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숨겨진아들달라이라마 [899737] · MS 2019 · 쪽지

2019-09-14 16: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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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신에 대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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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은 자신을 神이라고 부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모든 인류가 자신을 主, 즉 주인, 마스터, 매저스티로 부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근거가 있는 바람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 넓게 보면 이슬람과 바하이 계통 종교의 신이자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하느님이자 이스라엘 백성과 성서의 신인 'YHWH'는 다른 신들과 그 본질부터가 차원이 다른 신이다.


첫 등장부터 YHWH는 다른 우상신, 이교신들과는 본질적 근원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YHWH의 히브리적 어원은

'내가 바로 그(HE)이다.' 라는 뜻이다. 그는 다중우주와 온 세계의 창조주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말하자면 부동의 동자(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고 운행하게 하는 태초의 근원)이다.


그는 바다에도 비유된다. 성 토마스 아퀴노에 따르면, "지구와 인류의 역사는 신이라는 망망대해가 파도를 칠 때 튕겨져 나온 한 방울의 바닷물에 불과하다." 라고 한다. 성 아우구스띠노에 따르면, 기독교의 근원 진리로 여겨지는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를 인간 '주제'에 온전히 이해하려 드는 것은 신이라는 바닷물을 조개껍데기에 담아두고 대양 전체를 이해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와 같다고 말한다.   


확언하자면 기독교의 신은 그 본질부터가 존재의 근원이다. 성 토마스 아퀴노는 죽기 전 신학대전을 썼던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음을 동료 수도사에게 고백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며칠 전에 십자고상 앞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현신을 만났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비록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들로 여겨지더라도, 기독교에서 사변적으로 정의한 신은 무려 그리스 로마 아즈텍 인도 이란 중국 아랍 등지에서 조차 이름을 언급할 수조차 없는 창조주로서 숭배받았고 가시적인 형태로 우상화되지도 않았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신약성서 사도행전, 꾸란 등에 자세히 나와 있음) 누구나 마음 속에는 종교적 성향과 빛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런 정신이 상정하려 하는 절대자가 바로 기독교에서 정의하는 신이다. 


그의 이름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신화 속 창조신의 이름을 따서 엘, 엘로힘이라 불리었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옥황상제의 이름을 빌려 상제라고 불리었으며, 아랍에서는 태양신의 이름을 차용해 알라라고 불리었고, 한국에서는 전통 종교의 천지신명의 이름을 빌려 하느님, 하나님, 하날님 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되고,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세워질 때부터 그가 그의 입으로 언급한 그의 실명은 'YHWH' (야훼/여호와) 하나 뿐이다. 


존재의 근원이자 우주의 창조주인 YHWH.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선한 신이다. 그는 영원히, 지극히 선하고 그의 명령과 그의 모든 행위와 역사는 선하기 때문에 인간이나 천사 등의 지성적 피조물이 그에 맞서 창조목적에 어긋난 짓을 하면 반드시 선한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분노의 불길조차 거룩하고 심판은 항상 옳다.


또한,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제외하면, 기독교(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에서 가장 중요한 신과 인간의 매개 역할을 하는 존재는 바로 그리스도, 육화하신 하느님이다. 2000년 전 예수라는 목수의 아들이 베들레헴이라는 누추한 동네에서 태어나, 갈릴래아 촌동네 나자렛 里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가 바로 하느님 그 자신이며, 자신이 하느님의 하나 뿐인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기적과 가르침을 베풀다가,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의 죄를 구속하고 이후에 부활하여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희망이 되시고, 성령을 보내 세상을 다스리시다 차후에 다시 오셔서 심판주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공통적인 레퍼토리이다.


YHWH의 선함이 여기서 또한 드러나는 것이다. 원죄와 중죄 속에서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을 위하여 굳이 물방울 수준의 행성에 친히 나타나신 YHWH 하느님. 그의 사랑의 측면을 드러낸, 사랑의 화신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태석 신부의 묵상곡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YHWH는 분노의 신인 동시에, 사랑의 신이어서, 그리스도를 통해 항상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대하라고 가르친다. 


선하디 선한 신. 그것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YHWH의 면모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흔한 반론이 제기된다. 


