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드 [862495] · MS 2018 · 쪽지

2019-11-25 17:12:37
조회수 4,399

긴 글이지만.. 읽어주세요..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25709697

현역 고 3 남학생입니다.

수능이 끝나고 펜을 안 잡은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네요.

필력은 매우 부족하지만 그래도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한 자 한 자 적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 꿈이 참 많은 아이였습니다.

7살 때, 저를 정말 아껴주셨던 외할아버지가 췌장암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암이란 어떤 질병인지, 왜 할아버지가

그렇게 고통 속에서 하늘나라로 가셨는지 어린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겨우겨우 어떻게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당시 유행하던 의학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의사라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화려한 솜씨로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게 저의 첫 번째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수학 시간에 전개도를 배웠습니다. 저는 원래 손이 빠르지 못해 전개도를 접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렇기에 수학 시간에 항상 꼴등으로 과제물을 제출하는 아이였습니다.

물론 마음이 급해 빨리 하다가 실수도 많이 해서 전개도가 삐뚤삐뚤해 보기에도 안 좋았죠.

부모님은 그런 아들의 느리고 지지부진한 학습능력이 답답해 보이셨나봅니다.

저는 외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부모님께서 저에게 거신 기대가 컸을지도 모릅니다.

어느날, 저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의사"라고 답했습니다. 순간 하시는 말. "안돼, 수학도 잘 못하면서."

어린 나이에 꿈은 꾸기만 하면 다 이뤄지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렇게 단호하게 저에게 부모님이 하신 말로 인해

저의 꿈은 그저 훨훨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꿈을 잃어버리면서 초등학교 생활을 하던 중, 훌륭한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저의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보기 좋다고 항상 칭찬하시더군요.

그렇기에 더욱 웃었습니다. 그때부터 웃는 버릇을 들인 것이 지금까지도 저의 특색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어렸지만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듣고 친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너무 이른 감은 있지만 TV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청소년 경제기자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저에겐 너무나도 큰 기회였습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헌신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초등학생으로서 그리 큰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경제칼럼을 써보고, 경제학에 대해서 중, 고등학교 형 누나들과

격의없는 토의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경제학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때마침 2013년 말, 서울의 대학교에서 청소년 경제기자들을 모아서 골든벨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 간 대학교가 연세대학교였습니다. 13살로서 저는 어느 대학이 좋은지 알지 못했고, 대학교가 그렇게 크고 웅장한지 몰랐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형 누나들이 멋져보였고, 그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너무나도 신성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교사를 꿈꾼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교사가 아니라 교수가 되겠다고 

꿈꿨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 3년을 지내고 지역에서 가장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1학년 때 3개의 희망 대학과 학과, 직업을 적는 종이를 개학 날 담임선생님이 나눠주시더군요.

펜을 잡자마자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연세대 행정학과, 고려대 행정학과 /꿈: 대학교수)라고 적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는 행정학과가 없어서 정치외교학과로 바꿔 썼고 학사를 받은 후 행정학과에서 석박사를 따자고 계획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이 "미친 놈인가?"라는 표정으로 쳐다봤고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따로 복도로 부르셨습니다.


저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대학교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란다. 3월 학력평가 보니까 스카이는 커녕 인서울이나 지방거점국립대도 간당간당 한 거 같은데... 꿈이나 대학이 너무 이상적이지 않니?" 그 뒤의 말씀들은 기억에서 잊혀졌습니다. 성적으로 저의 꿈이 결정되고 평가받는 것에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꿈은 성적순인가? 라는 생각이 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음... 고등학교 3년 동안 수십권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생기부에 기재했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읽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독서록을 선생님들께 제출하면 선생님이 내용은 다 아느냐고. 헛웃음을 지으셨지만 교무실에서 책의 내용을 모두 다 훑을 정도로 읽었습니다.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저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저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잠시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 학교에선 특별반을 운영했습니다. 다른 학교에도 특별반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저희 학교는 오로지 특별반에 들어간 학생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별반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3년 동안 노력했지만... 부족한 지적 능력인지 부족한 노력 때문인지 항상 뭔가가 

부족했습니다. 그렇기에 교내 대회에서도 겨우 입상했고, 특별반 학생들은 어떤 식으로든 상을 받아갔습니다.

