게 되는데요...






둘은 첫 만남에 홀딱 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산은 에보시와 일왕이 보낸 중앙군의 표적이 되어 있었는데요... 왜냐면 그들의 목표는 숲과 산의 정령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자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불리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시타카가 받은 상처의 저주는 하필이면 에보시의 장정들이 쏜 총알에 맞아 재앙신이 된 멧돼지 정령신 나고가 내린 저주였고, 이를 풀기 위해선 정령신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둘은 눈도 맞았겠다 에보시와 일왕(덴노 혹은 쇼군) 군대의 신식 부대가 숲과 산의 정령신들을 죽이려 드는 것을 막아내고, 분노한 사슴신으로부터 사람들까지 구한 뒤에, 결국 아시타카의 저주도 풀리고 영화는 두 사람이 따로 살되 서로 결연을 맺는다는 암시로 마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스포...)



사실 이 영화의 두 메인 주인공인 아시타카와 산의 이야기는 일본 혼슈 중북부 지역과 홋카이도, 현재의 사할린 지역에 두루 퍼져 있는 부족인 아이누(에미시) 부족의 탄생설화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 설화는 바로 레타르 세타 설화 혹은 흰 개(늑대)와 세 아이의 설화 라는 것입니다.




여기선 스토리가 조금 달라지는게 배경이 더 옛날 ,그니까 고대 일본으로 변경되고 , 산이 들개 일가의 양녀가 아닌 실제 흰 개가 사람이 되어 북부 에미시 부족의 남자 영웅과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라는 단군설화 같은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됩니다. 지브리가 단순한 설화를 참 맛깔지게도 각색해놨네요... ㅋㅋ


근데 왜 하필이면 개냐.... 영화 내용에서처럼 아이누 부족들은, 산과 숲마다 큰 동물이 신이 되어(마치 천년 묵은 여우나 호랑이 같은 느낌) 그곳을 다스린다는 토템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아이누 부족은 사실 세타라고 불리는 들개 혹은 늑대를 엄청 많이 키웠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늑대를 목축하듯이, 지금 이누이트 족이 허스키 부리듯이 키웠다고 합니다. 그만큼 애견가들이고 설화와 언어에도 개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근데 잠깐! 에미시 부족, 아이누 부족이라고 불린 이 부족이 지금의 일본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실 것 같아서 영화와 관련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들은 부족이 아닌 민족 집단으로 분포됩니다.


  



**위의 사진은 에미시 민족이 아닌 아이누 민족입니다. 뿌리가 같은 민족이지만 시대에 따라 부르는 게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미시 민족은 지금의 도쿄 근방 그리고 홋카이도 근방까지 분포하며 살아가던 민족으로 한국으로 치면 여진족, 말갈족 정도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이들은 일본인들과 많이 다르게 생겼고 큰 눈과 코와 서양적인 두상을 가지고 있어 처음 서양인들이 방문했을 때는 이곳에도 캅카스 민족(서양인)이 살고 있구나 라는 뻘소리를 시전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고아시아 민족이라고 하여, 신석기 이전 몽골계 민족과 티벳-중국계 민족이 아시아에 정착하기 이전의 토착민들입니다.

그만큼 역사가 엄청 오래된 민족이라고 볼 수 있죠.



사진설명: 아이누족 아저씨


그들은 지금의 일본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과 늘 치고받고 싸웠으나, 중국과 한반도의 문물을 받고 농경과 관제 제도까지 마련했던 통일 야마토 정권의 힘을 못 이겨 결국 토벌당하거나 통혼 정책 등으로 소멸하고 맙니다. 이 때 토벌을 지휘한 장군을 세이이다이쇼군, 한자로 정이대장군이라 부르며, 오랑캐를 평정하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막부의 지배자를 일컬는 칭호가 됩니다.


아시타카 역시 그러한 에미시 민족의 왕자로 크면서, 마치 야마토의 중앙 정부에 소속된 민족인 듯 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 역시 동화 정책으로 많이 진척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그런 듯 합니다.


사진 설명: 옷 벗고 쿵후?를 시전하는 에미시 부족들




사진 설명: *** 에조 공화국의 위치


그러나 에미시 민족 중에서 시베리아와 위도가 비슷한 북부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사할린(카라후토) 등지에 살고 있던 부족들은 결코 동화되지 않고 19세기까지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 에도 막부 사이에서 까지 잔류하며 세 강대국에게 조공이나 바치며 근근히 생활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이 '아이누' 민족입니다.


그러던 중 일본 에도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아이누 민족들의 삶에도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에도 막부의 잔류 세력이 도호쿠와 홋카이도 근방으로 가서 에조(에미시의 다른 말)공화국이란 정권을 세우고 메이지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한 건데요, 이는 금방 진압되고 1869년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일대를 완전히 수복하고 아이누 민족에게도 자신들의 근대화 및 민족말살정책을 강요합니다.



1. 아이누의 토지 몰수

2. 수렵 금지

3. 아이누 고유 풍습 금지

4. 일본어 사용 의무화

5.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


이러한 정책 끝에 백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잃게 된 아이누 민족은 오늘날 일본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사진: 가야노 시게루 의원 


단지 가야노 시게루(1926~2006)라는 분만이 오랫동안 아이누 민족을 대변하는 아이누 출신 유일무이한 일본 의회 참의원 의원으로서 활동하셨지만, 지금은 그분마저 돌아가시고 우경화된 고도의 일본 사회 속에서 아이누의 피가 흐른다는 것조차 다들 잊어먹거나, 언급을 회피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 내의 아이누 민족은 여전히 차별받거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지만, 다행히 러시아와 중국의 아이누 민족들은 그 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 유일하게 안심할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원령공주 영화의 설화 모티프가 아이누족 설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지브리 스튜디오가 칭찬받을 만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사를 은폐하고 소수민족 타민족을 탄압해온 전력이 많고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임에도, 그런 현실 속에서 자신의 나라에서 잊어버리려 하는 소수민족의 설화를 차용해 영화로 제작했다는 것은, 상당히 뜻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게다가 원령공주인 산이 남부 야마토 출신 인데 그런 그녀가 에미시족 즉 타민족인 아시타카와 맺어지는 것은 민족 간의 화합과 화해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 개봉이 꽤 지났는데 둘이 지금 쯤 세 명의 아기를 낳았겠죠?)



숲의 정령신들을 분노하게 하지 말며 그들과 공존하려는 이야기는 문명에 대한 비판도 되지만, 사라져가는 아이누 민족의 문화와 전통, 정신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의미를 담지 않았나... 라고도 생각됩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조선과 타이완 등지의 식민 지배와 일제 침략에 대한 왜곡된 서브컬쳐물들이 나돌고, 그것이 지브리 스튜디오 내에서도 종종 회자된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또한, 류큐 민족이라고 하여, 1879년에 일본에 종속되어 잠시간의 미군정을 거쳐 지금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오키나와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금기시되고 있다는 점... 도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소수민족을 다루는 애니는 제가 알기로 이거 하나 밖에 없으니 ,일본 내에선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암튼 저는 어릴 때부터 역사덕후라 그런지 상당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혹시 더 궁금하신 것이나 같이 나눠볼 이야기 있으면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토마스데아퀴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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