우선 YHWH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당하는 상황을 연출하다시피 해놓고서, 그들의 불순종을 탓하고 그들에게 멍에를 씌우며 인류의 역사와 죄의 역사가 시작되는 서막을 알린다. 

YHWH는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들이 죄에게 당하게끔 방치한다. 최초의 인류가 일종의 원죄 상태에 들게 되면서,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자손들인 우리는 불교적 용어를 빌리자면 고(苦)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구약성서의 YHWH는 구약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였고, 젖먹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이스라엘인들이 이방 여인들을 '강탈'하고 재물을 '수탈'하는 비상식적 노략질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넘어 지시하였다. 호사가적인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YHWH가 죽인 사람의 수가 최소 2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후대 기독교와 이슬람교인들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자신의 가족과 친척, 이익관계에 있는 이웃에게는 신약성서의 가르침대로 행하도록 하면서, 그 외의 '적'들에게는 무자비하였다. 대표적인 예로서 십자군 전쟁과 인디언 학살과 같은 일들을 벌여놓고서도 구약성서의 글귀들을 그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았다.

이러한 행각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상식인의 입장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브라함계 제종교의 신 YHWH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최소한으로만 봐도 정의전쟁론자인 것이다. 


이 두 가지 반론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 역시 충분히 역공으로서 재반론을 제기해왔다.

첫번째로, 태초에 YHWH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신뢰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무척 사랑했기에, 그들에게 자유의지까지 선사하였다. 다른 동식물 군속이나 천사들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의지로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는다. 선악과를 먹은 죄이다. 구약성서의 서사에서 이 죄를 흔히들 '원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독교, 특히 가톨릭을 비롯한 보편교회(일부 성공회-루터교 성사교류연합, 동방 정교회 포함)에서는 실상 이 '원죄' 이전에 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신의 뜻에 순종하면 선이고, 신의 뜻에 불순종하면 그것 자체로 악이다. 그렇다면 신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지점부터 선과 악은 구분되는 것이다. 즉 원죄는'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최초의 죄'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설화적 해석을 지양한다면, 원죄는 일종의 경향성이다. 정확히 말해 아담이 인간의 대표격으로서 죄를 저지른 서사의 내용은 바로 보다 완전했던 인간이, 신에게 불순종하고 죄로 떨어질 수 있는 '결함'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죄인 그 자체라기 보다는 죄인이 되기 쉬운 모자란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원죄는 결국 하나의 상태로서, 유전되는 죄라고 보기 보단, 인간 본연이 타고난 경향성을 유기적 해석에 따라 바라 본 이해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성으로부터 발현된 죄성에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실제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으로서, 이를 본죄라고 한다. 이러한 본죄는 끊임없이 진정성 있는 회개와 보속(믿음에 따른 행위)을 통해야만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궁극적으로 이 원죄와 본죄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하느님과의 단절로부터 하느님과의 연대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회개와 보속, 죄적 경향성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하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두번째로, YHWH가 벌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에 대해서는 현대 기독교가 대한민국 극보수 개신교의 입장과는 다르게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보다는(주후 4세기 전후로 한 때는 가톨릭 또한 이 주장을 지지했었다.)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주장과 자유주의 성서학자들의 주장을 절충한다면(아마 두 주장은 상극이겠지만) 결국 구약성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유기적 가르침으로서 이해되야 하므로 궁극적으론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과 유기적 영감에 따라 쓰여졌기 때문에 하느님의 역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른 정당화로서 쓰여진 역사 서술이 공존하고 있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YHWH의 행위 자체가 옳다기 보다는 신의 분노에 대한 신학적 서술이자 '행위의 내적인 논리'로서 이해해야 하며, 당시의 역사적 측면을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성서는 수많은 맥락과 함께 읽어야 하고 수많은 신학자들과 교부들의 해석이 존재하며, 읽는 사람 개인의 생각과 환경, 사고체계도 해석과 수용의 중요한 원천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침략전만을 두고 구약 전체를 평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론적으로, 필자 개인은 요새 평화의 종교인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직 신학교 지망생이자 사반수생으로서 4시 20분이 지나도록 꽤나 진지한 나무위키성 문서를 작성하는 데 공을 들인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함께 얼른 화장실이 급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겠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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