한 때는 제가 제시간에 출품작을 제출하고, 특별반 학생 여럿이 출품작을 제출하지 못했지만.. 제출 일자를 슬며시 연장하더군요. 제가 그 상황에 처했어도 그렇게 해줬을까요?

불평등이나 공정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하고 싶지 않았고, 하소연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직접 겪어보면서 행정학과 정치학에 관심이 깊어졌고, 행정학 교수가 되어 사회의 여러 부조리함을 일소하고 현장 소통을 중시하는 정치인이 되어 좋은 나라, 공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3년동안 짝사랑했던 국어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사회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해준 분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고, 항상 고운 말 바른 말을 쓰면서 학생들을 사랑으로 보살핀다는 저만의 통념을 깬 분입니다.

어쩔 때는 학생이 울 정도로 따끔하게 다그치시며, 때로는 사랑보다는 거친 말과 냉철한 눈빛으로 수업의 분위기를

휘어잡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사랑과 관심으로도 아이들을 감화시킨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 분에게 저의 마음이 쏠렸습니다. 

1학년 떄는 정규시간 교과 선생님, 2.3 학년떄는 방과후시간 교과 선생님이셨는데 방과후를 짤 때 항상 그 선생님의 수업을 맨 처음 시간으로 고정했습니다. 그 선생님을 잠시나마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나 봅니다.

하지만... 한번도 저의 마음을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켜봤고 그림자만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 선생님만 보면 말문이 트이질 않았습니다. 또한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이라 제가 마음을 전하면 고작 저 밖에 안 되는 사람이 본인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전하지 않았던게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과 담당, 저는 문과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어 방과후는 문이과가 함께 듣는 수업이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친구와 앉아서 매일 수업을 들었습니다.

고 3 9월 달이었습니다. 막 수시 원서 접수가 마감된 이후였습니다. 저는 제 개인적으로 호감이 있는 대학을 썼습니다.

(전북, 충남, 건국, 동국, 한양. 충남은 학종/교과 2개) -물론 수시 원서를 쓰면서도 담임선생님과 너무나도 지루한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5종합을 고집했던 저에게 "내신이 이 모양인데..."라는 말을 하셨는데.. 제 마음대로 썼습니다.

아무튼, 방과후 수업이었는데.. 그 선생님께서 저와 주변의 친구들에게 물어보시던군요. 대학을 어디 썼는지....

제 친구는 고려대 역사교육과, 제 바로 왼쪽은 서울대 경영학과, 제 뒤쪽은 서울대 의대, 그 날은 어째서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쓴 대학이 그렇게도 화려하던지요. 저는 아무말도 못해버렸습니다. 한양대라고 말하자... 슬며시 웃으시더군요.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때 제 첫사랑은 무너졌습니다. 한양대를 어떻게 가냐고 다시 묻더군요. 그 성적으로... (내신은 2등급 후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기부는 특별반 학생들을 능가햇고, 오로지 학종에만 3년동안 올인했습니다.) 그렇게 평가받는 비루한 3년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꿈을 물으시길래, 행정학과 교수가 되어 국가정책을 기획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니... 그저 웃으시면서 고개를 내저으시더군요... 그러고는 가운데에 낀 저를 아랑곳하지 않고 저의 주변에 있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얘기를 건네시다가 수업시간을 다 쓰시더군요. 꿈과 대학, 학과가 너무나도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상이었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2019년 11월 14일, 수능시험장을 빠져나오면서 1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최종적으로 입시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충남대 교과, 전북대 면접, 한양대 종합이 남았네요.

