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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킴 [726956] · MS 2017 (수정됨) · 쪽지

2019-05-03 18:36:34
조회수 5,128

그리마와 싸운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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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8년 초반...


서울 도봉구와 노원구 어느 중간 지점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았다.


예전에 살던 청파동의 집에 바퀴벌레가 자주 등장하였기에, 벌레가 없는 이번 집은 아주 행복했다.


벌레가 없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소름끼치는 벌레들의 발자국 소리에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고


이상한 약을 집안 여기저기 놓아두며 벌레가 죽었으면 하고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벌레가 등장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없기에 걱정이 없는 밤을 지낼 수 있다는 것...


정말 커다란 행복이었다.


각설.


지금까지 이 집에 살아오면서 벌레는 딱 2번 보았다.


그러나 두 번 다 같은 개체였으니, 본 것은 한 마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다.


바로 그 한 개체는 그리마였다.


엄청나게 징그러우니 네이버나 구글에 그리마를 검색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것을 처음으로 조우한 것은 4월 따뜻한 어느날이었다.


불을 끄고 아이패드로 넷플릭스를 보던 나는, 벽면에서 왠지 모를 괴이함을 느꼈다.


침대 옆 벽면에 붙은 작은 머리카락? 같은 것이 나의 이목을 확 끌어당겼다.


나는 최대한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형광등 스위치로 다가갔다.


그리고 스위치를 켠 순간, 그것은 선명해졌다.


작은, 약 15mm의 솜뭉치같은 무엇인가를 봤다.


재빨리, 하지만, 벌레를 자극하지 않도록 서서히 휴지를 찾아 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의 시선은 그 솜뭉치를 향해 있었으나, 휴지를 빠르게 6칸 뜯어 손에 쥐는 그 순간.


그 짧은 순간 고개를 숙였을 때 그 솜뭉치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강해져서 돌아와라.'


--


그렇게 3달이 지났다.


사관학교를 다니는 내 친구가 내 집에 하루 묵고 갈 일이 생겼다.


친구와 술을 약간 걸치고, 집에 들어와 자려고 준비하는 순간이었다.


전자레인지가 있는 벽면 위에 붙은 그것을 보았다.


아주 거대했다. 


그것은 어느샌가 5cm가 넘는 크기로 성장해있었다.


3개월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다시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나 몰래 3개월 동안 몸집을 불리며 동거한 것일까?


나는 그녀석을 보자마자 분노에 휩싸였다.


술김이었는지, 아니면 창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주황색 가로등이 너무 눈부셔서인지는 잘 모른다.


아니면 내가 저 녀석을 살려주었는데, 기어코 다시 들어와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저 모습이, 참으로 건방지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6칸의 휴지를 뜯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하여 10여 칸을 더 뜯게 만들었다.


그것을 향해 맹렬한 돌진을 했다.


벌레는 나를 마주친 것에 죽음을 예감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사근한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그걸 으깬 휴지를 펼쳐보진 못했다.


다만, 내가 쥔 휴지의 자그마한 그 틈 사이로 몸통에서 뜯겨져 나왔을 다리 몇 가닥만이 보였다.


나는 휴지를 바로 변기에 넣고 돌렸다.


--


이게 그리마와의 마지막 조우였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벌레도 내 집에서 목격하지 못했다.


간혹 들어오는 힘빠진 모기만 몇마리...


--


아직까지도 의문이 있다.


그 그리마는 '돌아온 탕아' 였을까.


아니면 나와 함께 숨죽이며 살아온 '동거인'이었을까.


동거하였다면... 무엇을 먹고 자란 것일까.. 내 몸 위를 언젠가 기어가지 않았을까..


소름끼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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