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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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에 잎이 없어 기분이 산뜻하였고, 하늘은 하얘서 기분이 슬펐던 나날이었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수능이 끝나면, 그 결과대로 타인들은 내게 그에 맞는 짐의 무게를 지워줄 것이라는 말.
좋은 결과가 아니었기에 내가 짊어지게 된 짐의 무게도 퍽이나 컸으며, 그의 형태는 ‘선택의 압박’이었다. 그 고독한 압박 속에서 자리 잡는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파멸’을 유도할 뿐이었다.
그러기에 나목을 보고 비웃었던 것이고, 나보다 더 잘나 보이는 하늘의 색깔을 보고 ‘이름 모를 열등감’을 느꼈던 것이다.
삼수라는 선택. 나는 그것이 내 인생을 19년 동안 운영해 오면서, 계산서에 없었던 시간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죽어있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맞을 성싶다.
그 짐의 무게가 내가 들 수 있는 역량 보다도 훨씬 컸다는 것.
그래서 얼른 그 ‘파멸’을 피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삼수’를 단행했던 것이다. 마치, 10월 4일의 다음날을 10월15일로 상정한 그것 처럼.
어떠한 목적성을 가진 선택이 아니었고, 어떠한 철학을 가진 채 멋있게 내렸던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파멸만은 막기 위해, 이대로 영구히 이 세계에서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행했던, 내 인생에 있어 최후의 선택이었을 뿐.
그렇게 삼수를 하러 선릉이라는 도시에 갇히게 되었고 — 정확히 말하자면 선릉에 위치한 고시원이지만 — 나는 또 다시 기나 긴, 루핑된 나날들을 보내야 할 터였다.
그 혹독함의 지속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지켜왔던 자존이 파괴되는 것은 아닐까, 불행함으로 꽉 채워진 삶이 되지는 않을까하고,
참 많이도 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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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행복해짐을 느낀다.
고시원이라는 공간에 갇히긴 했지만, 달리 보면 이 1.5평 짜리 방은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지 않는가.
그 작은 고시원의 창으로 내게 위로의 빛을 던져주는 달과 태양을 보게 되면, 하루의 노곤함과 긴장감이 풀어지곤 한다.
나이를 먹게 되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매일 공부를 마치고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또 그를 이유로 내 자존이 여전히 유지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참 감사하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말 보다는, 공부를 재미있어 한다는 말이
더 무섭다는 것을, 이제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 작은 얘기가
순식간에 내 삶의 중요한 일부로 차지하게 됐다는 것에도 감사하다.
이제는 공부를 할 때에 시간을 체크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흥미를 체크하고 적어둔다. 그것이 내 자존을 더 굳세게 지키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며, 사실 상 그것이 제대로 된 공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질서잡힌 도시 속에서 무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때로는
부끄러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던져졌기에
이 곳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정말 질서가 잡혀야만 삶이 행복해지는 것일까.
요즘은 그런 생각에 빠지며 잠에 들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남은 시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서도 간간히 ‘무질서’를 택해보는 삶을 살기로 했다.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정경이 필연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작은 사실을 하나 알기 때문이다.
삼수도 마찬가지.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또 많은 것을 다시 인식하고 있고,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있다.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 감행했던 부끄러운 선택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내가 한 짓 중 가장 잘했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살아내고 있다.
서태지의 말이 이제는 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보이는 길 밖에도 세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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