이 세 대학 중 어디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밝은 전망은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차디찬 현실을 희망과 노력으로 버티고자 했습니다. 미래의 행정학과 교수라는 꿈이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자 저의 근거를 확립하고자 노력했습니만... 그만 주저앉았습니다.


공정한 나라, 내일이 기대되는 나라, 따뜻하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거창한 이상은 그저 이상이었나봅니다.


저는 여기서 주저앉습니다.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은 항상 다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저도 언젠가 일어나겠지만... 언제일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고 극단적인 생각도 

수십차례하기도 합니다. 


"꿈을 그리는 자는 언젠가 그 꿈을 닮아간다."

"내가 꿈을 이루면 난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

여러분은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몫까지..

꼭 떠나는 사람 같이 글을 썼네요. 12월 10일 날 저의 대학은 결정됩니다. 다 떨어지면 1년 더 해야겠죠..

1년으로 고정되진 않았습니다만..

모두들 행복하세요. 저의 몫까지.. 그럼 이만 글을 마칩니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Winchester · 885934 · 19/11/25 17:14 · MS 2019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 미르 · 890447 · 19/11/25 17:22 · MS 2019

    근데 넘기러여 ㅠ

  • 병적현 · 834808 · 19/11/25 17:23 · MS 2018

    이상이 높다는건 결코 부끄러운게 아닙니다. 높은 이상만 잡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잘못이겠죠. 열심히 노력해 오셨으니 혹여 한 해 더 하실 땐 좋은 결과 있을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구요. 응원하겠습니다

  • 모아보기밴당했읍니다. · 850533 · 19/11/25 17:25 · MS 2018

    늘 자기만의 고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승리를 쟁취하곤 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엑시드 · 862495 · 19/11/25 17:26 · MS 2018

    고맙습니다. 힘내겠습니다

  • 반창고(대일) · 878481 · 19/11/25 17:39 · MS 2019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좌절감과 허탈감은 아마 수험생 공통으로 0.01퍼센트를 제외하곤 모두 느끼는 감정일거에요.. 저도 매년 수능을 치면서 그런 패배감을 맛보곤 했지만, 이제서야 내가 가는 길이 한 길만 있는게 아닌, 여러 방면의 길이 나있구나, 하지만 그 길은 아마 작성자분이 생각하시는 길과 멀어질지라도 목표하는 곳은 결국 비슷한 쪽으로 수렴할거에요.

    나희덕-푸른 밤 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저는 많은걸 깨닫게되더라구요. 그 시적 대상을 다른 이성이아닌 나한테 감정이입해보세요.! 화이팅!

  • 보라고구마 · 741744 · 19/11/25 17:48 · MS 2017

    저도 고3때는 정시성적에 비해 무리한 꿈을 가졌지만 삼수를 거치면서 점점 더 목표에 가까워지더라고요. 망상에만 그치지 않으면 괜찮아요! 목표 없는거보다 훨씬 보기 좋아요

  • jimpa · 749591 · 19/11/25 17:50 · MS 2017

    돌고돌고돌아 한참 늦게라도 가는 고독한 사람들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마시길

  • Yoon's Ethics II · 821917 · 19/11/26 20:16 · MS 2018

    '멈추지만 않는다면 천천히 가도 좋다.' -孔子-

  • 꼭고려대의대가자 · 880481 · 19/11/27 07:47 · MS 2019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용기를 가지고 계신 것이 정말 부럽습니다. 꼭 원하는 이상을 실현시키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되셨으면 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 sodium chloride · 870863 · 19/11/30 01:08 · MS 2019

  • 똑바로서라핫싼 · 880851 · 19/12/03 19:50 · MS 2019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높은 이상도 좋지만 현실의 나 자신을 더 챙기면서 가면 과정도 결과도 조금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쩌면 자아는 그 높은 목표들보단 지금현재 보살핌과 챙김에 더 감동할지도요! 내일 수능성적 발표인데 원하시는 결과 나오길 기원합니다 3년내내 수고많이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