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주✨ [899148] · MS 2019 · 쪽지

2019-07-18 00: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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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기록 - 몇 가지 주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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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면 줄곧 네이버에 들어가고는 한다.

정치는 어떤 형국으로 가는 중인지, 오늘 날씨는 대체로 어떻게 되는지를 찾기 위함도 있지만, ‘오늘은 그게 없었는가’를 따져든다. 나도 마녀사냥을 당해본 적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인터넷이라는 소셜 광장에서 누군가의 밀실이 밝혀진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두고 고민할 시간이 생기게 될까 염려스려워서. 오늘은 마녀사냥이 없었다는 사실에 흡족해하며 곧바로 아이폰의 홈버튼을 누르고 찾아 헤맨 음악이 Swings의 ‘Holy’ 였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이, 비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사자에게 그것은 쓴 영양제가 될 것이다. 다만, ‘관용’이 전제되지 않은 비난과 악설은 대상에게도, 당사자에게도 피해만 입힐 뿐인 창일 것이다.


동등성의 원리에 따라서, 그것이 정당화될 지는 몰라도,

하나 분명한 것은, ‘Holy’에 나오는 구절대로 우리는 종교를 등에 업은 모순 덩어리라는 것. 그러기에 집단 속에서는 도덕적 상상력은 추락할 것이라는 것. 라인홀드 니버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의지 (종교적 선의지) 그것의 고무를 위해 인격적 접촉에 의존하고, 또 욕구를 생생하게 드러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Reinhold Niebuhr, ,140 페이지 중)



-대학의 필연성


내가 이 지구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대학을 왜 가야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 폐아노의 공리계 없이 1+1=2라는 매우 어려운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가. 당치도 않은 일.


대학을 왜 가야하는가에 대해 ‘자기과시’ , ‘자기보호’ 외에 다른답을 도출하는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분명 선행하는 조건들을 이해해야 했다. ‘나’라는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표상하는가. 


결국 ‘불안’을 얘기하고, ‘무서움’을 발설하며, ‘홀로 있음’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그 조건을 잘 이해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도식 속에 존재하는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 대학에 가는 것인가. 옳아, 그러면 굳이 대학을 올해 갈 이유가 없다.

그것은 그다지 급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유를 되찾으며,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을 바라보도록 하자.


나를 사랑하는 방법부터, 학문을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부터, 글을 읽을 때에 호기심을 갖는 방법부터, 부모님께 진정한 사랑을 표하는 방법부터,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방법부터,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부터,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훗날의 2세를 사랑할 준비를 하는 것 부터 익히는 것.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대학에 들어가도, 그 도식 속의 자아를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날카로운 근거가 될 것이다.




-실패의 트라우마


여전히 재수를 실패하고 나서 보냈던 겨울의, 살갗이 찢어지는 추위로 인한 내면적 아픔과 외적 상처가 떠오르고는 한다.

그것 때문이라도, 당분간 이유를 좇지말고 대학으로 가버릴까 하는 생각에 억지로 집중력을 불태운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는 단순히, 그것의 발원지점이었던 ‘대학의 부재’ 라는 조건을 무기력화 시킨다고 하여 풀릴 일은 아닌 듯 싶다.


내면적으로 그것을 단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여전히 나는 부박해질 것이요, 그러기에 흘러내려 무너질 것이다. 


이 시간을 따라서 단단해지고 굳건해지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트라우마에 대한 ‘말문트기’의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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