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benius [711166] · MS 2016

2019-06-14 04: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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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수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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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경우, 어떤 큰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의 명분에 대한 간단한 글을 남기는 특성이 있다. 옛날에 재수시작할 때도 내 일기장에 재수와 관련해서 이런 글을 적었었고, 그 글의 의도와 딱 맞는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글을 다시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수많은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를 가고자 한다. 그런데, 왜 의학이 추앙 받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 적은 없을 듯 하다. 주변의 말을 듣고 아무생각 없이 가는 경우가 꽤나 빈번할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의학이라는 학문은 군대와 비슷한 점이 많다. 사소한 실수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며, 분업화가 상당히 체계적으로 되어있고,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군대와 매우 비슷하다.
실제로 의대는 군대와 비슷하게 폐쇄적이고, 스파르타 식이며, 군기를 잡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공부해서 의대를 들어간다는 건 고생을 사서 하겠다는 말과 동치이다.

또한, 의대를 가는 순간, 진로의 선택에는 상당한 제약이 생기고, 약 30대 중반까지 대학병원에서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하며, 어쩌면 평생동안 진료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고독하게 갇힌 채로 살지도 모른다.

의대의 이런 특성 때문에 미국 등의 선진국에선 surgeon이 기피직업, 소위 3D직업군에 속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나라에선 의대선호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2가지 정도로 정리되는 듯 하다.

첫번째, 걸어야 할 길이 다른 진로에 비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학과, 소위 메디컬 과정 커리큘럼은 30대 중반 정도까지 잡혀있는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큰 틀에선 다 똑같은 길을 걷는다.
즉, 주체적인 삶을 살지 않고도, 공부와 정치질만 하면서 내 삶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적인 말은 아니다. 도덕교과서, 진로교과서에선 주체적인 삶을 항상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너무나도 다르다. 주체적인 삶을 결국 내가 스스로 내 길을 닦아가는 것이고, 이는 생각 그 이상으로 힘든 작업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창업이다. 서울대를 포함한 상위권 대학에선 최근 창업관련 강의를 대폭 증감시켜서 학생들의 수강을 유도하고 있다. 그런 수업을 들어보면 창업이라는 게 정말 메리트있는 좋은 길이라고 선동당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기업 중심 경제체제에서 중소기업은 부품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그 부품이 되기위한 엄청난 경쟁을 한다.
경쟁에서 밀리면 회사는 휴지조각 나는 거고, 그 후엔 일이 복잡해진다. 1학년 때 일물 교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 분은 위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시게 되었고, 고생끝에 결국 학교로 돌아와 강의교수로 임용되셨다고 한다. 그 분은 매우 잘 풀린 케이스이다. 안풀리면 진심 답도 없는게 창업이다.
여담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리도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이번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박영선으로 채택되었다.....중소기업과는 거리가 먼 아나운서, 운동권 출신 인사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자리에 앉힌 건 도대체 뭔 심보인지 이해가 안간다.
연구원도 마찬가지이다. 설명이 더 길어질테니 여기서 말을 줄이겠다.

두번째, 전문직이라는 점이다. 일반 대기업 회사 정년은 무의미한 수치이다. 대부분 50대 초반 명퇴를 하게 된다. 일반적인 직장의 가장 큰 문제는 '안정성'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정년이 보장되지도 않지만, 소위 '업계근황'에 따라 너무나도 유동적이다.
한달 전 쯤인가 공대아재 글을 보면 이런 부분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있다.
전문직이 가진 장점은 너무나도 많다. 정년은 당연히 보장되며, 상대적으로 업계근황을 타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만을 챙기며 살 수 있다.
더 설명하는 건 글의 취지와 어긋나므로 이쯤에서 그만 줄이겠다.

위의 두가지 이유는 꽤나 심플하지만, 정말로 강력한 메리트이다. 위 두가지 내용은 '의사면허증'이라는 비장의 카드로 수렴하게 된다. (물론 인턴, 레지던트 과정도 있지만...)
메디컬 계열은 공부를 통해 직접적이고 유용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특성은 의치한의대 빼곤 어느 직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메디컬만의 큰 무기이다. 

내가 반수를 하겠다고 주위에 알렸을 때 주변에선 나를 많이 말렸고, 지금도 말리고 있다. 대부분 위에서 설명한 의대의 단점을 들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공계 단점은 저거보다 10배는 더 많은 분량의 글을 적을 수 있다. 이공계의 미래는 상상 그 이상으로 암흑이다. 적어도 조선에선 말이다. 물론 아예 취업이 안되고 그런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죽도록 밤새가며 공부한 것에 비한 결실은 매우 미미하고 적다고 난 생각한다.
심지어, 이공계는 적성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에, 이런 점까지 다 고려해보면 나에겐 암흑 그자체이다. 

적성하니깐 저번에 어떤 분이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이공계 공부 가지고 징징 거리면 의대공부도 징징거리고, 포기할 거리고......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엄살이 좀 있는 편이기도 하고, 아마도 의대공부를 하면서도 징징거릴 것 같다. 그렇지만, 의대공부는 이공계공부와는 다르게 확실한 결실이라는 게 있다. '의사면허증'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공부와 없는 공부는 생각보다 매우 큰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사견인데, 이공계 공부량도 보통은 아니다. 본인기준, 이번 기말고사 공부할 때 500페이지 책 4권을 통째로 공부했다. 의대공부량이 엄청나고는 하는데, 솔직히 이공계 공부량도 밀리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계항공이 좀 ㅄ같이 많이 시킨다고는 하던데....

나도 이제 점점 20대 중반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고, 이 입시를 성공할지 실패할 지는 잘 모르겠다. 수능이라는 시험도 결코 쉬운 시험이 아니고, 그 불확정성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능이라는 수단이 어떻게보면 진로를 바꾸기 가장 쉬운 축에 속한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죽도록 공부하며 달려왔고, 이렇게 살아온 내 인생, 아까워서라도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작년 10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고민하고 고민해본 결과, '서울대'라는 곳은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미 마음은 기운 상태이다. 

사실 정말 두렵다. ㅈ같은 입시판에 또 한번 더 뛰어드는거도 너무 싫고, ㅈ같은 국문법을 공부하는 것도 믿기지가 않고, ㅈ같은 고전소설, 현대소설, 현대시를 읽는 것도 믿기지가 않고, 다시 ㅈ같은 국어 비문학 지문 읽는거도 믿기지가 않고, ㅈ같은 타임어택 운빨 ㅈ망겜 과탐을 공부해야한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20년, 30년을 더 내다볼 때 5개월 정도의 암흑기는 한줌의 먼지에 불과하다. 이런 마인드로 11월 14일까지 버틸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꼭 성공해야만 한다.


6/14 새벽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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